‘칠성파 VS 반칠성파’ 휴전은 없다
▲ 부산 조폭세계를 소재로 한 영화 <친구>는 칠성파와 20세기파의 대립을 스크린에서 극명하게 드러냈다. 아래는 부산 장례식장 조폭난동. | ||
부산지방경찰청 조폭 담당의 한 관계자는 “계속 수사를 진행중인 상태지만, 현재로 봐서는 부산 내 해묵은 ‘칠성파 대 반칠성파’ 대결의 연장선상으로 보인다”고 조심스레 밝혔다. 기습 폭행으로 피해를 당한 대부분이 칠성파 조직원이거나 그 추종세력으로 파악되고 있고, 가해자로 일차 검거된 세 명의 20대 청년들은 모두 ‘20세기파’와 ‘유태파’ ‘영도파’의 행동대장인 것으로 밝혀지고 있는 것. 부산의 조폭 세력들 간의 ‘피의 전쟁’ 들을 돌이켜 본다.
부산 폭력조직의 양상은 한마디로 칠성파 대 반칠성파의 대결장이었다. 한국전쟁 직후인 1950년대 ‘세븐 스타’로 시작된 칠성파는 60년대 본격적인 부산의 최대 조직으로 자리잡는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가히 반백년에 걸쳐 부산은 칠성파에 의해 장악됐다.
칠성파는 부산을 주무대로 한 탓에 중앙에서는 다소 유명세를 덜 탔던 것이 사실. 70~80년대 호남 세력인 서방파 양은이파 OB파 등이 서울을 장악, 이들이 언론에 ‘3대 패밀리’로 회자되며 국내 조폭의 대명사로 군림했다. 이에 대해 주먹계의 한 원로는 “호남은 먹고 살 것이 없어 다들 서울로 올라간 것이고, 부산은 당시만 해도 서울 못지않은 시장이 있었기에 칠성파가 굳이 서울로 올라올 이유가 없었던 것뿐”이라며 “단일 세력만으로 볼 때는 칠성파의 위력은 서방파나 양은이파에 못할 것이 없다”고 전했다.
조폭을 오랫동안 담당했던 한 경찰 관계자 또한 “부산은 항구도시여서 마약 밀매와 밀접했고, 지리적 특성상 일본 야쿠자와의 교류도 일찍부터 시작됐다. 호남 주먹들이 쇠파이프 회칼 등으로 나이트 룸살롱 상권 다툼 벌일 때부터 이미 칠성파 등 부산 주먹들은 양복 입고 비행기 타며 국제 기업인 행세를 하고 다녔다”고 밝혔다. 칠성파의 보스로 알려져 있는 이강환씨가 80년대 일본 야쿠자 두목과 의형제를 맺은 사건은 지금도 유명한 일화로 남아 있다.
부산 조폭들의 피의 전쟁 양상은 한마디로 절대 강자인 칠성파를 무너뜨리고 지역내 일인자로 새롭게 군림하고자 하는 뚜렷한 목표 아래 거듭됐다. 이씨가 칠성파를 본격적으로 접수하기 시작한 70년대 들어 ‘반칠성파’가 꿈틀대기 시작했다. 칠성파에 제일 먼저 도전장을 낸 것은 ‘필생의 라이벌’인 ‘20세기파’였다.
당시 부산 최대의 상권인 광복동과 남포동 일대를 칠성파가 굳건히 장악하자 김아무개씨가 대신동 등 주변 세력을 규합, ‘20세기파’를 만들어 남포동으로 진출하면서 충돌이 불가피했다. 또 다른 상권의 중심으로 부각한 서면 일대에는 명아무개씨가 ‘서면파’로 세력을 형성했다.
아무튼 이때부터 칠성파와 20세기파의 죽고 죽이는 전쟁은 시작됐다. 두 계파간의 다툼은 지난 2001년 충무로를 강타한 히트 영화 <친구>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실존 인물을 모델로 만들어진 이 영화에서 극중 유오성과 장동건은 어릴 적 ‘불알 친구’임에도 불구, 각각 칠성파와 20세기파에 몸담으면서 서로 죽고 죽이는 원수로 대립하게 된다.
80년대 5공화국은 그야말로 조폭의 세상이었다. 부산에서도 활발한 이합집산이 빚어졌다. 칠성파의 중간보스 격이었던 김아무개씨가 ‘신칠성파’로, 천아무개씨가 ‘영도파’로 분파했다. 이들 역시 칠성파 타도가 지상과제였다.
20세기파 역시 안아무개씨가 ‘신20세기파’를 결성하면서 여전히 칠성파에 칼을 겨누었다. 하지만 칠성파의 이씨는 오히려 전국의 조폭과 연계한 ‘화랑신우회’ 등을 조직할 정도로 그 위세가 더욱 커졌다. 서면파를 흡수했고, 신칠성파 영도파 신20세기파 등을 때론 혼내고 때론 토닥거리며 부산을 장악했다.
부산 지역 ‘밤의 권력’ 판도에 일대 변화가 불어 닥친 것은 90년 범죄와의 전쟁 때였다. 이씨와 안씨 천씨 등 4대 계파의 보스들이 줄줄이 구속 수감된 것. 칠성파는 절대 권력자 없이 여러 명의 부두목급 조직원들이 서로 견제하고 협력하며 조직의 명맥을 유지했다. 신20세기파는 재건20세기파 통합20세기파 등으로 분파됐다. 그런 사이 또 하나의 신흥 조직이 무섭게 발호했다. 조방앞 지역을 근거지로 김아무개씨가 조직한 ‘유태파’가 그것.
부산 경찰청의 한 관계자는 “유태파는 그 뿌리가 칠성파도 20세기파도 아닌 신생 조직이다. 보스였던 김씨가 2004년 4월 구속되기 전만 해도 그 위세가 대단했다. 한때는 칠성파도 벌벌 떨 정도였다”고 전했다. 하지만 유태파도 보스인 김씨의 구속 수감으로 최근 좀 주춤한 상태. 김씨는 2004년 5월 교도소 내에서 칠성파 추종세력으로 보이는 한 재소자에게 폭행당한 사건이 벌어져 두 계파간의 전쟁이 새삼 화제가 되기도 했다.
30여년째 칠성파와 맞서고 있는 20세기파와 칠성파에 반감을 품고 떨어져 나온 신칠성파 및 영도파, 그리고 신흥 조직인 유태파는 모두 ‘칠성파 타도’라는 공통된 이해관계가 물려 있었던 셈이다.
과거 조직 보스들이 오랜 수감생활을 마치고 출감한 2000년대는 암흑세계도 상당히 변해 있었다. 조직은 여전했지만 조직원들은 명확한 실체가 없었다. ‘형님’으로 모든 것이 통하는 일사불란한 체계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대신 ‘회장님’이 존재했고 그와 일종의 계약 관계를 유지했다. 연로한 전 보스들은 자의반 타의반 은퇴의 길을 걸었다.
부산 경찰청 관계자 역시 “이번 사건도 이씨와는 무관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현재 서울과 부산을 오가며 원로 주먹들과 곧잘 어울리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그가 만든 칠성파는 여전하지만 그의 이름은 전설로만 남아 있는 것이 사실”이라고 전했다.
감명국 기자 km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