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 20알·육포 2봉지…‘황제도피’ 비참한 말로
국과수가 지난 25일 유 전 회장 시신 부검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작은 사진은 유 전 회장 점퍼 주머니에서 발견된 육포 2봉지와 콩 20알. 임준선·최준필 기자
한때 보잘 것 없는 쓰레기 취급을 받았던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73)의 유류품들이 이제 그의 마지막 행적을 밝힐 수 있는 중요한 단서로 떠올랐다. 하지만 그의 유류품들은 도무지 일관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어 여러 의문을 낳고 있다. 도망자 신분에 맞지 않은 물건들도 섞여있을 뿐만 아니라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도 없으며 어디에 사용했는지 추정이 불가한 것들도 포함됐기 때문이다.
유 전 회장의 시신은 겨울용 검정 점퍼와 스웨터, 내복, 면바지를 입고 양말은 신지 않은 채 흰색 신발은 벗겨진 상태로 발견됐다. 언뜻 보면 허름한 노인의 복장이었지만 여기엔 반전이 숨겨져 있었다. 그가 입고 있던 점퍼가 1000만 원 안팎의 이탈리아 명품 브랜드 ‘로로피아나’의 제품이었던 것. 이 브랜드는 워낙 고가 제품만 판매하며 VIP 고객 중심으로 영업을 하는 터라 일반인에겐 생소하게 여겨졌다. 하지만 생전 독특한 취향이었던 유 전 회장의 특성상 고가에다 희소성을 자랑하는 이 제품을 입고 있는 게 어색하지 않다는 평이다.
신발 브랜드를 밝히는 과정에서는 웃지 못 할 해프닝이 발생했다. 당초 경찰은 신발 태그에 ‘세탁을 할 수 있다’는 뜻의 독일어 단어를 영어로 잘못 읽어 명품 브랜드 ‘와시바’ 제품이라 발표했으나 “존재하지 않는 브랜드”라는 지적을 받곤 이내 실수임을 인정했다.
한 가지 의문은 유 전 회장의 차림새가 다소 부자연스러웠다는 점이다. 상의는 복부와 가슴이 드러날 정도로 위로 말려 올라간 상태였으며 바지도 지퍼가 내려져 골반까지 벗겨져 있었다. 이 때문에 다른 장소에서 유 전 회장을 죽이고 이곳에 시신을 유기한 것 아니냐는 주장이 제기됐지만 서중석 국립과학연구소 원장은 “저체온증이 오면 뇌가 발한감을 느끼면서 무의식적으로 옷을 벗는 ‘이상 탈의’ 현상이 올 수 있다”고 했다.
의류 외에 유 전 회장의 몸에서 발견된 유류품은 총 4개다. 비료 포대 1개와 깨진 사기 그릇조각 2개, 콩 20알, 육포 조금. 유일한 음식물인 콩과 육포는 도주 중 비상식량으로 섭취했을 가능성이 높은데 그가 은신했던 숲속의 추억 별장에서도 육포와 피스타치오 등 견과류가 발견되기도 했다. 어떤 이유로 별장을 빠져나오며 급하게 챙겼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 유기농 음식이 아니면 쳐다보지 않았던 유 전 회장이지만 최후의 식사는 초라함 그 자체였나 보다.
곱게 접힌 채 상의 주머니 속에서 발견된 비료 포대의 사용처는 어디였을까. 기독교복음침례회(일명 구원파) 신도들도 도무지 추측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잠을 자거나 휴식을 취할 때 깔고 앉으려 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깨진 사기그릇 조각의 용도도 의문인데 도주 중 육포를 자르거나 풀을 베는 용도로 썼다는 다소 황당한 얘기들만 나돌고 있다.
시신과 조금 떨어진 옆에서는 회색 천가방이 발견됐다. 가방 한 면에 ‘꿈같은 사랑’, 다른 한 면에 ‘글소리’라는 글씨가 적혀 있었다. ‘꿈같은 사랑’은 유 전 회장이 1991년~1994년 오대양 사건으로 구속됐을 당시 감옥에서 지내며 억울한 심경을 담아 신도들에게 쓴 편지글 모음집의 제목이다. 구원파 신도들은 이를 제2의 경전으로 받들 정도로 귀하게 여겼다고 한다. ‘글소리’는 구원파에서 정기적으로 펴내는 간행물로 유 전 회장의 교리를 담고 있다.
유 전 회장 것으로 추정됐던 안경은 매실밭 주인의 것으로 드러났다. 임준선 기자
유 전 회장의 신분을 드러내는 물건 중 하나인 이 가방은 구원파 신도들에게도 익숙한 것이었다. 해마다 금수원에서 성대하게 열렸던 ‘다판다 행사’에서 물건을 담아주는 용도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또한 이 가방은 유 전 회장이 몸을 숨겼던 별장에서도 발견돼 여기서 가지고 온 것으로 추정된다.
가방 속에 들어있던 건강보조식품 ‘ASA 스쿠알렌’, 파란색 돋보기도 유 전 회장이 생전 즐겨 찾던 물건들로 그의 신분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스쿠알렌’은 유 전 회장이 평소 빼놓지 않고 챙겨먹던 건강보조식품이다. 세모그룹 계열사가 판매하는 대표적인 상품으로 별장에서도 똑같은 제품이 발견됐다. 평소 돋보기를 많이 갖고 있기로 유명한 유 전 회장이라 파란색 돋보기도 별다른 의심을 사지 않았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도주 중 굳이 필요 없는 제품들을 왜 무겁게 들고 다녔냐’며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보내고 있다. 누군가 유 전 회장을 죽인 뒤 그의 신분을 나타내기 위해 일부러 넣어둔 것이 아니냐는 주장이다.
반면 가방 속에는 유 전 회장의 유류품이라고 쉽게 납득할 수 없는 물건들도 발견됐다. 빈 술병 3개와 치킨브랜드 ‘교촌’의 허니머스타드 소스 빈 통이 그것. 평소 유 전 회장은 술은 입에도 대지 않으며 미네랄 물과 유기농 음식만 먹는 것으로 알려져 쉽게 납득할 수 없는 부분이다. 한 구원파 신도도 “회장님은 치킨을 드시지도 않는데 소스가 웬 말이냐. 가장 황당한 유류품”이라고 증언했다.
더욱이 빈 술병 3개 중 ‘잎새주 소주’를 제외한 ‘순천만 생 막걸리’와 ‘보해골드 소주’는 시중에서 쉽게 구할 수 없는 물품이라 각종 의혹을 증폭시켰다. 막걸리는 순천지역에서는 대중적인 브랜드지만 이미 유통기한이 1년이나 지난 제품이었고 소주도 2007년에 생산중지된 것이었다. 도피 중 빈병을 주워 물을 넣어 다니거나 약물을 담아 먹는 등의 용도로 사용했을 수도 있겠지만 누구도 명확한 설명을 하지 못하고 있다.
한편 유 전 회장의 ‘사라진 유류품’을 찾기 위한 검경의 몸부림이 이어지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지팡이와 안경. 시신 발견 당시 유 전 회장 곁에는 천가방 외에도 나무 지팡이 하나가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시신을 수습하던 경찰이 나뭇가지로 알고 이를 두고 시신과 나머지 유류품만 챙기고 떠나버렸다. 이후 현장을 찾은 최초 발견자는 자신의 밭에서 시신이 발견된 게 께름칙해 “재수 없다”며 개천으로 던져버렸다. 유 전 회장과 직접적인 접촉이 많았을 것으로 보이는 유류품이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안경 역시 검경이 반드시 찾아야만 하는 유류품 중 하나다. 유 전 회장은 분신처럼 안경을 착용하고 다녔으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시신 주변에선 안경이 발견되지 않았다. 경찰은 지난 24일 송치재 별장에서 500m 정도 떨어진 지점에서 유 전 회장 것으로 추정되는 안경을 발견했다고 밝혔으나 안경이 발견된 매실밭 주인 것으로 드러나 또 한 차례 망신을 당하기만 했다.
박민정 기자 mmjj@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