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기부 간부들 서로 “네 탓” 떠넘기기 안간힘
▲ 수지 김 | ||
검사는 당시 대공수사국장을 불러 사실을 확인하고 있었다. 반듯한 이마에 하얀 선비 같은 인상을 주는 신사풍의 남자였다.
“해외에서의 현지 기자회견 결정은 국장 선에서 할 수 있는 건가요? 아니면 안기부장이 결심해야 할 사항인가요?”
“그건 부장의 결심사항이라고 봅니다.”
수 사국장이 침착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는 대공수사국에서 잔뼈가 굵은 철저한 정보 기관원이었다. 그가 덧붙였다.
“그러나 윤태식 사건이 발생했을 당시 부장님께서 대공수사국장인 저에게 해외 현지에서의 기자회견에 대해 물으셨다면 전 분명히 반대했을 겁니다. 기자회견이 잘못됐을 경우 국가체제가 흔들릴 수 있고 국제적인 망신으로 가볍게 처리할 사안이 아닙니다. 제가 대공수사국장으로 있는 동안 한 번도 대공 사건을 조사도 없이 기자회견을 한 적이 없습니다. KAL기 폭파범 김현희를 바레인에서 신병인수를 해 왔는데 그때도 완벽한 조사가 끝난 후인 몇 달 후에야 기자회견을 가졌을 정돕니다.”
“윤태식의 해외 현지 기자회견은 어떤 절차를 거쳐 누가 최종적으로 결정했을까요?”
해외공작국장은 검찰에서 부장의 강행 지시였다고 말했었다.
“남북 관련 중요한 사항입니다. 당연히 해외공작국장이 부장에게 건의를 해서 결심을 받았을 겁니다. 혹은 보고를 받은 안기부장이 기자회견 지시를 했을 수도 있습니다.”
두 가지 가능성을 다 포함한 객관적인 예측이었다.
“바로 그런 중요한 대공 사건이니까 당시 윗선에서 대공수사국장에게도 어떤 형태로든 의견을 구해왔을 거로 보이는데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지는 않았어요. 만약 저에게 기자회견과 관련해서 협조요청이 왔을 경우였다면 전 절대 반대했을 겁니다. 나중에 윤태식을 조사해서 기자회견과 사실이 전혀 다르다는 걸 알고 나서는 말이죠, 오히려 왜 부장이 나한테는 한마디 의견도 묻지 않으시고 해외공작국장의 건의만 받아들였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당시 부장께서 저에게 챙겨보라는 한마디 말씀만 하셨어도 그런 일은 절대 없도록 했을 겁니다.”
그 말에 검사는 해외공작국장의 진술을 들이대면서 물었다.
“해외공작국장의 말은 자기는 당시 ‘북한의 김만철 일가를 귀국시키라’는 특명을 받고 그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공수사국장이 부장의 결심을 받아 해외담당 부국장을 현지로 출장을 보내 기자회견을 한 것 같다던데 어떻습니까?”
“부장한테 그런 건의를 한 적도 특명을 받은 사실도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특명을 내렸다면 말씀드린 대로 전 절대로 반대했을 겁니다. 만약 제가 특명을 받았다고 칩시다. 그러면 제 부하인 수사관을 현지로 보내지 왜 해외담당 부국장을 파견하겠습니까? 사실 장 부국장은 저하고 입사 동기생으로 친한 사이였습니다. 부국장이 친구고 그 사건이 대공 사건인데도 장 부국장이 현지 출장을 가서 윤태식의 신병을 인수해 오는 사실도 제가 모르고 있었단 말입니다. 친구지간에 섭섭한 일이죠. 그런데도 해외공작국장이 어떻게 제가 특명을 받았을 것이라고 주장하는지 도대체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 국정원(옛 안기부) 건물 | ||
수사국장은 점잖게 해외공작국장을 질타했다. 윗분의 신임을 받기 위해 무리수를 강행했다는 것이 핵심이었다.
“그러면 사건 초기 어느 정도의 정보는 알고 계셨습니까?”
“안기부 내에서 간부들에게 전문이 돌았는데 윤태식이 북한에 납치당할 뻔했다가 탈출했다는 정도였습니다.”
“윤태식의 신병을 공항에서 대공수사국 요원이 인수해 오고 조사하자 곧 단순 살인범인 걸 자백했다죠?”
“그렇습니다. 조사한 지 24시간도 안 되서 수사단장이 내게 와서 일차 보고를 했는데 뭐라고 했느냐면 ‘전부 가짜입니다. 윤태식이 처를 죽여 놓고 북한으로 도망하려고 했다가 말을 바꾸어 납치당할 뻔했다고 자작극을 벌인 겁니다’라고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래서 제가 바로 전화상으로 1차장에게 보고하고 1차장은 장세동 부장에게 보고했을 겁니다. 그때 윗선에서 서로 어떤 연락을 했는지 몰라도 그날 밤 해외공작국장과 부국장이 제 사무실로 와서 어떻게 된 거냐고 물었어요. 그래서 제가 모두 가짜로 밝혀졌다고 했죠. 그랬더니 그 사람들이 기가 막혀 하면서 그놈 윤태식이 어떻게 감쪽같이 거짓말을 할 수 있겠느냐고 묻던 기억이 납니다.”
대공수사국장의 얘기가 계속됐다.
“제가 해외공작국 간부들에게 윤태식의 얘기들이 가짜라고 하면서 미리 기자회견을 한 건 실수라고 했죠. 그 말을 듣고 그들이 허망한 표정으로 돌아갔던 기억이 납니다. 그렇지만 당시 이미 납북미수 취지로 기자회견을 해 버린 상태였기 때문에 달리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1차장님과 부장님에게 제가 보고하면서 ‘이제 달리 방법이 없지 않겠습니까?’라고 했더니 차장님이나 부장님도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달리 방법이 없다는 건 윤태식 사건을 그냥 덮어두기로 하자는 거였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면 수사국장이 윤태식 살인 사건을 덮어두자고 건의를 해서 1차장과 부장이 결심했다는 소리가 되네요.”
“예. 저로서는 당시 상황상 달리 방법이 없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건의했고 부장, 차장도 그렇게 결심했습니다.”
“대통령에게도 보고된 사안입니까?”
“안기부장이 하는 사안이라 보고 여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당시 부하인 수사단장에게 어떻게 지시를 내렸죠?”
“같은 취지로 그대로 말했습니다. 다른 뾰족한 방법이 없으니까 사건을 덮어둘 수밖에 없다고 말입니다.”
“일단 윤태식은 북한공관에 갔다온 건 사실이기 때문에 국가보안법상의 잠입, 탈출의 혐의에 대해서 입건하고 송치해야 하는 게 원칙 아닙니까?”
“그렇게 하면 안기부에서 허위 기자회견을 한 게 탄로나게 되니까 덮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건 그렇다 칩시다. 그래도 윤태식이 사람을 죽인 점에 대해서는 경찰이나 검찰에 사건을 이첩해서 형벌을 받게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살인 부분만 분리해서 처벌받게 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별별 생각을 다 해봤죠. 그렇지만 정부인 안기부에서 거짓 기자회견을 한 것이기 때문에 방법이 없었습니다. 정권에 치명적인 타격이죠. 부장님도 마찬가지 의견이셨죠.”
“그 정도 경솔하게 기자회견을 강행한 건 당시 시대적으로 어떤 불순한 배경이 있었기 때문인 것 같은데 어떻습니까?”
고의적으로 공안정국을 만든 것 아니냐는 취지였다.
“허위 기자회견을 강행한다는 것은 제정신이 아닌 미친 짓이기 때문에 저로서는 알고도 엉터리 기자회견을 강행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만에 하나 강행된 것이라면 뭔가 다른 급한 사정이 있었을 수도 있지만 정말 모르겠습니다.”
“이후 그 거짓 기자회견을 은폐하기 위해 조직을 동원해 치밀한 대책을 세우셨죠?”
그날 오후 서울지검의 고석홍 검사는 14년 전 안전기획부 수사과장으로부터 얘기를 듣고 있었다. 그는 이미 4년 전에 퇴직한 상태여서 비교적 자유로운 입장인 셈이었다.
“당시 그 허위 기자회견이 어떻게 이루어졌을 것 같은지 경험자로서 그 과정을 한번 말씀해 보시죠.”
검사가 말했다.
“기자회견은 부장의 결심사항입니다. 소관부서인 해외공작국장이 건의하고 부장이 ‘그러면 대공수사국장과 협의를 해 보라’고 지시를 하고 그에 따라 관련자들이 협의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제 상관이던 수사국장은 업무를 꼼꼼히 챙기는 스타일이었어요. 그걸로 봐서 윤태식을 조사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현지 기자회견을 하는 것에는 반대했을 성격입니다. 현지 요원들이 기자회견 보류를 건의했는데도 그걸 깔아뭉갠 걸 보면 상식이하의 행위로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할 수 없었겠죠.
KAL기 폭파범 김현희를 제가 바레인에서 인수해 왔었습니다. 과연 김현희가 폭파를 했는지 확인을 해봐야 하기 때문에 그 조사가 끝날 때까지 기자회견을 일체 한 일이 없었습니다. 그게 대공수사국에서 일을 처리하는 방식입니다. 이 자리에서 제가 한마디 하고 싶은데 요즈음 신문을 보니까 해외공작국장이 책임을 우리 대공수사국에 떠넘기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제가 분명히 하고 싶은 것은 당시 해외공작국장은 절대로 기자회견을 해서는 안 됐던 것이고 (그런 까닭에) 막강했던 해외공작국장에게 일정 부분 책임이 있다고 봅니다.”
검사가 질문의 방향을 돌렸다.
“윤태식은 검찰청에 와서 당시 안기부에서 고문을 당하는 바람에 그런 말을 했다고 하던데 어떻습니까?”
“무조건 때리고 고문하는 건 아닙니다. 윤태식의 경우 때리지 않았습니다. 모순점을 계속 추궁하자 도저히 숨길 수 없어 자백한 겁니다. 당시 윤태식의 진술이 횡설수설했고 앞뒤가 맞지 않았죠. 또 우리는 북한 공관원이 그를 납치할 이유가 없다고 봤어요. 정말 납치를 해서 공관에 들였다면 그렇게 허술하게 탈출하도록 놔둘 리도 없죠.”
“살인을 한 사실이 밝혀졌으면 입건해서 정식 사법절차를 밟아야 했던 게 아닙니까?”
“우리 실무자들은 그렇게 건의했죠. 그런데 당시 상부에서 덮어두라는 지시가 떨어졌습니다.”
“그 배경을 상관이 얘기해 주던가요?”
“저희 조직의 정책결정은 국장이 차장, 부장에게 보고해서 결정하는 것이고 그 이하 조직에게 결정배경을 세세히 알려 주는 게 아닙니다. 다만 당시 윗선에서는 입장이 곤란하게 돼서 번복을 하지 못한 걸로 생각합니다. 국장 이상은 수사 중단 배경을 당연히 알고 있을 테니까 수사국장과 해외공작국장을 대질하시면 될 겁니다.”
결국 공안정국을 유도하기 위해서 한 것인지 윗분의 신임을 얻기 위한 개인의 무리수였는지 그것도 아니면 윤태식의 천재적인 거짓말에 국가가 속은 것인지 그 셋 중의 하나일 것 같았다.
엄상익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