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황제’에게 ‘현실’을 말하지 못했다
▲ 지난 8일 인천공항을 통해 귀국하고 있는 정몽구 회장 주변을 현대차 직원들이 둘러싸고 있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하지만 그가 출국한 지 이틀 만인 19일 현대차는 국민에게 죄송하다는 사과문과 함께 1조 원 규모의 정 회장 부자의 주식을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밝혔다. 주가가 떨어지면 그 차액을 보전할 것이라고까지 밝혔다. 계획이 없다는 정 회장 말이 이틀 만에 뒤집어진 셈이다.
왜 그랬을까. 사실 정 회장 부자의 사재 헌납 발표가 나온 것은 다소 이른 시점이었다. 과거 대기업 사주의 사재환원은 관련 재판이 끝나거나 그 전후에 하는 게 보통이었다. 검찰 소환 직전에 사재헌납을 한다는 것은 ‘검찰의 수사 혐의가 맞다’는 것을 기업이 스스로 인정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현대차는 왜 그런 결정을 한 것일까.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현대차를 이끄는 정몽구 회장은 왜 그런 결정을 한 것일까. 그 해답은 우선 정 회장 부자에게 칼날을 겨냥하고 있는 검찰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검찰은 정 회장이 출국했을 때 세 사람의 핵심 측근을 소환했다. 검찰은 정 회장이 떠나기 하루 전날인 16일 이정대 현대차 재경본부 부사장과 김승년 구매총괄본부 부사장을 불렀다. 또 18일에는 김동진 부회장을 불렀다. 검찰은 세 사람을 모두 긴급체포했다. 긴급체포란 구속기소됐을 경우 징역 3년형의 중형이 예상되는 중대 혐의를 받고 있는 피의자 신병을 48시간 동안 수사기관이 확보하는 조치를 말한다.
이 가운데 김동진 부회장은 정 회장을 30년 가까이 지근 거리에서 모셔왔으며 정 회장이 챙기는 글로벌 경영 외에 현대차 경영을 총괄하는 역할을 해온 핵심 중의 핵심이다. 김 부회장이 드러난 정 회장의 측근이라면 이정대·김승년 부사장은 정 회장의 그림자로 불리는 사람들이다. 검찰은 이 세 사람을 강도 높게 압박했다는 후문이다.
특히 구속된 채양기 기획총괄본부장보다 정 회장의 심복으로 통했던 김승년 부사장을 집중 압박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지난 90년부터 2005년까지 15년간 정몽구 회장의 비서를 지내면서 정 회장의 ‘눈빛만 봐도 의중을 아는’ 최측근으로 불려왔던 인물.
검찰이 이들을 압박한 중요한 이유는 단 하나. 현대차 경영진이 검찰 수사 상황을 너무나 몰랐기 때문인 것으로 전해진다. 다음은 검찰 관계자의 전언이다.
“현대차가 몰라도 너무 몰랐다. 우리가 어떤 자료를 가지고 있고 어떤 수사를 하고 있는지를 수사를 받은 사람이 정 회장에게 정확하게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다. 여기서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야기를 들었던 사람도 현대차로 돌아가면 상황을 알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괜히 찍힐까봐 그런 것이다. 한마디로 황제경영 때문에 비자금을 조성해 검찰 수사가 시작됐고 검찰 수사 이후에는 제대로 대처하지도 못한 셈이다.”
실제로 검찰이 정 회장의 출국 후 부른 사람 가운데 몇몇은 검찰에 출석해 모든 것이 자신의 혐의라며 진술을 거부하고 자신을 구속해 줄 것을 요구하는 ‘몽니’를 부렸던 것으로 전해졌다. 검찰 입장에서 이런 몽니는 다소 어이없게 받아들여졌다. 정작 검찰이 겨냥하고 있는 것은 이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검찰은 ‘사태 파악을 좀 해라’며 오히려 현대차 관계자를 설득한 것으로 전해진다. 한 검찰 관계자는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정 회장 부자지 당신들이 아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검찰이 압수해서 가지고 있는 글로비스와 본텍 등의 각종 관련 자료를 들이밀었다고 한다. 자신들이 모두 짊어지고 갈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안 현대차 관계자들은 그때서야 입을 열기 시작했다.
애초 검찰은 채양기 본부장처럼 이들을 구속하려 했지만 결국 이들을 석방했다. 정 회장 측에 가서 사태의 진실을 알리라는 의도였다고 한다. 검찰은 정몽구 회장 부자 가운데 최소한 한 사람은 구속돼야 사태가 해결될 것이라는 ‘엄포’를 이들에게 놓았고 그 한 사람은 바로 정몽구 회장이라는 것을 강조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때까지만 해도 현대차는 정 회장은 죄가 없으며 임원들이 비자금을 만들었다고 주장해 회장을 보호하자는 ‘강경파’가 득세해왔다. 이 강경파들이 정 회장을 수사 초기 미국으로 피신시킨 주역들이었다. 반면 합리적인 ‘온건파’들은 대국민 사과성명과 함께 비자금의 근원지 역할을 한 글로비스 주식을 환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온건파가 발 붙일 곳은 없었다. 온건파의 이야기는 한마디로 정 회장이 공들였던 후계자 구도를 포기하라는 고언이었기 때문이다.
정 회장의 스타일을 아는 임원들은 누구도 선뜻 고양이 목에 방울을 걸려고 하지 않았다. 결국 정 회장의 눈과 귀를 막은 이 강경파들에 의해 정 회장은 대국민사과의 호기를 놓친 것으로 알려진다.
검찰은 현대차가 정 회장의 지시 없이는 수백억 원의 비자금이 조성될 수 없는 구조라고 보고 정 회장의 개입을 밝혀내려고 수사에 총력을 다해왔다. 실제 검찰은 글로비스 압수수색을 통해 정 회장이 개입했다는 정황이나 단서를 포착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 회장이 중국에 나가던 17일 채동욱 대검 수사기획관이 “정 회장 부자의 혐의에 대한 법률검토를 끝냈다”라고 말한 것도 그 방증으로 볼 수 있다.
결국 검찰의 위세에 눌린 현대차 고위 관계자는 이 사실을 정 회장에게 직보했고 정 회장은 그제서야 중국에서 부랴부랴 대책회의를 한 것으로 검찰은 보고 있다. 정 회장에게 검찰의 수사 상황과 정 회장 부자가 받고 있는 의혹들에 대해서 그때서야 제대로 보고가 된 셈이었다.
정 회장은 이미 만들어놓고 시기 조절을 하던 대국민사과 성명을 19일 발표할 것을 지시했고 사태의 근원이던 글로비스 주식을 사회에 기증키로 결정을 내렸다. 글로비스는 60%를 정 회장 부자가 갖고 있기 때문에 이 주식 환원은 정 회장이 최종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정 회장의 장고 끝에 내려진 결정은 역풍을 맞았다. 글로비스는 바로 검찰이 수사하고 있는 각종 의혹의 진원지여서 헌납의 의미가 퇴색된다는 지적이다. 또 헌납을 발표한 날짜도 정의선 기아차 사장이 검찰에 소환되기 하루 전이어서 구설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공교롭게도 19일은 미국 투자회사 론스타가 한국에 1000억 원을 헌납하겠다고 발표한 다음날이다. 정작 칼자루를 쥐고 있는 검찰도 현대차의 사회공헌 발표에 대해 “주가는 매일 변한다”라며 “사법처리에는 전혀 영향이 없다”라고 냉정하게 반응했다.
검찰은 이번 현대차 비자금 사건의 상당 부분이 정 회장의 지시로 이루어졌다는 정황을 포착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검찰은 정 회장을 구속하는 것에 대해서는 상당히 부담을 느끼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현대차가 세계적인 경쟁력을 가진 글로벌 기업이기 때문에 정 회장 구속이 자칫 우리나라 경제 전반에 타격을 미칠 것을 우려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의선 사장만 구속한다면 검찰이 봐준다라는 비난에 시달릴 것이라는 생각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의 결론이 어떻게 나든 간에 현대차는 1조 원의 재산헌납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총수 부자 둘 중 한 사람은 구속되고 두 사람 모두 법정에 설지 모르는 위기에 처했다. 좀 더 여론에 신중하고 검찰 수사의 칼끝이 어디를 향했는지를 사전에 알았다면 현대차가 창사 이후 최대 위기를 좀 더 슬기롭게 피해나갈 수 있었을 것은 분명하다.
박태수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