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관방에서 펼쳐진 ‘’말없는’ 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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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법원 전경 | ||
이 기상천외한 재판은 지금으로부터 40여년 전 국내에서 벌어졌던 실제 사건. 최근 출간된 <법조 50년 야사>(법률신문사)에는 이른바 ‘성행위 실연 감정 사건’ 등 건국 이후 법조계에서 벌어진 갖가지 ‘역사적’ 사건의 뒷얘기가 담겨 있어 관심을 끈다.
정인숙사건과 시인 김지하의 ‘오적사건’, 그리고 희대의 엽색행각을 벌였던 ‘한국판 돈 주앙’ 박인수사건 등 아직도 법조계에서 오르내리고 있는 대형 사건들에 얽힌 비사도 관계자들의 생생한 증언과 함께 다루고 있다. 또한 해방 뒤 혼란스럽던 미 군정 시절의 사법제도에 얽힌 일화 등 법조계 이면사도 함께 수록돼 사료로서의 가치도 높은 편이다.
법조 야사 가운데 ‘성행위 실연 감정 사건’ 등 법정 안팎에서 벌어졌던 웃지 못할 에피소드 몇 가지를 간추려보았다.
1945년 8?15 광복 뒤 미 군정이 들어섰지만 불행히도 사법제도는 일제강점기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다음 일화도 해방을 전후해 일어났던 해프닝 중 하나.
1945년 8월15일 변호사 지망생 C씨는 해방의 기쁨도 모른 채 일제치하에서 마지막 변호사 시험을 치르고 있었다. C씨는 전날 민법과 형법을 무사히 치렀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8월15일 오전 상법까지 세 과목만 치른 상황에서 시험이 중단되어 버렸다. 응시자 전원은 합격도 불합격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가 되었다. 더구나 시험을 관장했던 일본인들이 관련문서를 모두 불태워버렸다는 얘기까지 돌았다. 그러자 응시자들은 ‘의법회’란 단체를 만들어 집단으로 전원합격을 요구하고 나섰다.
“만일 끝까지 시험을 시행했다면 응시자 전원이 합격했을지도 모른다. 이번 사태 책임을 수험생에게 전가시키는 것은 부당한 일이니 우리 모두에게 합격증서를 교부하라.”
‘단체행동’ 덕분이었는지 응시자 2백명 가운데 미 군정청의 연락이 닿은 1백6명은 변호사시험 합격증서를 교부받았다. 이들은 그해 11월 사법관시보로 채용되어 실무수습을 마친 뒤 판?검사로 임용되었다. 또한 이 가운데 일부는 47년 3월29일자 조선변호사시험령에 따른 시험 중 예비시험과 필기시험을 면제받고 구술시험만을 거쳐 변호사자격을 받았다. C씨는 ‘의법회’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했던 덕분에 첫 조치 때 사법관 시보로 법조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당시 미 군정청 법무국은 일본인 판?검사를 모두 파면하고 한국인 판?검사로 대체했는데 그 수가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약 5백명의 새로운 판?검사를 임명해야만 했는데 적임자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미 군정청은 편법을 썼다. 법원이나 검찰의 서기 중에서 법과전문학교 이상 졸업하고 서기 7년 이상 근무한 자를 이력서만 보고 직접 판?검사로 임명한 것이다.
그때 판?검사 발령을 하루에 1백~2백명씩 영문타자로 찍어 군정장관의 결재를 받으면 그날 즉시 신문에 명단이 보도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신문을 들고 와서 “내가 아무개 법원 부장판사로 임명되었다고 신문에 났는데 그게 사실이냐”고 물어보기도 했다고 한다. 지금은 법조인이 되려면 하늘의 별따기이지만 그때는 말 그대로 ‘땅 짚고 헤엄치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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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0년 자유당 당직자들이 4·19 뒤 재판받는 모습. 당시 재판정 모습을 알 수 있다. 김천길 사진집 <서울발 외신종합> | ||
때는 1955년 7월 초순. 장안은 때아닌 한국판 ‘돈 주앙 사건’으로 들끓고 있었다. 6.25전쟁이 할퀴고 간 생채기가 채 낫기도 전에 사람들은 한 바람둥이 청년의 ‘무용담’에 정신이 없었다. 플레이보이의 ‘전설’이 구전되면서 박인수가 일약 장안의 스타로 떠오르는 희한한 일도 벌어졌다.
박인수사건의 두 번째 공판이 열린 7월8일 <동아일보>는 사회면에 그날 공판의 이모저모를 스케치해 보도했다.
‘이날 증인신문에 나오게 될 7명의 젊은 여성 중에 시내 모 여자대학생 4명이 포함되어 있어 흥미를 끌고 있다. (중략) 그런데 이번 제 2회 공판이 개정되기에 앞서 담당판사에게 색다른 편지와 호소가 쇄도하여 사건공판 이면에 가지가지 에피소드의 꽃을 피우고 있는데, 하나는 ▲정조는 빼앗기지 않았으나 키스를 빼앗기고 그후 6개월이나 병상에 누워 있다는 모 여대생의 엄벌을 요망하는 익명의 편지이고, 또 하나는 ▲증언대에 나서게 되면 자살할지도 모르니 선처해 달라는 여대생 모친의 호소, 또 다른 하나는 ▲기소장에 나타나 있으나 절대로 정조를 빼앗긴 일이 없다는 증인 여대생 본인의 항의, 그리고 또 하나는 ▲전기 여대생이 “정조를 빼앗기지 않았다는 것이 정말임을 증명한다”는 친구(여대생) 18명의 연판장 등이 이채를 띄우고 있다.’
이날 공판은 약 7천여 명의 ‘호사가’들이 모여들어 무기연기되었다. 재판부는 다음날인 7월9일 ‘기습적’으로 공판을 재개했다. 검찰측으로부터 1년6개월을 구형받은 박인수는 당당하게 자신의 의견을 진술했다. 그 가운데 압권은 “교제한 수많은 여성 중(약 25명으로 추정) 처녀는 L씨밖에 없었다”고 말한 것이다. 이 진술로 인해 문교부는 모 여대에 “요즘 화제의 대상이 되어 있는 모 여자대학교 학생 풍기 확립책을 강구하라”는 경고문을 보내기도 했다고 한다.
그뒤 박인수는 판결공판에서 ‘혼인을 빙자한 간음사건’에 대하여는 한때 무죄를 선고받았지만 상고심에서 징역 1년을 확정받아 만기복역 뒤 출소했다. 그뒤 박인수는 부인과 댄스장을 차렸지만 화재로 시련을 겪고난 뒤 철저한 은둔생활로 젊은 날의 화려했던 삶을 자숙하기에 이른다.
한편 이 사건과 관련해 당시 지식인층에서는 웃지못할 논쟁도 붙었다. 당시 한 교수는 이 사건을 보도한 언론을 비판하면서 “미혼여성에게 일시적 과오가 있지만 그 명단을 전국적으로 보도하여 그들 처녀성의 상실을 공고하는 게 국민문화기관인 신문의 임무냐”고 꾸짖었다고 한다.
다음 에피소드는 성 행위를 못한다고 부인에게서 배척당한 한 남편의 잠자리 ‘능력’을 법정이 실제로 당사자들에게 실연해보게 했던 희대의 사건이다.
1960년 어느날 대구에서 한쌍의 젊은 남녀가 결혼식을 올렸다. 전통예식에 따라 혼례를 올린 김미자씨(가명.24)는 관습에 따라 결혼 3일 뒤 시댁으로 신행을 가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신부는 까닭 모를 슬픔에 젖어 말도 안하고 아예 시댁으로 가는 것을 포기한 듯이 보였다. 딸을 걱정하던 친정부모들은 안절부절못하며 신부의 ‘보이코트’에 당황해하고 있었다. 결혼식 23일째 되던 날 드디어 신부에게 자초지종을 물어보았다. 신부는 모기소리만큼 낮게 말했다.
“어무이, 서 서방(남편 서상일.가명.30)이 빙신인기라예. 남자 구실을 몬하는 것 같소.”
하마터면 나자빠질 뻔했던 김씨의 부모는 그날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그 뒤 며칠 동안 김씨 부모는 두 사람의 ‘능력’을 병원에서 확인해보았다. 결과는 둘 다 정상. 억울하게 누명을 쓴 남편 서씨는 한번 더 검사를 받아보았지만 아무 문제가 없었다. 이에 자신의 ‘능력’을 확신한 서씨는 억울한 누명을 벗기 위해 일을 벌인다. ‘성 기능에 하자가 없다’는 병원 진단서를 첨부, 대구지법에 장인과 신부를 상대로 혼인계약불이행으로 인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한 것.
그가 요구한 손해배상금은 무려 84만8천4백환. 세상에서 가장 은밀하고 비밀스러워야 할 부부간 잠자리 문제가 법원의 도마 위에 오르는 순간이었다. 그뒤 재판부는 신랑측 주장을 받아들여 청구금액보다 10만환이 적은 74만8천4백환을 신부측이 배상하라고 판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