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권에 짓눌린 판결’ 바로잡나
▲ 1961년 민족일보 사건 관련자들에 대한 혁명재판소 공판 장면. | ||
반면 반대 측 입장에 놓인 당시 수사 관계자들이나 재판부는 침묵으로 일관하면서도 내심 반발하고 있다. 인혁당 사건 당시 중정의 수사 담당 책임자였던 이용택 전 중정 6국장은 기자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같은 사법부가 똑같은 사안을 놓고 정권의 이해관계에 의해 판결을 뒤집는다는 게 말이 되는가”라며 “백번 양보를 해서 고문이 있었다 치자. 그렇더라도 우리가 당시 제시했던 그 수많은 간첩혐의를 입증할 만한 증거 자료를 왜 모두 무시하는 것이냐”고 불만을 나타냈다. 그는 ‘그런 주장을 직접 진실화해위에 나가서 할 용의가 없느냐’는 질문에는 “부르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자진해서 나갈 필요도 못 느낀다”며 ‘정치적 의도’를 강하게 주장했다.
이번 사건을 물꼬로 유사 사건에 대한 재심 청구 소송이 잇따를 것으로 전망된다. 현재 거론되는 ‘제2의 인혁당 사건’으로는 강희철 간첩 사건과 아람회 사건, 민족일보 사건 등이 있다. 이 가운데 강희철 사건과 아람회 사건은 이미 법원이 재심을 결정했다.
두 사건의 피해자들은 모두 당시 5공 정권 하에서 간첩 검거 공적에 혈안이 된 경찰이 개인이나 단체를 무리하게 간첩과 용공단체로 조작하기 위해 불법 감금과 고문을 일삼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상당부분 조사 과정을 통해 당시 경찰의 불법 사례와 피해자들의 억울한 사연이 인정되고 있어 무죄를 선고받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법조계의 판단이다.
하지만 위 두 사건의 경우 정권 차원의 조작이라기보다는 경찰 내부의 조작이었다는 점에서 그 사회적 파장은 크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 면에서 인혁당 사건과 같이 커다란 사회적 파장을 몰고올 ‘후속 사건’으로는 민족일보 사건이 꼽히고 있다.
민족일보의 조용수 사장은 5·16 쿠데타 발생 사흘 뒤인 61년 5월 19일 신문을 강제 폐간당하고 조총련계 자금으로 신문을 발행했다는 죄목으로 전격 구속됐다. 당시 군사혁명재판부가 8월 28일 조 씨에 대해 사형을 선고하자 미국 영국 등 해외 언론들은 “증거도 없이 언론인을 반국가행위로 사형시키는 것은 명백한 언론 탄압”이라며 구명 운동을 펼쳤다. 그러나 끝내 조 씨는 그해 12월 22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당시 쿠데타로 새롭게 집권한 군부가 조 사장을 ‘언론 길들이기’의 희생양으로 삼았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진실화해위는 지난해 11월 ‘조 사장에 대한 혁명재판소의 사형 선고는 잘못된 판결’이라는 결정을 내렸고, 이에 조 씨의 동생 조용준 씨는 “재심 청구 준비를 다 마쳤다”고 밝혔다.
역시 얼마 전 진실화해위로부터 조작 사건으로 판정받은 이중간첩 이수근 사건의 생존자인 이 씨의 처조카 배경옥 씨 역시 “재심 청구 소송을 준비 중이다”고 밝혔다.
67년 당시 김형욱 중정부장이 발표한 동백림 간첩 사건 역시 당시 관계자들이 재심 청구를 준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 사건은 당시 이응로 윤이상 등 유학생들이 동베를린을 거점으로 간첩활동을 벌였다며 대거 사형 또는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사건이다. 이 사건은 김 전 부장이 훗날 자신의 회고록을 통해 조작된 것임을 인정하기도 했다. 만약 이런 일련의 재심 청구 소송에서 기존의 사형 선고를 뒤엎는 판결이 나온다면 다시 한 번 박정희 정권과 그 사법부에 대한 도덕성 시비가 불거질 것으로 보인다.
감명국 기자 km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