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통’이 던진 부메랑 박근혜 때린다
▲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 | ||
‘과거사 진상 규명’이 올해 대선 정국의 주요 변수로 떠오를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가 지난해 12월 설립 1주년을 맞은 이후 과거 의혹 사건들에 대한 조사 강도와 속도를 더욱 높이고 있기 때문. 특히 진실화해위가 조사 대상으로 삼는 여러 사건들 가운데 유독 국민들의 관심 대상인 주요 사건들이 박정희 정권과 전두환 정권 때 자행된 것이 대부분이어서 박 전 대표와 한나라당은 이래저래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못하고 있다. 한나라당 또한 모체가 민정당이라는 주장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 일각에서는 “과거사 규명을 빌미로 대선 판도를 뒤흔들려는 노무현 정권의 음모가 감춰진 게 아니냐”는 의혹마저 제기되는 실정이다.
송기인 진실화해위원장은 지난 1월 23일 기자간담회에서 “현재 1만 800여 건의 신청이 접수된 상태이며 올해 안에 1000여 건 정도를 진실 규명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관계기관(국정원)이 자체적으로 조사하는 사건 역시 직접 발표하는 데 어려움이 있을 수도 있으니만큼, 미진한 부분을 진실화해위가 남김없이 밝히겠다”며 “상반기 중 눈에 띄는 성과가 있을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진실화해위는 지난해 11월부터 ‘민족일보 조용수 사건’ ‘태영호 납북 사건’ ‘이중간첩 이수근 사건’ 등을 당시 정권에 의해 조작된 것이라고 하나씩 발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일련의 과거사 진상 조사 퍼레이드는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현재 진실화해위가 조사 중인 사건들은 2000여 건에 이르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그중 80%가 넘는 대부분의 사례들은 이승만 정권 당시 좌우익 이념 대립과 한국전쟁 때 발생했던 보도연맹사건, 제주 4·3 사건 등과 같은 집단 학살이나 희생 사건이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정작 국민들의 뜨거운 관심 대상은 김대중 납치 사건, 김형욱 실종 사건, 12·12쿠데타와 5·18민주화운동, KAL 858기 폭발 사건 등 정치 권력과 관계되는 대형 사건들이다. 이 사건들은 국정원과 국방부가 자체적으로 가동 중인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이미 한 차례 조사를 마쳤거나 조사 중인 사건들이다. 하지만 이 사건 관련자들은 대부분 국정원 등의 조사가 미흡하다며 진실화해위에 재조사를 요구하고 나선 상태다.
특히 ‘국정원 진실위’에서 7대 우선 조사 대상으로 삼았던 사건들 가운데 현재 인혁당 사건과 동백림 사건을 제외하고는 그 조사결과 발표에도 불구하고 상당부분 의혹이 해소되지 못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김형욱 실종 사건과 김대중 납치 사건, 부일장학회 헌납 사건, KAL 858기 폭발사건 등은 정치적 파장이 큰 데다 진실화해위에서 재조사의 강한 의지를 보이고 있어 귀추가 주목된다.
정치권에서는 이 가운데 부일장학회 헌납 사건이 그 조사 결과에 따라 유력 대권주자인 박 전 대표에게 엄청난 직격탄이 될 수도 있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국정원 진실위는 지난 2005년 7월 22일 “부일장학회(정수장학회의 전신) 헌납사건은 당시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의 언론장악 의도에 의해 발생했고 박 의장의 지시로 중정이 주도적으로 개입한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에 여당은 “불법 장물인 정수장학회를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며 정수장학회의 실질적 소유주였던 박 전 대표에게 공세를 강화했고, 박 전 대표와 한나라당은 “야당 죽이기 음모”라고 강력 반발한 바 있다.
이런 가운데 진실화해위는 지난해 12월 5일 “국정원 진실위의 조사 결과가 미흡하다”며 “박 전 대통령의 지시와 개입 여부가 밝혀져야 한다”며 이 사건에 대한 재조사 방침을 밝혔다.
부일장학회는 1958년 부산의 유력한 기업인이자 부산일보 사장이었던 고 김지태 씨가 사재를 털어 만든 것이었다. 김 씨는 5·16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에 의해 62년 4월 부정축재 혐의로 구속됐고, 7년형을 선고받았으나 일부 재산을 국가에 헌납하는 조건으로 석방됐다. 이 과정에서 박 정권의 압력에 의해 부산일보 등의 경영권과 부일장학회의 기본재산에 대한 ‘포기각서’를 썼다는 주장이 김 씨 유족에 의해 제기됐고, 국정원 진실위는 이를 상당부분 인정했다.
▲ 진실화해위에서 재조사할 예정인 ‘부일장학회 헌납 사건’ ‘김형욱 실종 사건’ ‘김대중 납치 사건’(사진 위부터). | ||
박 전 대표 측에서는 이미 2년 전 국정원 진실위에서 조사 결과까지 마친 사건을 이번에 다시 진실화해위가 꺼내들고 나선 것에 대해 ‘불순한 음모’가 있다고 보고 있다. 선친인 박 전 대통령이 주도했던 다른 대부분의 사건들과는 달리 정수장학회 건은 박 전 대표도 직접적으로 관련이 되어 있기에 박 전 대표 측은 이 사건에 대해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이에 대해 진실화해위의 한 관계자는 전화인터뷰에서 “정수장학회 건은 고 김지태 씨 유족 측이 지난해 6월경 ‘국정원 진실위의 진상 규명이 미흡하다’며 우리 측에 재조사를 요구하는 신청이 접수됐기 때문에 재조사 대상으로 삼은 것뿐”이라며 항간에 나도는 정치적 의도설을 일축했다.
김형욱 실종 사건과 김대중 납치 사건 또한 상당히 민감한 사안으로 남아 있다. 국정원 진실위는 2005년 5월 중간조사 결과 발표를 통해 “김형욱 실종 사건은 김재규 당시 중정부장의 지시에 따라 이상열 프랑스 주재 공사와 중정 요원들이 개입한 조직적인 살해사건이었다”고 밝혔다. 김대중 납치 사건은 아직까지도 유일하게 중간조사 결과를 발표하지 않고 있다. 이 사건 역시 표면적으로는 이후락 전 중정부장이 직접 지휘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하지만 “박정희 정권 당시의 분위기로 볼 때 그처럼 중대한 일을 박 대통령의 재가도 없이 중정부장이 독단적으로 처리했다고 보기 어렵다”는 의혹 제기가 끊이질 않고 있다. 진실화해위 역시 이 부분에 주목하는 듯하다. 만약 재조사를 통해 박 전 대통령의 직접적 개입이나 지시가 드러난다면 박 전 대표에게는 큰 타격이 미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이외에도 74년 ‘동아자유언론투쟁위원회 사건’, 79년 ‘YH노조 신민당사 농성 사건’ 등 박정희 정권 당시에 벌어진 많은 사건들이 과거사 진상규명 대상으로 현재 올라 있다.
진실화해위의 과거사 진상규명 활동을 바라보는 불편한 심기는 비단 박 전 대표 캠프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한나라당도 내심 큰 불만이다. 다만 덮어놓고 반대를 할 경우 자칫 과거 군사정권의 대변자로 오해받을 소지가 있어 벙어리 냉가슴 앓듯 할 수밖에 없는 형편인 것. 특히 과거 5~6공 정권에서 빚어진 사건들도 상당수가 조사 대상으로 올라 있어 한나라당도 자유로울 수만은 없는 형편이다. 한나라당의 모태가 5~6공의 집권 여당인 민정당과 민자당인 까닭이다.
현재 진실화해위에서 거론되는 5~6공의 사건으로는 강제징집 및 녹화사업, 삼청교육대 사건, 12·12쿠데타 사건, 5·18 민주화운동 진압 및 5·17비상계엄확대 과정, KAL 858기 폭발 사건, 언론인 해직 및 언론통폐합 사건, 강경대 군 유서대필 사건, 남한 조선노동당 사건 등이 있다.
이 가운데서도 특히 가장 큰 폭발력을 지닌 것은 역시 KAL 858기 폭발 사건이다. 국정원 진실위는 지난해 8월 “1987년 당시 정부는 KAL 858기 폭발 사건을 대선에 이용하기 위해 폭파범 김현희를 선거 전에 압송하려는 외교적 노력을 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사건 자체가 당시 안기부에 의해 조작된 것이라는 의혹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파악됐다고 덧붙였다.
당시 발표에 대해 실종자 가족들과 일부 시민단체 관계자들은 “핵심당사자인 김현희의 조사도 이뤄지지 않았고, 미얀마 인근 해상에서 KAL 858기 잔해가 발견됐다고 했지만 실제 바위와 산호로 판명났다”며 “국정원의 조사결과를 수용하기 어렵다”고 반발했다. 이 관계자들 역시 진실화해위에 재조사를 신청했다.
이에 대해서는 송기인 위원장 역시 국정원 진실위 발표에 의혹을 나타냈던 바 있다. 그는 지난해 한 라디오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김형욱 사건이나 KAL기 사건 등은 (국정원 진실위에서) 조사되고 있지만 자체 조사이기 때문에 조심성이 많을 것”이라며 “(국정원 진실위보다) 더 심도 있는 조사를 진행할 것”이라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당초 “진실화해위와 중복되는 국정원 진실위를 해체하라”며 화살을 국정원 진실위에 집중했던 한나라당 주변에서도 최근 “진실화해위가 과거사 진상규명을 내세워 대선 판도를 뒤흔들려는 음모가 있는 것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는 형편이다.
이에 대해 진실화해위의 한 관계자는 전화인터뷰에서 “우리 위원회는 여야 합의를 통한 법률에 의해 조사 권한을 갖는 법적 기구”라며 “가급적 중복된 사건은 피하고자 하지만, 각 기관에서 자체 조사한 내용이 미진하다며 본 위원회에 재조사 신청을 요구하는 것에 대해 우리로서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으며 그것이 또한 본 위원회의 존재 의미”라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본 위원회의 조사에 그 어떠한 정치적 고려도 개입할 수가 없다”며 “조사 대상 순서 역시 신청 순서를 따르는 게 큰 원칙이지 따로 선거를 고려해 조사 대상 순서를 임의로 바꾸거나 조정하지는 않는다”라고 밝혔다.
감명국 기자 km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