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중 공모자 있나”, “난처한 질문입니다”
살해당한 피해자의 가족이 법정에 나와 있을 때의 태도들을 여러 번 경험했다. 몇 년 전 여대생 청부살인사건을 맡았던 적이 있었다. 그때도 역시 피해자의 가족인 아버지가 증인으로 나왔었다. 사랑하는 딸을 죽인 범인을 앞에 두고 아버지는 절규했다. 판사에게 살인자들을 죽여 달라고 울부짖었다. 법에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직접 복수하겠다고 다짐했었다. 그게 살해당한 사람들 가족의 공통된 심정이었다.
나는 랭가와 장영두 그리고 증인으로 나온 아들 사이에 오가는 눈빛을 예민하게 주시하고 있었다. 방글라데시인 살인자 랭가는 강한 눈빛으로 증인으로 나온 아들을 쏘아보고 있었다. 그는 아들 중 한 명이 간접적으로 자기를 이용해서 아버지를 살해하게 한 것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아들에게 죄책감이 있을 리가 없었다. 자기는 감옥에 들어가게 하고 돈도 안 주고 밖에서 자유를 누리는 아들에 대해 강한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그가 고개를 빳빳이 들고 아들을 직시하는 건 이해할 만했다.
그렇다면 증언석에 앉은 살해당한 하 영감의 아들은 어떤 태도가 정상적일까. 아버지를 죽인 범인의 당당한 눈길에 치를 떨어야 마땅했다. 그러나 증인으로 나온 아들은 자신에게 강하게 오는 시선을 피하는 것 같았다. 분노하기보다는 몹시 조심하면서 주위를 살폈다. 그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렸다. 나는 법정드라마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어떤 암시도 없었다. 또 페리 메이슨 같은 민완변호사도 포청천 같은 판관도 없었다. 회색의 짙은 안개 속에서 장애물이 곳곳에 놓인 미로를 걸어갈 뿐이었다.
“며칠 전 변호사인 제가 돌아가신 아버님이 사시던 집을 가 봤습니다. 개가 아직도 그 집에 살면서 새끼까지 낳았던데 도대체 누가 개밥을 주죠?”
내가 다소 엉뚱한 질문을 했다. 지난 25년 동안 자식들 누구도 거의 찾아가지 않은 아버지 집이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살해되고 빈집에 남은 개를 키운다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 마을주민 김일식은 증인으로 나온 그가 키운다고 했다.
“아마 어머니가 관리하는 것 같습니다. 집도 내년에 다시 보수공사를 할 예정입니다.”
20년 동안 남같이 지내던 죽은 하 영감의 부인이었다. 개밥을 주기 위해 자주 내려간다는 말이 이상했다. 재산에 대한 강한 집착이 엿보이기도 했다.
“제가 가서 마을주민에게 듣기로는 어머니가 아니고 아들인 증인이 나타나 개밥을 준다고 하던데 어떻습니까?”
내가 물었다. 순간 그에게 당황한 빛이 스쳤다.
“저는 그 마을에 찾아간 적이 없습니다.”
그가 정색을 하면서 잡아뗐다.
“주민 김일식한테 들었는데 둘째아들인 증인이 이제야 나타나 마을사람들을 만나고 다닌다는데 어떻습니까?”
“저는 마을주민 아무도 만나본 적이 없습니다.”
그가 다시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부인했다.
“얼마 전 마을주민 김일식 씨를 본 변호인이 만났습니다. 그 분이 둘째아들인 증인이 요즈음에야 마을 분들을 찾는다던데요?”
“그 분은 만났습니다. 이번 추석 때 간 사실이 있습니다.”
근거를 눈앞에 들이밀어야 마지못해 인정했다.
“주민 김일식의 말에 따르면 집의 개도 둘째아들인 증인이 찾아와 기른다고 하던데 어떻습니까?”
“….”
그는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했다. 랭가가 계속 무서운 눈길로 그를 쏘아보고 있었다. 나는 그런 랭가를 손으로 가리키면서 죽은 영감의 아들에게 물었다.
“증인의 아버지를 살해한 저 방글라데시인 랭가는 두 아들 중 한 사람이 살인을 시켰다고 하는데 어떻습니까?”
그의 얼굴이 백지장같이 하얗게 변했다. 그가 한참 만에 안정을 찾은 후 이렇게 대답했다.
“뒤에 있을 진짜 범인은 현재의 이 상황까지 고려해서 치밀한 계산을 하고 있겠죠. 저 장영두가 징역을 살고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게 아닙니까? 제가 알기로는 장영두가 십몇 년 징역을 받은 걸로 알고 있는데….”
그가 묘한 대답을 했다. 아들의 살인청부는 맞는데 자기는 아니라는 얘기였다. 증인으로 나와 형을 직접 지목한 셈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었다.
“랭가의 진술에 따르면 살인을 청부한 아들의 특징은 현재 빚이 많고 장영두보다 나이가 위지만 친구같이 지낸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 점을 공개적으로 확인하겠습니다. 증인은 빚이 있습니까?”
“저는 빚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가 자신 있게 대답했다.
“증인은 장영두와 잘 알고 있나요?”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형은 빚이 있습니까?”
“부도가 나서 빚이 많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형은 저기 피고인 장영두와 친한 사이입니까?”
“그건 잘 모릅니다.”
그는 머리가 좋은 사람 같았다. 직접적이 아니면서도 답을 다 가르쳐 주고 있었다.
“형은 아버지의 죽음으로 이익을 본 게 아무것도 없던데 어떻습니까?”
“아닙니다. 아버지는 형님 쪽 차명계좌로 7000만 원을 맡겨놨습니다. 제가 상속비용으로 쓰게 달라고 했는데도 내놓지를 않았어요. 그래서 그 통장을 현재 제가 가압류해놓고 있는 상태입니다.”
7000만 원이 살인의 동기가 되기에는 부족한 느낌이었다.
“살인청부의 범인을 잡아달라는 탄원서 작성을 변호사에게 의뢰하셨는데 돈을 누가 얼마나 주셨죠?”
내가 물었다. 그건 치밀한 성격의 준비였다. 변호사를 이용해 살인사건의 성격을 변형시키는 작업이었다.
“아버지의 다른 소송을 담당하던 변호사인데 돈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 분이 그냥 해준 겁니다.”
그는 한마디 한마디 내뱉을 때마다 재빠르게 계산하는 표정이었다. 그 정도 의혹만 제기시켜도 충분할 것 같았다. 나머지 세세한 조사와 확인은 검사의 몫이라는 생각이었다.
“마치겠습니다.”
나는 그렇게 말하고 자리에 앉았다. 옆에 있던 국선변호인이 일어났다. 그가 랭가를 보면서 다시 확인했다.
“랭가, 이 사람 본 적이 있어요?”
튀어나온 눈을 번득이며 랭가가 증인으로 나온 둘째아들을 유심히 보다가 고개를 옆으로 절레절레 흔들었다. 랭가는 첫째아들도 본 적이 없다고 말했었다.
“검사, 신문하시죠.”
재판장이 검사에게 신문의 기회를 주었다. 볼살이 두툼한 검사가 묘한 미소를 지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증언대에 앉아 있는 둘째아들 쪽으로 다가왔다.
“증인, 조금 전 변호인은 마치 증인이 살인범인 것같이 의심을 하면서 양심선언이라도 권유하는 것처럼 말씀하시던데 어떻습니까? 증인은 범인이 아니죠?”
검사는 노골적으로 그를 유도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와 나 사이를 이간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저는 아닙니다.”
그가 검사의 질문에 구세주라도 만난 듯 화답했다. 검사가 계속했다.
“큰아들이 재산상속을 포기하지 않았다면 얘기는 달라졌겠죠?”
묘한 여운이 담긴 질문이었다.
“그렇습니다.”
“마치겠습니다.”
검사의 질문이 끝났다. 검사는 큰아들을 범인으로 확신하는 것 같았다.
하얀 얼굴의 선비 같은 재판장이 조용한 어조로 묻기 시작했다. 맑고 투명한 인상을 주는 법관이었다.
“아버님의 재산가치가 돈으로 치면 전부 얼맙니까?”
형사가 근처 부동산사무실에서 알아본 바로는 130억 정도 됐다. 그러나 증인으로 나온 아들의 대답은 달랐다.
“20년 전에 평가한 건 있는데 요즈음은 얼마인지 모릅니다.”
아버지의 재산에 관심이 없는 태도를 취했다.
“형이 재산을 포기한 건 빚이 많아서 그런 겁니까?”
재판장이 물었다.
“형은 포기했지만 이미 땅은 조카 명의로 되어 있습니다. 전체 땅의 7분의 1 정도 됩니다.”
재판장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미 명의이전이 되었는데 아버지에 대한 살인을 청부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증인의 가족 중에서 누군가 저 장영두와 공모해서 아버지를 살해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십니까?”
재판장이 핵심을 물었다.
“난처한 질문입니다.”
그는 묘하게 빠져나가고 있었다. 재판장이 그를 내려다보면서 골똘히 뭔가 생각하다가 다시 물었다.
“그러면 바꿔서 이렇게 물어봅시다. 그럴 가능성이 단 1퍼센트도 없다고 생각합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가 긍정했다.
“알겠습니다, 돌아가시죠.”
재판장의 신문이 끝났다.
“더 신청할 증거가 있습니까?”
재판장이 내게 물었다.
“나머지 아들인 형도 소환해서 물어봤으면 합니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둘의 말을 공개적으로 들어야 공평했다.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형도 증인으로 채택해 소환하도록 하겠습니다.”
재판장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메모지에 기록했다. 내가 덧붙였다.
“그리고 장영두의 형 장영목을 증인으로 신청합니다.”
“장영두의 형을 부르는 입증취지는 뭡니까?”
재판장이 의아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그가 유치장에 면회를 가서 동생 장영두를 만났을 때 한 대화 중에 ‘덮어’라는 한마디가 녹취되어 청부살인의 의심이 생겼습니다. 그걸 밝히기 위해섭니다.”
“알겠습니다. 그렇지만 장영목에 대한 신문은 ‘덮어’라는 부분에 한정해 주십시오.”
다음은 큰아들과의 한판 싸움이었다. 혐의가 벗겨만 진다면 그는 오히려 내게 감사해야 할지도 몰랐다.
(계속)
엄상익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