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의 처음과 끝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그러나 장영두와 랭가에 의해 하 영감은 죽었다. 죽음의 사신이 왜 하 영감을 갑자기 찾아갔을까. 하 영감은 장영두가 그의 과수원을 일부 빌려 농사지을 때 장영두를 머슴같이 부려먹었다고 했다. 뭔가 줄듯 줄듯 하면서 기사로도 써먹고 시장에 반찬거리 심부름을 시키기도 했다. 장영두는 영감의 젊은 시절 넋두리를 끝도 없이 들어주어야 했다고 말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임료를 두 배나 올려내라고 통보했다. 그리고 장영두는 그냥 쫓겨났다. 장영두의 느릿한 어조 속에는 은은히 피어오르는 죽은 하 영감에 대한 증오가 분명히 있었다. 의외로 마음속으로 영감을 미워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았다.
장영두 다음으로 배 밭을 빌려 농사지은 게 김일식이었다. 김일식은 하 영감의 시체를 발견한 최초의 목격자이기도 했다. 김일식이 파출소에서 한 진술이 조서 귀퉁이에 이렇게 적혀 있었다.
‘영감님이 나중에 먹고살게 해 주겠다고 했습니다. 과수원에 길이 나면 땅 1000평을 저에게 줘서 휴게실과 주유소를 운영하도록 해주겠다고 하셨습니다. 영감님이 저에게 돈을 3000만 원 빌려줬는데 나중에 하시는 말씀이 그냥 줘도 되는데 네가 악착같이 살지 못하니까 원칙대로 하자고 하셨어요. 나를 제대로 가르치기 위해 그 돈을 받는다는 거죠. 영감님의 변호사에게는 운전해 모셔간 저를 수양아들이라고 했습니다.’
장영두 역시 영감한테 그런 말을 들었었다고 했다. 장영두가 자기 일을 제쳐두고 하루 종일 운전을 하면서 영감을 모시고 다녀도 수고했다는 말 한마디 한 적이 없다고 했다. 어쩌다 저녁에 5000원짜리 밥 한 그릇 사면 크게 생색을 내곤 했다고 했다. 나중에 크게 뒤를 봐줄 것같이 말잔치를 하다가 어느 날 내쫓아 버린 것이다. 영감에게 이용당한 소작인들은 모두 증오의 감정이 일어날 것 같았다. 나는 변론을 계속하고 있었다.
“피고인 장영두는 죽은 하 영감에 대한 좋지 않은 잠재적인 감정을 수시로 랭가에게 털어놓았습니다. ‘개새끼 죽여 버리고 싶다’고도 여러 번 했습니다. 랭가로부터 대낮에도 살인이 벌어지는 방글라데시의 얘기를 듣고는 바로 ‘돈을 주면 사람도 죽여줄 수 있겠네?’라고 물은 적도 있습니다. 랭가의 뇌리에는 또 다른 관점에서 그게 화석같이 들어박혔다는 생각입니다. 장영두는 농담으로 몇 번 반복했을지 모르지만 외국인 랭가는 진담으로 받아들였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그게 현실화된 것입니다.”
어쩌면 장영두는 그걸 믿고 있는 랭가에게 거짓말을 해서 더 확신을 가지게 했을지도 몰랐다. 랭가가 분노하는 것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계속했다.
“검찰은 장영두가 의도적으로 입에 자물쇠를 채운 것처럼 취급하고 있습니다. 무기징역을 선고하면 마침내 굳게 닫힌 입이 열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법을 모르는 장영두는 여태까지 검사나 형사의 진술에 적당히 화답을 해 왔습니다. 수사와 일심의 재판을 겪으면서 적당히 화답해 주는 게 점점 더 그를 늪으로 빠져들게 하는 걸 이제는 깨달은 것 같습니다. 검사의 회유로 장영두는 자칫하면 아들 중 한 명이 시켰다고 적당히 말을 할 수도 있습니다. 무기징역의 위험까지 앞에 두고 또 랭가의 불리한 증언이 있는데도 장영두는 배후를 대지 않고 있습니다. 본 변호인은 그건 배후가 없기 때문이라고 판단합니다. 장영두는 더 이상 수사기관에 맞추어 생사람 잡는 일을 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장영두가 죽은 영감의 아들 중 한 사람의 이름만 대면 그는 살인교사범이 되어 빠져나오기 힘든 상황이었다. 인간이 거짓증언으로 죽음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건 의외로 간단하기도 했다. 나는 변론의 끝으로 가고 있었다.
“결론적으로 랭가의 인식은 경찰이나 검찰의 의심과 일치됐습니다. 랭가는 겁을 먹은 외국인입니다. 자기가 영감을 때려 죽였다고 하면 당장 목에 밧줄이 걸릴 것으로 여겨 극한의 공포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그런 그는 수사관의 자연스런 유도에 사실대로 말하고 용서받자고 생각했을 게 틀림없습니다. 랭가의 진술은 체포 후 첫 번째 피의자신문조서부터 단 한 점의 오차도 없이 일관되어 있습니다. 담당 형사나 검사가 가지고 있던 청부살인의 혐의가 그에 부응하려고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외국인 랭가의 진술과 정확히 맞아떨어진 것입니다. 그런데도 검사는 아들을 잡아넣지 못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소환해서 조서조차 작성하지 않았습니다. 그건 왜일까요?”
나는 이제 결론을 지었다.
“의심스럽다는 것만으로 한 사람이 억울하게 청부살인범이나 강도 살인범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되려면 검사의 입증은 판사가 확신을 가지게 할 정도로 고도의 증명이어야 합니다. 검사가 청부살인이라고 주장하고 랭가의 일관된 증언이 있는데도 살인교사범으로 아들을 이 법정에 세우지 못한 것은 랭가의 진술을 전적으로 믿을 수 없다는 걸 속으로 알기 때문입니다. 검사가 단 한 번의 아들에 대한 조서도 받지 않은 것이 그런 정황을 웅변하는 것입니다. 피고인 장영두는 자기가 한 행위에 대해서만 처벌을 받아야 합니다. 과도하게 부풀려진 중형을 선고받아서는 안 된다는 의견입니다.”
나는 그렇게 변론을 끝냈다. 그냥 사정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행동에 대해 적합한 책임만 지면 되는 것이다.
“피고인 장영두 그리고 랭가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으면 해보세요.”
재판장이 최후진술을 명령했다. 먼저 장영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저하는 표정이었다. 그가 힘들게 말을 시작했다.
장영두는 어느새 내가 변론에서 한 말을 앵무새처럼 그대로 따라하고 있었다. 나는 그의 형 장영목에게 미리 변론서를 한 부 복사해 준 적이 있었다. 교도소 안에서 그 변론문을 받아본 장영두는 이번에는 그걸 읽듯이 중얼중얼 말하고 있었다. 장영두는 또 자신보다 나의 변론문에 세뇌되어 버린 것 같았다. 검사가 어떤 시나리오를 작성해서 백 번만 반복해서 쓰게 하면 그렇게 세뇌될 수 있는 성격이었다. 재판장은 그래도 참을성 있게 들어주고 있었다. 중언부언하는 그의 최후진술이 끝났다.
“피고인 랭가,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으면 해봐요.”
재판장이 랭가에게 최후진술의 기회를 주었다. 랭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때 묻고 구겨진 재소자복을 입은 그의 검은 팔목 위에서 수갑이 빛을 퉁겨내고 있었다. 그가 방글라데시어로 빠르게 한마디 외쳤다. 울먹이는 목소리였다.
“지금 뭐라고 하는 거죠?”
재판장이 통역에게 물었다.
“먼저 할아버지 가족에게 정말 미안하답니다.”
통역이 대답했다. 이어서 통역과 랭가가 빠른 속도로 말을 주고받는 모습이었다. 통역이 중간에 말을 끊고 재판장에게 이렇게 통역했다.
“엄마 아빠는 내가 이렇게 되어 있는지 모르고 나는 벌 받고 있고….”
랭가의 눈이 붉어지더니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가 설움이 복받치는지 말을 다 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고 흐느꼈다.
방청석의 맨 뒷줄에서 장영목이 울고 있었다. 그 앞쪽에는 백발의 할머니가 앉아 있었다. 죽은 하 영감의 부인 같았다. 그 할머니는 장영두와 랭가의 마지막 진술을 미동도 없이 듣고 있었다. 죽은 영감의 아들이나 딸은 옆에 아무도 없었다. 전해 듣기로 그 노파는 영감에게서 쌀 도둑질 했다고 쫓겨난 부인이었다. 영감은 위자료가 아까워 이혼도 하지 않고 있다고 장영두에게 말했다고 했다. 그런데도 처참하게 죽은 남편을 위해 최후까지 살인자들을 지켜보는 건 처밖에 없었다.
“그러면 사흘 후에 선고를 하겠습니다.”
재판장이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서 나갔다. 배석판사들이 그 뒤를 따랐다. 법원사무관이나 주임들도 후련한 듯 사무정리를 하고 있었다.
이 재판의 처음과 끝이 많이 다른 느낌을 받았다. 처음 재판을 시작할 때 재판장은 모두진술조차 하지 못하게 했었다. 재판장은 변호사인 내가 쓴 항소이유서를 질타하면서 장영두가 쓰는 게 차라리 날 뻔했다고 인격모독을 하기도 했다. 변호사로서 최고의 모독을 받으면서 시작한 재판이었다. 자존심이란 참 약했다. 조금만 건드려도 상처가 나고 피가 뚝뚝 흘렀다. 나름대로 열심히 변호를 했다. 현장을 일일이 찾아가고 기록을 외울 정도로 반복해서 자세히 봤었다. 재판이 끝날 무렵 법원의 눈빛은 이제 더 이상 얼어붙을 듯 차지 않았다. 말은 직접 안하지만 이해해주는 따뜻한 눈길이 전해져 왔다. 진심으로 내 길을 가다보면 상대방의 인식이 바뀔 수 있었다.
나에게 모욕을 가했던 처음 재판장의 입장이 되어 봤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총명하고 급한 판사는 둔한 사람의 행동을 인내하기 쉽지 않았다. 변호사를 죄인의 대리인이라고 생각하는데 안 미울 수가 없었다. 법정에서 나와 복도 중앙에 있는 엘리베이터를 탈 때였다. 랭가의 국선변호사가 나를 따라오면서 이렇게 말했다.
“변호하시는 거 옆에서 감명 깊게 봤습니다. 지난번 재판장은 법조인 사이에서 말이 많은 걸 들었습니다. 항상 그 양반은 미리 결론을 내시고 법정에 들어오는 것 같다고요.”
그 역시 처음에 내게 마땅치 않은 표정을 지었었다. 이제 조금은 그 인상이 바뀐 것 같았다. 내가 이번 재판에서 느낀 소중한 점 하나를 법조후배가 되는 듯한 그에게 말해줬다.
“법대 위에서 피고인을 형식적으로 잠시 대하고 수사기록에만 집착하는 판사들 중에는 선입견을 가지는 사람도 종종 있습니다. 그런 선입견과 자기는 다 안다는 권위의식을 가진 판사와 싸우는 것도 우리 변호사의 임무가 아니겠습니까?”
나 역시 처음 피부로 느낀 사명감이었다.
(계속)
엄상익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