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금줄에 ‘빨대 꽂기’…비리의 ‘종합세트’
▲ 탄현 주상복합 아파트 조감도. | ||
탄현 주상복합아파트 건설 사업은 국내 최대 규모라는 점에서 사업 계획 발표 당시부터 주거 비율 제한, 부지에 대한 각종 인·허가 등 필히 해결해야 할 복잡한 숙제들을 안고 있었다. 사업 시행과 추진 과정에서 소요될 어마어마한 자금을 과연 누가, 어떠한 방식으로 조달할 것인지도 철저하게 검증돼야 할 부분이었다. 일부 전문가 집단에서는 자금의 원활한 조달 가능성에 회의적인 시각을 드러내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난관들은 외부의 우려가 무색하다시피 일사천리로 해결됐다. 사업 자체가 담보였다고는 하나 기본적으로 거액의 투자나 대출에 인색한 군인공제회나 금융기관들까지도 조금은 무리하다고 판단될 정도로 수천억 원씩의 막대한 자금을 지원했다. 누가 봐도 비정상적인 방법이 사업 과정에 개입됐다고 판단할 수 있는 정황이었다. 이 같은 우려는 현실로 드러났다. 실제 마치 비리의 ‘종합선물세트’와도 같은 다양한 비리가 검찰 수사에서 드러났다.
원래 탄현지구 주상 복합 건물 사업의 주체는 H 사였다. 그러나 지난 2005년 자금 부족 문제로 사업에 어려움을 겪게 되자 H 사의 이 아무개 회장은 건설업계 쪽에서 브로커로 통하는 몇몇 인물들과 공모, 상장 법인을 인수하고 그 회사의 약속 어음을 발행하는 수법을 동원해 사업 자금을 조달하는 쪽으로 계획을 짰다.
이들이 인수한 법인은 휴대폰 생산업체인 K텔레콤. 2005년 3월 이 회장 등은 K텔레콤의 당시 대표이사에게 접근해 개인 채무 26억 원을 변제하고, 여기에 13억 5000만 원을 더 지급한다는 매혹적인 조건으로 K텔레콤의 경영권 및 대표이사의 주식 전체를 넘겨받았다. 상장 법인들 가운데 일부 회사의 대표 개인이 회사 설립이나 운영 과정에서 과도하게 빚을 져 사업상 어려움을 겪고 있는 약점을 교묘하게 이용한 것이다.
사실상 회사 주인이 된 이 회장 일행은 K텔레콤으로부터 약속어음 22장(백지어음 16장, 금액 기재 어음 6장 액면금 115억 원)을 넘겨받고, 이를 별 거리낌 없이 탄현 부지 매입 대금과 H 사의 채무 변제 대금으로 사용했다. 이들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이후에도 계속 K텔레콤 어음을 추가로 할인받아 사용했다.
그러나 사채 시장 내에서 이러한 소문이 불거지기 시작했다. 자연히 K텔레콤의 어음이 점차 할인되지 않는 사태가 발생하자, 이 회장 일행은 수법을 바꿔 건축업계에서 인지도가 높은 K종합건축사사무소를 이용하는 전략으로 급선회했다.
업계 내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는 K종합건축사사무소의 계열사를 만들어 이 회사를 사업 시행사로 삼아 명목상 사업권을 이전시킨 뒤 자금을 지원받고, K종합건축사사무소의 인지도를 이용해 대출을 받아 활용하는 활로를 모색했던 것이다. 이들은 K종합건축사무소의 당시 부사장이며 계열법인 P 사의 대표이사였던 정 아무개 씨에게 접근했다. 그는 이번 사건의 핵심인물로 지목돼 도피 행각을 벌이다 지난 4월 검거된 바 있다.
정 씨는 지난 2002년 용적률 상향 대가로 성남 시의원 등에게 뇌물이 건네졌던 분당 파크뷰 특혜 분양 사건의 배후로 지목된 적도 있던 인물. 그러나 대형 건축 사업에 있어서 업계에서는 실력자로 통하는 유명한 인사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정 씨와 뜻을 함께 모으는 데 성공한 이들은 그의 도움으로 K종합건축사사무소와 P 사의 사실상 계열 법인인 K 사를 새로 설립했다. 정 씨만 믿고 여러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K종합건축사사무소는 이후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는’ 격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힘들이지 않고 탄탄한 건축회사의 계열 법인을 설립한 이들은 순탄하게 자금 활로를 뚫었다. 이 회장의 H 사가 보유하고 있던 탄현 사업권도 지난 2005년 4월 넘겨받았다.
그런 뒤 이들은 서로 K 사 지분을 그간의 공로에 따라 일정 비율로 분배하는 나눠먹기에 들어갔다. 정 씨에게는 지분 15%를 넘겨주는 조건으로 군인공제회 및 국민은행 등에서 P/F(프로젝트 파이낸싱) 대출을 성사시키도록 했고, 정 씨로부터 300억 원을 투자하겠다는 약속까지 받아냈다.
▲ 지난해 12월 문이 굳게 닫혀있던 K 사. | ||
탄현 주상복합건물 시행사로 새롭게 둔갑한 이들은 다양한 수법으로 이곳저곳에서 돈을 챙겼다. K사 주식 및 주상복합건물 사업의 부대 사업권을 미끼로 동원해 한 사업가로부터 40억 원을 차용금 명목으로 받았다.
또한 캐피탈 회사 대표와 공모, 마치 캐피탈 회사가 K 사의 약 90억 원의 채권을 갖고 있는 것처럼 서류를 꾸미고, 이 중 일부의 채권을 법무법인에 양도하는 수법으로 22억 원을 챙겼다.
이러한 방법으로 모은 자금 등은 이들의 비자금 조성에 고스란히 이용됐다. 비자금 조성은 주로 사업 부지를 매수하는 과정에서 이뤄졌다. 탄현 사업 부지를 사들일 때 토지 매도인에게 부탁해 실제 매매대금보다 부풀려진 가짜 매매계약서를 작성, 그 차익을 매도인으로부터 돌려받는 수법이 전방위적으로 펼쳐졌다.
일산서구 탄현동의 사업장 부지의 경우에는 이미 76억 원에 매매계약이 체결됐음에도 불구하고, 부동산 브로커와 매도인과 공모해 원래 계약을 해지한 뒤 180억 원에 실제 매도하되 계약상에는 220억 원에 매도하는 것처럼 허위 계약서까지 작성했다. 그리고나서 매도인에게 양도소득세 9억 5000만 원을 납부하게 한 뒤 30억 5000만 원을 되돌려 받았다.
정 씨 역시 제3자 매수인을 내세워 탄현동 교회 건물을 33억 원에 매입하기로 매도인과 약정한 뒤 이 땅을 다시 K 사에 51억 원에 팔아 그 차익을 빼돌렸다. 소유권 등기를 제3자로 해 철저히 자신의 개입 사실을 숨긴 정 씨는 제3자 계좌를 통해 K 사로부터 들어온 매도금을 약삭빠르게 챙기는 치밀함도 보였다.
이와는 또 다른 수법으로 K 사 고문으로 들어온 일부 인사는 아예 대담하게 특별한 명목도 없이 K 사와 100억 원 상당의 용역 계약을 체결, 이 중 85억 원을 회사로부터 집행 받아 챙긴 것으로 드러났다.
이밖에도 군인공제회로부터 받은 3600억 원의 P/F 대출금 일부는 형식적인 내부 회계 장부 처리를 거친 뒤 도박 자금으로까지 유용된 것으로 밝혀져 검찰을 아연실색케 했다. 수천억 원의 대출금과 유명 건축회사의 법인 자금이 소리 소문 없이 그들만의 잔치에 사용된 셈이다.
유재영 기자 elegan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