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사기록엔 ‘일제 때 순사 생활’
본지는 최 씨의 제적등본을 입수했다. 현재 최 씨에 대해 정확히 알려진 것은 그가 1912년생으로 황해도 봉산군 출생이라는 점이다. 이름은 당초 ‘최퇴운’에서 지금의 최태민으로 개명된 것으로 나타났다. 호적상으로는 그는 각각 김 씨 박 씨 임 씨 등 3명의 부인에서 3남 6녀의 자녀를 둔 것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그의 신상 자료 기록은 조금 다르다. 거기에는 그가 모두 5명의 부인을 뒀고 거기서 모두 3남 6녀를 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밖에도 그의 학력과 직업 종교 등을 놓고 논란이 분분하다. 수사자료 기록 등을 보면 그의 정식 학력은 재령초등학교 졸업으로 알려졌고, 일제 강점기 때 순사 생활로 경찰계에 입문한 것으로 알려졌다. 해방 이후 남쪽으로 내려와 본격적으로 경찰관이 됐다는 설이 있다. 그는 51년 대한비누협회공업 이사장을 맡는 등 한때 사업에 뛰어들기도 했는데 잘 되지 않은 듯하다.
이후부터 그의 종교 행각이 펼쳐지는데 54년에는 금화사에서 머리 깎고 스님이 되기도 했고, 58년 서울로 이사 와 전국불교청년회 부회장이 됐다가 73년부터 서대문구 대현동의 한 빌딩에 ‘영생교 본부’를 차리고 불교 천도교 기독교를 합한 신생 종교를 만든 것으로 나와 있다. 이후 그는 곧 목사 안수를 받았고 스스로 ‘대한예수교 장로회 해동총회’의 책임자가 됐다고 나와 있다. 74년 8월 15일 육영수 여사의 서거 후 슬픔에 빠져 있는 박근혜 전 대표에게 편지를 보낸 것이 인연이 된 것으로 알려졌다.
최 씨는 자신을 둘러싼 각종 의혹에 대해 철저히 침묵으로 일관했다. 어떤 인터뷰도 없었다. 하지만 아주 보기 드물게 <우먼센스>가 90년 11월 그와 전화인터뷰를 한 기록이 나와 있다. 여기서 최 씨는 “(자신의 신상에 대해 써 놓은 수사 자료가) 그게 77년에 작성된 수사기록이다. 원래는 나돌아 다닐 수 없는 것이다”라고 밝혔다. 그는 “가족은 딸만 넷이 있다”고 할 정도로 전처 소생은 안중에 두지 않았다. 그에 따르면 자신의 부친은 독립운동가였다며 항간의 친일 경찰설을 일축하고 있다. 또 학력은 부산 동아대 전신인 건국의숙 법학과를 마쳤다고 주장했다. 그는 박 전 대표에 대해 “대화가 통하는 인물이다. 개인적으로는 존경하는 인물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비슷한 시기에 인터뷰에 나선 박 전 대표의 동생 근령 씨와 지만 씨는 최 씨에 대해 극도의 불신감을 표하고 있다. 지만 씨는 90년 11월 한 여성지와의 인터뷰에서 “작은누님과 의논 끝에 최 씨를 큰누님 곁에서 축출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큰누님이) 너무 한쪽만을 믿고 있다는 느낌이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감명국 기자 km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