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 건들면 ‘수류탄’이 ‘핵폭탄’ 될 수도?
▲ 전군표 국세청장의 6000만 원 수뢰 혐의가 불거지면서 김상진-정윤재 유착 의혹 사건이 또다른 권력형 스캔들로 비화될 조짐이 일고 있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정 전 비서관의 소개로 만난 김 씨로부터 세금 무마 대가로 1억 원의 뇌물을 받은 혐의로 구속된 정상곤 전 부산국세청장이 검찰 조사과정에서 뇌물 일부를 직속상관인 전군표 현 국세청장에게 ‘상납’했다는 진술을 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파문이 일파만파로 번지고 있다.
전 청장은 “마치 시나리오 같다”며 수뢰 의혹을 강하게 부인하고 있지만 검찰 또한 전 청장의 혐의 입증에 강한 자신감을 내비치고 있어 수사 결과에 따라 이번 사건이 초대형 권력 비리 사건으로 비화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검찰 주변에선 ‘정윤재-정상곤-전군표’ 3인의 관계를 비롯해 전 청장의 수뢰 의혹이 뒤늦게 흘러나오게 된 배경 등을 놓고 갖가지 의문과 억측이 꼬리를 물고 터져 나오고 있다.
# 인사 청탁의 대가?
전 청장의 실제 수뢰 여부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는 가운데 정 전 청장이 전 청장에게 줬다는 6000만 원의 성격을 둘러싸고도 논란이 분분하다. 정 전 청장은 검찰에서 지난해 9월부터 12월까지 모두 5차례에 걸쳐 미화 1만 달러 포함한 6000만 원을 전 청장에게 인사 청탁을 위해 건넸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정 전 청장이 전 청장에게 돈을 건넨 게 사실일 경우라도 ‘과연 이 돈을 인사 청탁의 대가로 단정할 수 있느냐’고 의문을 제기하는 시각이 적지 않다.
검찰은 정 전 청장의 상납 진술 내용이 언론에 보도된 이후 이 돈의 성격을 인사 청탁 명목이라고 전했으나 검찰 주변 일각에서는 최근의 국세청 내부 사정과 그간의 ‘관행’을 보면 다소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행시 21회 출신인 정 전 청장이 승진 문제로 매우 절박한 상황이었다는 점은 현재의 국세청 고위직급자 인력 구조상 충분히 인정되는 부분이다. 국세청 역사상 행시 21회 출신들의 인사 경쟁이 가장 치열하게 전개돼 왔다는 것 또한 잘 알려진 사실이다. 지난해의 경우만 보더라도 행시 21회 출신 국장급 이상 간부들이 무려 11명에 달할 정도여서 그 어느 때보다도 인사 경쟁이 치열했다. 주요 요직의 적체 현상도 다른 기수보다 훨씬 심했다.
문제는 전 청장이 지난해 7월 취임하면서 인사의 ‘격식 파괴’를 실천하고 다른 한편으론 행시 21회라는 특정 기수를 찍어 이들의 용퇴를 주도적으로 압박해왔다는 점이다. 실제 전 청장은 “다른 부처는 행시 23회가 이미 차관급 자리에 있는데 국세청은 21회가 대부분”이라며 명예퇴직을 자주 종용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전 청장의 ‘의지’대로라면 정 전 청장은 1급 요직으로의 영전이나 부산국세청장의 유임은 고사하고 국세청 본청에 남는 것조차 위태위태한 입장에 처할 수밖에 없었던 셈. 더구나 몇몇 동기들보다 진급이 늦었던 정 전 청장으로서는 어떻게든 국세청에 남을 방도가 필요했을 상황이었고 부득이하게 인사 청탁이란 방법을 고려했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다만 정 전 청장이 인사 청탁을 했다는 대상이 다름 아닌 전 청장이었다는 대목에서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이들이 적지 않다. 최근 몇 년간 국세청 내부에서 국장급 이상 고위직 인사 청탁 비리가 불거진 적이 거의 없는 데다 과거의 고위직 인사 청탁 사례들을 보면 ‘외풍’ 즉 정권 실세들을 통한 청탁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인사 등과 관련해 돈이 오고 가는 경우, 투서 등으로 금품 수수 의혹이 빠르게 전파되는 게 국세청 조직의 독특한 ‘내부 감시’ 관행. 이러한 주변의 눈을 의식할 수밖에 없는 정 전 청장과 전 청장이 과연 단지 인사 청탁 때문에 다섯 차례에 걸쳐 청장 집무실에서 돈을 주고받았을까 하는 의문도 싹트고 있다.
이런 몇 가지 이유 때문에 일각에서는 국세청 내부 인사가 아닌 외부의 실력자가 인사나 감세 청탁에 개입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도 조심스럽게 흘러나오고 있다. 이와 관련해 주목되는 것은 검찰이 정 전 비서관의 구속 영장에서 ‘피의자가 실제로 (국세청의) 인사에 개입한 정황이 있다’고 밝힌 부분이다.
검찰이 이 대목을 언급한 것은 정 전 비서관이 정 전 청장과 전 청장 간의 금전 관계를 파악하는 데 단초 역할이 됐다는 점을 부각시키려는 목적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인사 청탁이 정 전 비서관 관여하에 진행됐을 개연성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만약 그렇다면 △정 전 비서관 혹은 다른 인사에게 일부 청탁 대가가 건네졌거나 △정 전 비서관의 부탁을 받은 전 청장이 인사 청탁이 아닌 다른 명목으로 정 전 청장의 돈을 받았을 가능성, △정 전 청장이 단순하게 김상진 씨의 돈을 배달하는 역할을 했을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
# 나머지 4000만원은?
정 전 청장이 김 씨로부터 받은 1억 원 가운데 전 청장에게 줬다는 6000만 원을 제외한 나머지 4000만 원의 행방도 이번 수사의 또 다른 키포인트다. 일단 현재까지 이 돈의 행방은 ‘오리무중’이다.
검찰은 정 전 청장이 생활비나 경조사 비 등으로 4000만 원을 썼다는 입장이다. 수사를 지휘하고 있는 정동민 부산지검 2차장은 지난 10월 25일 기자간담회에서 4000만 원의 쓰임새에 대해 “돈 받은 시점(지난해 8월 26일)부터 구속(올해 8월 9일)될 때까지 1년 동안 얼마나 썼겠나. 지난해 연말 인사에서 국세청 부동산납세관리국장으로 옮긴 뒤 기관장이 아니니 직원 경조사비도 본인이 부담했을 테고, 자녀 중에 고 3이 있는 걸로 안다”고 밝혔다.
그러나 앞서 의혹이 제기된 대로 만약 정 전 청장의 청탁 과정에 외부 인사가 개입됐다면 이 ‘나머지 돈’이 해당 인사에게 전달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 수사 늦어진 까닭?
정 전 청장이 검찰에서 전 청장에게 6000만 원을 상납했다고 처음 진술한 것은 지난 8월 중순께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진술 내용이 두 달이 지난 최근에 와서야 그것도 비공식적인 루트로 언론에 흘려진 점도 다소 석연치 않은 대목이다.
그간 검찰에선 정 전 청장의 진술을 받은 지 한 달 가까이 지난 9월 12일에서야 수사 검사가 전 청장을 만났고, 그 뒤 다시 한 달여가 지나기까지 수사를 진척시키지 못했다.
정황상 외부적 요인에 의해 정상적인 수사가 어려운 상황에 이르렀거나 혹은 정 전 청장이 정 청장에게 건넨 것으로 보이는 6000만 원의 성격을 규정하는 데 상당한 고충이 있었다는 해석도 가능해진다.
검찰이 시간을 끌면서 정 전 비서관의 구속 전에 수사 검사가 직접 전 청장을 만나 수뢰 자금의 용처를 확인하려 한 부분이나, 정 전 청장이 건넨 돈이 인사 청탁의 대가라 밝히면서도 정작 “‘정 전 청장의 진술에서는’ 인사 청탁”이라며 애매모호하게 선을 그은 것 역시 향후 검찰에 미칠 파장을 최소화하려는 고육지책이 아닌가 하는 분석도 제기되고 있다.
유재영 기자 elegan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