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몸 노인에 아들 노릇 “효자군수, 편히 쉬시게”
전형준 전 화순군수가 서울 송파구의 한 원룸에서 스스로 목을 매 숨진 채 발견됐다. 그는 지난 6ㆍ4 지방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재기를 노렸으나 낙선, 이후 서울의 여동생 집에서 지내다가 최근 원룸을 얻어 혼자 생활해왔으며 심적으로 많이 힘들어한 것으로 전해졌다.
어제는 향청리 앞을 지나는데 할머니 세 분이서 볕을 쬐며 두런두런 형님 얘기를 하고 있더군요. 그중에는 형님께서 붕어빵을 사 안기던 그 할머니도 계셨습니다. 군수 출마를 결심했던 2005년 어느 날. 시장 앞에 혼자 앉아 계시던 할머니를 보곤 제게 얼른 천 원짜리를 쥐어주며 붕어빵이라도 사오라고 했었지요. 따뜻한 붕어빵을 할머니에게 안기며 “어째 날도 추운디 여기서 굶고 계시다요. 요거라도 드시고 기운 차리소”라고 말하던 형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쟁쟁합니다.
효자군수. 할머니들은 여전히 형님을 그리 부르고 계셨습니다. “그래도 형준이가 우리 같은 노인네들한테 효자 노릇했지. 해마다 쌀도 노인정에 주고. 혼자 사는 노인네들한테 반찬 나눠준 것도 형준이가 한 거였지?” “하몬. 맨날 선거판 엎어져가꼬 선거하느라 돈 많이 들인 거 빼면 잘한 게 많어.”
형님은 여덟 살에 아버님 돌아가시고 맏형님 의지하며 열심히 살아오셨지요. 누가 “어떤 인생을 살아 오셨냐” 물으면 “내 인생은 소설 한 편 쓸 정도다”며 너스레를 떨던 형님. 짐짓 허풍인 것처럼 웃으며 말하셨지만 틀린 말도 아니지요. 길쌈에 농사까지 지으시며 7남매 수발하시던 어머니. 중학교 다닐 형편이 안 됐지만 담임선생님의 도움으로 겨우 졸업장을 손에 쥐었지요. 그래도 고등학교 진학은 꿈도 꾸지 못하고 열여섯 살에 바로 버스 차장으로 일하며 고등학교 졸업장은 꼭 따겠다고 의지를 다지던 형님. 갓 전역하고 고교 검정고시를 합격했다며 기뻐하던 모습도 생각납니다. 쉰 살의 형님이 대학을 졸업한다는 소식 듣고 내심 감탄했습니다. 졸업식에서는 어머니께 학사모를 씌워주시며 펑펑 우셨지요. 형님께서는 한다면 하는 의지 있는 분이셨고, 항상 어머니를 기쁘게 하시던 분이었습니다.
형님의 고향 사랑은 함께 일하던 사람들 사이에 유명했지요. 상경해 92년에 사업 시작하시면서도 입만 떼면 화순 얘기를 하셨죠. 사업하며 오며가며 만난 사람과 얘기를 나누면서 동향 사람을 만나면 구수한 남도 사투리로 “아따, 화순 출신이라요? 내 쩌그 깡촌 다산리 사람 아니겄소. 동향 사람 만난 것도 인연인디 어데 드가서 밥이나 같이 하소”라며 팔을 잡아 끌던 일도 기억납니다. 오죽하면 고향 동네 이름을 따서 회사를 다산건설이라 지었겠습니까.
사업하고 자수성가한 사람이라면 으레 욕심 넘치기 마련이지요. 하지만 2004년 자그맣게 신문에 실린 한 교사의 편지를 보고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우리가 함께 나온 모교 이름을 보고 관심 있게 읽기 시작했는데 형님 이름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이제는 작은 시골 분교가 돼버린 사평초등학교의 학생들에게 서울구경을 시켜줘 고맙다는 인사였습니다. 할머니를 모시고 살며 학비도, 생활비도 없어 고생하는 아이에게 흔쾌히 지원을 약속했던 일화, 태어나 처음 서울을 가본 아이들이 너무도 좋아했다는 얘기 등이 적혀 있었습니다.
화순군에 있는 초·중·고등학생 아이들에게 장학금을 주고, 경로당에는 10년 넘게 쌀을 보내드리고, 화순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에도 아이들과 노인들을 위한 자선사업을 해왔으면서도 가장 가까이서 형님을 지켜봤던 저도 모르게 하셨지요.
2006년 군수에 출마했을 땐 사정 모르는 누군가는 “군수 하려고 그깐 돈 썼던 거냐”며 손가락질도 했습니다. 하지만 오래 형님을 지켜봐온 사람들은 알지 않습니까. 형님은 어려운 사람만 보면 누구라도 도와주고 싶어 하는 분이라는 걸요.
우여곡절 끝에 2006년 군수에 당선되고 형님은 “4년 임기동안 수익 전액 사회 환원”을 약속하셨지요. 하지만 그 약속은 당선 두 달 만에 지킬 수 없는 약속이 돼버렸습니다. 선거법위반 혐의로 구속 수사를 받으며 힘겨워하시던 형님 모습은 참 위태로워보였습니다. 그냥 하시던 사업 하고, 군민들을 위해서 물심양면으로 도왔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텐데 하는 생각도 많이 했습니다. 워낙 자존심 강한 성품 탓에 이런 얘기는 꺼내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다행히 집행유예 정도로 사건은 일단락됐고, 그렇게 소원하시던 군수자리는 동생인 완준 형님께서 이어가게 되었지요.
형님의 살아오신 길을 돌아보며 ‘왜 불행이 그렇게 한꺼번에 겹쳤을까’ 생각해봤습니다. 불행이 하나씩 왔다면 형님께서 그리 외롭고 극단적인 길을 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미어집니다. 형님 사업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는 얘기를 들은 건 지난해 말이었습니다. 건설 경기가 계속 좋지 않아 걱정하던 터였습니다. 지난 10월쯤이었을까요, 회사 이름도 바꾸고, 사무실도 옮기셨다기에 ‘괜찮은가보다 ’하고 넘어갔습니다. 그런데, 추석 후 사무실에 전화를 걸었지만 아무도 받지 않더군요. 저간의 사정을 들어보니 추석 이후에는 사무실 문은 잠긴 채 빚쟁이들만 찾아오고 있다더군요. 지난 지방선거를 치른 여파가 아닌지 내심 생각했습니다.
사실 6월 지방선거 때 군수에 재도전 하신다는 얘기 듣고 걱정이 앞섰습니다. 공천파동이다 뭐다 한참 시끄럽지 않았습니까. 결국 공천은 지금 군수가 되신 분께 돌아갔고, 형님은 주변 만류에도 무소속으로 출마를 하셨지요. 형수님께서도 많이 말리셔서 싸우기도 많이 싸우셨지요. 편찮으신 형수님의 만류를 뿌리치실만큼 군수가 하고 싶으셨는지, 왜 그렇게 간절히 군수가 되려 했는지 형님께서 계시지 않는 지금, 더 이상 따져 물을 수도 없게 됐네요.
예상했던 낙선은 결국 현실이 되고 말았고, 형님은 선거가 끝난 그날 홀로 많이 우셨던 기억이 납니다. 더 위로해드렸어야 했다는 후회가 이제야 밀려옵니다. 그 후에도 한동안 도통 기운을 차리지 못하시는 것 같아 보였습니다. 그래도 서울에서 여동생과 매제와 지내고 있다는 말에 안도했습니다. 형수님과의 불화에 대한 소문도 동네에 파다했던 터라 내심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사람들은 항상 밝고 사람 좋던 형님께서 왜 자살을 택했는지 의아해합니다. 하지만 가까이서 지켜본 저로서는 형님의 선택이 아주 조금은 이해가 갑니다. 평생을 사랑했던 군민들이 자신에게 등 돌렸다는 배신감이었을까요. 그리 셌던 자존심을 이기지 못한 탓이었을까요.
사업이 아무리 바쁜 중에라도 지인 중 누구라도 상을 당하면 비행기 타는 것도 마다않고 꼭 위로하고 올라가셨던 게 형님입니다. 형님 가시는 길에도 화순에서는 관광버스 세 대가 출발했습니다. 서울에 마련된 빈소에도 내내 형님을 찾는 사람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많은 이들이 그리워합니다. 한때는 모든 걸 다 가졌던 형님, 끝에는 모든 걸 다 잃었다고 생각하셨는지요. 모든 게 원망스러워 유서 한 장 남기지 않으셨는지요. 이제는 원망마저 내려놓으시고 편히 쉬십시오.
전남 화순=서윤심 기자 heart@ilyo.co.kr
화순군수 선거 잔혹사 민선 3~5기 동안 6번 선거 ‘당선 후 구속’ 꼬리표 2002년 민선 3기를 시작으로 민선 5기까지 선거를 6번 치른 곳. 화순군은 한동안 ‘군수들의 무덤’으로 불렸다. 2002년 임호경 전 군수가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됐으나 선거법 위반 혐의(금품제공)로 구속돼 직위 상실됐다. 임 전 군수의 배턴을 이어받은 건 그의 부인 이영남 전 군수다. 2004년 6월 실시한 재보궐 선거에서 구속된 임 전 군수를 대신해 나온 선거에서 당선돼 ‘부부군수’라는 별명을 얻었다. 2009년 전완준 전 화순군수(전형준 전 군수 동생)가 국제 산삼 심포지엄 환영사를 하고 있는 모습. 사진제공=화순군청 2006년 5월에 열린 민선 4기 선거에서 이 전 군수는 재선에 도전했으나 전형준 전 군수에 밀려 고배를 마셨다. 하지만 전형준 전 군수 역시 당선 두 달이 채 안 돼 선거법 위반 혐의(기부 당비대납 및 사전선거)로 구속돼 사임했다. 전형준 전 군수의 뒤를 이어 출마한 건 그의 동생 전완준 전 군수다. 2006년 10월 재보궐 선거에서 당선되며 ‘형제군수’가 탄생했다. 2010년 ‘동생군수’ 역시 재선에 도전하지만 유세 기간 중 선거법 위반 혐의(금품 및 향흥 제공)로 피소돼 구속됐다. 전완준 전 군수는 이에 굴하지 않고 옥중 출마해 ‘남편군수’인 임 전 군수를 누르고 당선됐으나 결국 2011년 유죄 선고를 받아 군수직을 상실했다. 2011년 재선거에서는 민주당 홍이식 후보가 당선돼 ‘가족군수’의 맥을 끊었다. 하지만 10년 가까이 형제군수와 부부군수 두 집안의 싸움이 이어지면서 당시 항간에는 “홍 후보는 특정 집안의 지원을 받아 당선된 것”이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홍 전 군수 역시 2012년 정치자금법 위반(뇌물수수)으로 구속됐다가 보석으로 풀려나 재판 중 임기를 마쳤다. [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