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8일 못 채워 17년 도피 꽝
▲ 영화 <비열한 거리>의 한 장면. | ||
청주지검 형사2부(부장검사 정연복)는 17년 전 지역 ‘순찰’을 돌다가 시비가 붙은 상대방 조직원들을 흉기로 살해하고 중상을 입힌 혐의로 청주지역 조직폭력배 출신 서 아무개 씨(35)를 지난 1월 26일 구속했다고 밝혔다.
당시 사건에 개입했던 조직원 13명 중 서 씨를 제외한 12명은 이미 경찰에 검거되거나 자수해 짧게는 2년, 길게는 12년 동안 교도소에서 복역하며 죄의 대가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서 씨는 경찰에 자수하는 대신 기나긴 도피생활을 선택했다가 공소시효를 불과 8일 앞두고 검거돼 뒤늦게 죗값을 치르게 됐다.
당시 살인극의 발단이 됐던 조폭들 간의 시비 전모와 서 씨의 기나긴 도피생활을 뒤쫓아가 보았다.
검찰에 따르면 청주에는 과거부터 파라다이스파와 시라소니파, 화성파 등의 폭력조직이 뿌리를 내려왔다. 특히 청주지검 관할지역 내에서는 지난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 이들 조직 간의 세력다툼이나 시비로 너댓 건의 큰 사건이 벌어졌다고 한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1990년에 발생한 일명 ‘○○제과 살인사건.’ 피의자 서 씨는 바로 이 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수배를 받아왔다.
사건은 90년 4월 29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날 시라소니파와 파라다이스파 조직원들은 평소처럼 서로의 관할구역을 ‘순찰’하고 있었다. 검찰 관계자는 “당시에는 조직들 간에 관할구역이 확실하게 구분돼 있어 오후 4~5시부터 조직원들이 자신들의 관할구역을 순찰하는 게 하루의 일과였다”고 전했다.
오후 6시쯤 청주시 북문로의 상가밀집지역에서 각자의 구역을 순찰하고 있던 파라다이스파 8명과 시라소니파 13명이 순간적으로 마주치게 됐다. 라이벌 관계에 있던 두 조직이 경계지점에서 우연찮게 만나게 된 것이다. 당시 양측의 조직원들은 대부분이 18세 정도로 혈기왕성할 때였다. 인원이 많았던 시라소니파가 먼저 시비를 걸며 말싸움을 벌였다.
시라소니파 조직원이었던 서 씨는 같은 조직 소속인 A 씨(35)와 함께 먼저 기세를 장악하기 위해 파라다이스파 조직원인 B 군(당시 18세)에게 “왜 인사 안 하느냐”며 시비를 걸었다. 시비는 곧 험악한 말싸움으로 번졌고 결국 일행 중 각 조직의 선배가 일 대 일로 대결을 벌이는 상황으로 발전했다. 그러던 중 시라소니파 측 선배 조직원 한 명이 “저 XX들 다 죽여”라고 외치자 나머지 조직원들도 순식간에 ‘전장’에 뛰어들었다.
조직 간의 패싸움이 벌어지자 시라소니파는 흉기를 꺼내서 싸우기 시작했다. 검찰 관계자는 “당시 흉기가 미리 준비돼 있었던 것 같다”며 “예전에는 조폭들이 관리 구역에 있는 유흥주점이나 구두방 등에 흉기를 보관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선배 조직원이 외치는 소리에 후배 조직원들이 미리 보관돼 있던 흉기 가방을 재빨리 들고 와 싸움에 끼어들었던 것이다.
시라소니파 조직원들이 흉기와 쇠파이프를 휘두르기 시작하면서 피가 낭자한 유혈사태가 벌어졌다. 파라다이스파 조직원들은 미처 ‘전쟁’을 치를 준비가 안된 상태였다. 칼을 휴대하고 다니던 조직원도 몇몇 있었지만 수적으로 열세였던 것. 도망치며 맞서던 B 군은 결국 A 씨와 서 씨가 휘두른 칼에 찔려 사망하고 C 씨(35) 등 두 명이 중상을 입었다.
범행 직후 서 씨를 제외한 시라소니파 10명은 경찰에 검거됐다. 직접 살인에 가담한 A 씨 등 2명은 좁혀오는 수사망 속에서 불안감을 이기지 못하고 자수를 택했다. 당시 구속 기소된 피의자들은 1심에서 모두 실형이 선고될 정도로 엄한 처벌을 받았다. 군에 입대하게 된 한 명은 군 검찰로 넘겨져 형을 살았고 나머지 8명은 최저 2년에서 최고 12년 형을 선고받고 교도소 생활을 해야 했다. 살인의 주범인 A 씨는 1심에서 무기징역을 받았지만 2심에서 B 군의 유족들과 합의를 하고 자수를 한 것이 정상참작돼 12년 형으로 줄었다.
홀로 은신해 있던 서 씨는 동료 조직원들이 검거된 뒤 어느 정도의 형을 받았는지 모두 파악하고 있었다. 한때 자수도 떠올렸지만 무거운 형량에 이내 마음을 돌리고 말았다. 훗날 검찰 조사에서 서 씨는 ‘당시 동료들이 중형을 선고받자 겁도 났고 홀어머니 생각에 자수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고 밝혔다. 검찰 관계자는 “실제로 서 씨가 도피생활을 하면서 홀어머니를 모시지는 못했지만 암암리에 검·경의 눈을 피해 방문했던 것으로 보인다”며 “진술 과정에서도 홀어머니에 대한 걱정을 많이 했다”고 전했다.
조직원으로서 ‘일’을 저질렀지만 도피기간 동안 조직은 서 씨를 돌보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진다. 검찰 조사 결과 서 씨는 주로 서울, 대전, 천안 등지에서 막노동을 하며 도피생활을 이어갔던 것으로 드러났다. 신분 확인이 필요 없는 인력시장에 나가 공사장 인부로 일하면서 하루하루 먹고살았던 것.
초조하고 고단한 나날을 보내면서도 서 씨가 손꼽아 기다렸던 것은 당시 사건의 공소시효가 끝나는 시점이었다. 유혈극이 벌어진 지 15년 뒤인 2005년 4월 28일이 지나자 공소시효가 끝난 것으로 여긴 서 씨는 마침내 청주로 돌아왔다. 서 씨는 오랜 만에 ‘자유’를 만끽하려는 듯 종종 시내를 배회하기도 했다.
하지만 서 씨가 미처 알지 못하던 사실이 하나 있었다. ‘공범이 기소된 뒤 공판이 종료될 때까지 공소시효가 정지된다’는 형사소송법 조항이었다. 따라서 서 씨가 저지른 살인사건의 공소시효는 공범의 재판 기간인 2년 8개월여가 제외돼 2008년 2월 1일로 시효가 연장된 상태였다(지난 연말 형사소송법 개정으로 살인에 대한 공소시효가 15년에서 25년으로 늘어났지만 개정 이전에 발생한 사건에 대해서는 소급적용되지 않는다).
서 씨는 커다란 착각 속에서 도피 아닌 도피생활을 이어갔다. 그러나 이즈음 청주지검은 서 씨의 행적을 하나씩 뒤쫓고 있었다. 대검찰청에서는 매년 기소중지자 중 중대 혐의 수배자에 대해 특별관리를 하고 있는데 그 대상에 서 씨의 이름도 올라 있었다. 그는 공소시효가 끝나기 전에 우선적으로 검거해야 할 대상 중 하나였다.
17년간이나 행방을 감췄던 서 씨의 흔적을 추적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자신의 공소시효가 만료됐다고 여겼던 서 씨는 뜻밖의 실수를 저지르고 만다. 서 씨가 과거처럼 대포폰을 이용하지 않고 휴대폰을 자기명의로 신청했던 것. 검찰은 그의 실수를 결코 놓치지 않았다.
검찰이 서 씨의 휴대폰에 대한 위치추적과 탐문수사를 벌인 결과 그의 은신처가 드러났다. 검찰 수사관들은 결국 지난 1월 24일 청주 시내의 한 은신처에 숨어 있던 서 씨를 검거할 수 있었다. 그는 은신처를 주로 잠만 자는 장소로 이용해왔으며 그의 홀어머니는 다른 곳에서 살고 있었다고 한다.
체포 당시 서 씨는 자신의 혐의에 대해서는 순순히 인정했지만 검찰 수사관들에게 ‘공소시효가 지난 것 아닌가’라고 계속 질문을 했다고 한다. 이에 수사관들이 공소시효 만료가 2008년 2월 1일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자 결국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는 것. 한 검찰관계자는 “서 씨가 도피생활을 하면서도 늘 당시 사건을 생각하며 양심의 가책을 느꼈던 것 같다”고 전했다.
검찰 측은 서 씨의 혐의를 입증하는 일 못지않게 공소시효 계산에도 무척 신경을 썼다는 후문. 청사 컴퓨터에 공소시효 기간을 손쉽게 계산하는 프로그램이 담겨 있지만 만에 하나라도 생길지 모르는 실수에 대비해 직원들이 직접 시효를 계산했다고 한다. 다행히도 공소시효 계산은 정확했고 시효 만료를 8일 남긴 상황에서 서 씨를 검거해 기소할 수 있게 됐다.
검찰관계자는 이번 사건을 해결하면서 느낀 소회를 이렇게 밝히기도 했다.
“서 씨가 17년간 도피생활을 하면서 갖은 고생을 겪어왔다는 점에서는 일종의 측은함도 느껴진다. 하지만 죄를 짓고 도주하거나 숨어도 언젠가는 반드시 법의 심판대에 선다는 것을 보여주는 생생한 사례라고 생각한다.”
청주=이윤구 기자 trus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