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떼이면서까지 차명으로 유지” 그 깊숙한 비밀 뭐기에…
▲ 비자금 논란에 휩싸인 박철언 전 장관. | ||
물론 박 전 장관은 “터무니없는 음해”라고 반박하고 있지만 파문의 여진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오히려 박 전 장관이 운용했던 자금의 규모와 출처를 둘러싸고 거대한 ‘진실게임’이 벌어지는 양상이다. 박 전 장관은 과연 얼마나 되는 자금을 운영해왔고 자금의 출처는 어디일까. 관련 인사들의 주장 등을 통해 의문의 실체에 접근해봤다.
박 전 장관을 둘러싼 비자금 의혹의 불씨가 된 사건은 박 전 장관 측과 여교수 K 씨 사이에 벌어지고 거액 횡령 고소 사건. 박 전 장관 일가가 지난해 여교수 K 씨와 그의 가족을 176억 원 횡령 혐의로 고소한 사실이 본지 보도로 세상에 알려졌기 때문이다. 횡령 사건 자체도 큰 논란을 일으키고 있지만 현재 세인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돈의 출처’다. 과연 이 거액의 자금이 어떻게 조성된 것인가 하는 의문 때문이다.
사건이 공개되자 박 전 장관은 몇몇 언론사 기자들에게 문제의 176억 원에 대해 “재단 설립을 위해 집안의 유산과 친지들의 돈 등을 모은 것”이라며 비자금 조성 의혹에 대해 전면 부인했다.
박 전 장관은 지난 5일 서울 강남구 역삼동 한국복지통일연구소에서 K 씨 횡령 고소사건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자신의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이 자리에서 그는 거액 자금의 출처와 관련해 “1970년대 초부터 법조생활을 하면서 내가 알뜰히 모은 돈과 선친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산, 그리고 여러 사람들로부터 대가 없이 받은 협찬금 등이다”라며 “이 돈을 모아 선친의 뜻에 따라 통일재단을 만들 생각이었다”라고 밝혔다. 또 그는 자금 관리 방법에 관해서도 “이율에 따라 1~5년짜리 통장 여러 개로 나눠 관리했으며, 여교수 K 씨도 통장 심부름을 하던 사람이다. 그렇게 많은 돈을 관리한다는 사실이 정치인의 이미지상 좋지 않다고 판단해 사기를 계속 당하면서도 차명계좌를 유지하게 됐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박 전 장관의 이 같은 해명은 곧바로 또 다른 의혹과 맞닥뜨리게 됐다. 박 전 장관의 옛 측근이던 김호규 씨(58)가 “박 전 장관이 6공 시절 거액의 비자금을 조성했다”며 언론을 통해 자금의 출처와 규모 등에 대해 폭로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박 전 장관의 거액 비자금 의혹에 김 씨가 도화선을 당긴 셈이다.
김호규 씨는 박 전 장관의 고등학교·대학교 후배이자 보좌관 출신으로 6공 시절 월계수회(박 전 장관의 사조직) 업무를 맡아왔던 인물. 지난 5일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김 씨는 “박 전 장관이 조성한 비자금 규모가 무려 2000억 원대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되며 자금 출처는 대부분 재벌그룹이다”라고 주장했다.
“80년대 후반 청와대 정책보좌관 겸 국회의원을 지내면서 6공화국 핵심 실세로 통했던 박 전 장관에게 대기업들이 선거 때마다 수십억 원씩 정치자금을 지원했다. 대표적인 인사는 H 그룹 A 회장, D 그룹 B 회장, S 그룹 C 회장, L 그룹 D 회장 등이다.”
김 씨의 주장에 따르면 “박 전 장관의 자금은 대부분 대기업 총수들로부터 나온 것이며 그중 일부가 K 교수에게 전달된 것”이라는 얘기다.
김 씨는 또한 “박 전 장관이 비자금 중 일부에는 영부인(당시 김옥숙 여사) 것도 섞여 있고 불법 자금이니 차후에 추적이 불가능하도록 두 번, 세 번 이상 철저히 세탁하라고 지시했다”면서 “88~89년은 금융실명제 시행 전으로 당시 1000만 원, 500만 원씩 분산해서 가명 또는 차명으로 계좌를 만들었고 본인과 본인 가족 이름으로 (이 돈을) 세탁해 007가방에 담아 박 전 장관에게 전달했다”고 주장했다.
김 씨는 ‘또 다른 비자금 관리인이 있었냐’는 기자의 질문에 “비자금 관리인은 최소 10여 명에 달하고 가·차명계좌는 무려 100여 개에 이른다”면서 “최근 소송 문제로 논란이 일고 있는 여교수 K 씨를 비롯해 전직 은행지점장 S 씨(박 전 장관에게 횡령 혐의로 고소당한 상태), 검찰 출신 법무사 K 씨, 박 전 장관의 비서 출신인 K·L 씨, 미술거래상 J 씨, 80년대 인기 가수 J 씨 등이 수억 원에서 수십억 원씩 차명 계좌를 운용했다”고 말했다.
이어 김 씨는 이에 관한 증거자료까지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통장과 수표사본, 도장, 괴자금 인출날짜 및 전달 날짜 등 관련 자료가 있으며 박 전 장관이 계속 부인할 경우 증거자료를 검찰과 언론에 공개할 수도 있다”고 강조했다.
김 씨의 폭로가 이어지자 박 전 장관은 6일 또 한 번 기자회견을 자청해 해명에 나섰다. 그는 김호규 씨를 “은행 심부름을 하면서 100억 원대 돈을 횡령한 인물”이라고 비난하며 “내 돈을 횡령하고 미국으로 출국해 있던 김 전 보좌관(김호규 씨 지칭)을 찾아가 물어보니 눈물을 흘리면서 죄송하다고만 하며 자기가 심부름시켰던 후배 법무사 김 아무개 씨가 다 빼돌렸다고 말했다. 이후 김 전 보좌관이 10억 원을 반환했다”고 밝혔다.
▲ 박 전 장관의 회고록. 돈봉투에 얽힌 사연이 실려있다. | ||
옛 측근인 김 씨와 박 전 장관은 이처럼 서로 상반된 주장을 펴고 있다. 또한 박 전 장관이 차명 계좌 등으로 보유해온 자금의 전체 규모와 성격 또한 아직 불분명한 상황이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박 전 장관이 그동안 적어도 300억 원에 가까운 거액의 자금을 운용해왔다는 사실이다.
박 전 장관의 주장대로 △여교수 K 씨에게 횡령당한 자금 176억 원 △김호규 전 보좌관에게 횡령당했다는 90억 원 △전 자금관리인 S 씨를 횡령 혐의로 고소한 금액 3억여 원 등만 따져봐도 총액이 269억 원에 이른다. 여기에 박 전 장관 스스로 “사기를 계속 당하면서도 차명계좌를 유지했다”고 밝힌 대목을 보면 이외에도 그가 돈을 떼인 ‘사건’이 더 있을 개연성도 있다. 실제로 박 전 장관의 몇몇 예전 측근들은 K 교수 이외에도 박 전 장관이 돈 관리를 맡겼다가 큰돈을 떼인 인물이 몇 명 더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문제는 과연 이 같은 거액의 자금을 박 전 장관의 얘기처럼 선친의 유산과 자신의 수입, 친지와 지인들의 협찬금만으로 조성할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박 전 장관이 대기업 회장들로부터 거액의 정치자금을 받아 이를 100여 개의 가·차명 계좌로 분산 관리해왔다”는 옛 측근 김 씨의 주장이 파문을 낳고 있는 이유도 이런 의문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박 전 장관의 거액 자금을 둘러싼 의혹이 명쾌하게 풀리게 될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설사 박 전 장관의 거액 자금 중 상당액이 재벌 회장 등으로부터 받은 옛 정치자금이라 할지라도 이미 공소시효가 지나 검찰의 수사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박 전 장관이 2005년에 펴낸 회고록 <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에는 재벌 총수와 거액의 ‘돈봉투’에 얽힌 이 같은 일화가 등장한다.
“1988년 4·26 총선을 앞두고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이 나를 꼭 한번 봤으면 했다. 몇 번을 고사한 끝에 어느 날 힐튼호텔 23층 펜트하우스 김우중 회장의 방에서 만났다. 김 회장은 특별한 부탁이 없이 6공화국이 잘 되어야 한다는 얘기를 많이 했다. 30분쯤 지났을 무렵 내가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그러면…’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김 회장이 황급히 윗주머니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어 내밀었다. 김 회장은 ‘이거 직원들 회식비입니다. 약소하지만 고생하는 직원들 회식이나 시켜주라는 작은 뜻입니다. 거절하지 마십시오’라고 했다. 청와대 사무실로 돌아와 봉투를 열어보니 보좌관실 직원 50여 명이 회식을 몇 백번 하고도 남을 큰돈이었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바로 김 회장에게 연락하여 좀 보자고 했다. …정중하게 봉투를 내놓았다.”
과연 박 전 장관이 회고록에서 거짓말을 한 것일까, 아니면 과거의 측근 김 씨가 옛 상전을 음해하고 있는 걸까. 박 전 장관의 거액 자금을 둘러싼 ‘진실게임’은 이제 새로운 라운드를 맞고 있다.
홍성철 기자 anderia10@ilyo.co.kr
류인홍 기자 ledh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