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버리고 ‘힘’에 눌리고… 가해자 피해자 뒤죽박죽
▲ 한 초등학교의 하교시간 풍경으로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련 없음. | ||
경찰은 당초 초·중학생 11명이 초등학교 3학년 등 8명의 여학생을 집단으로 성폭행한 사건을 수사하던 중 이 초등학교에서는 최근 2년간 상습적으로 집단 성폭력이 자행돼 왔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밝혀냈다. 경찰에 따르면 이들 초등학생들은 ‘포르노’를 보고 별다른 죄의식 없이 놀이하듯 포르노내용을 따라했다고 한다. 해당 초등학교와 교육청은 이 같은 성폭력 사태를 이미 지난해 12월부터 파악하고 있었음에도 안이하게 대처해 결과적으로 사건을 더 키웠다는 지탄을 받고 있다.
우리 사회의 각종 고질병을 총체적으로 드러낸 대구 초등학교 성폭력 사건의 진상을 정리해봤다.
지난달 4월 29일 대구 서부 경찰서와 아동 성폭력전담센터에 한 학부모가 전화를 걸어왔다. “우리 딸이 성폭행을 당했다”고 말문을 연 이 학부모는 자신의 딸을 포함한 초등학교 3학년 학생 8명이 11명의 남학생들에게 집단으로 성폭행을 당했다는 충격적인 사건을 신고했다. 사건을 접수한 대구 서부경찰서가 용의자로 지목된 A 군 등을 붙잡아 조사함으로써 최근 2년간 한 초등학교에서 자행돼온 성폭력 실태가 세상에 드러나게 됐다.
사건은 지난달 21일 초등학교 6학년 A 군 등 초등학교 남학생 6명이 평소 안면이 있던 저학년 여학생들을 인근 중학교로 유인하면서 시작된다. “재미있는 것을 보여주겠다”는 말에 따라나선 여학생 8명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A 군과 오락실 등을 다니며 알게 된 B 군(14) 등 중학생 일행 5명이었다. B 군 일행은 여학생들의 팔을 잡아당기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 뒤 중학교 건물 사이에 위치한 정원으로 끌고가 집단으로 성폭행을 했다. 그 자리에 함께 있던 초교 남학생들도 함께 성폭행에 가담했다.
그런데 경찰의 조사가 진행되면서 더욱 충격적인 사실이 밝혀졌다. 이들 가해학생들이 다니는 대구의 A 초등학교에서 지난 2년 동안 상습적으로 이 같은 성폭력이 자행돼 왔다는 것이었다. 성폭력은 주로 5~6학년의 고학년 학생들에 의해 저질러졌다. 이들은 인터넷 포르노와 케이블 TV를 보고 성행위를 ‘흉내 내는 놀이’ 정도로 생각했다고 말했다.
경찰에 따르면 이들 고학년 초등학생들은 저학년 남학생들에게 변태적인 행위까지 강요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저학년 학생들에게 동성 간의 성행위가 담긴 포르노를 보게 하고는 서로 성기를 만지게 하는가 하면 심지어 변태 행위까지 강요했다고 한다. 말을 듣지 않을 경우에는 폭력을 쓰고 집단 따돌림을 시켰기 때문에 피해학생들은 “하라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고 후에 상담소에서 고백했다.
이 같은 변태적인 행위는 비단 동성 간에만 이뤄진 것은 아니었다. 가해자나 피해자들이 진술을 꺼리고 있어서 아직 확인된 바는 없지만 50여 명의 남녀 학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성행위를 강요당한 ‘커플’도 있었다고 한다.
이들은 장소도 별로 가리지 않았다고 한다. 빈집, 인근 학교 심지어는 동네 공원 등 야외에서까지 ‘놀이’를 즐긴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한적한 장소만 있으면 어느 곳에서든 성폭력이 자행돼 왔다는 얘기다.
그 결과 최근 2년간 벌어진 성폭력과 직·간접적으로 연루된 학생 수도 상상을 초월한다. 이 사건이 알려진 후 학부모단체와 전교조 등으로 구성된 대책위원회가 지난 2006년 1학기를 기점으로 실시한 실태조사에서 성폭력 연루자로 거론된 이름만 100명이 넘는 것으로 파악됐다.
그런데 이들 학생들은 타인의 강요에 의해 성폭력을 한 경우가 많다보니 누가 가해자고 누가 피해자인지 구분짓기도 애매하다고 한다. 폭행을 당하고 할 수 없이 성행위를 한 경우 자신도 ‘수치스런 일을 강요당한 피해자’지만 성폭력을 당한 사람에게는 가해자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많은 피해자가 나올 동안 해당 초등학교에서는 이 같은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을까. 대답은 ‘NO’다. 학교 측에서는 2년 동안이나 계속돼온 학생들 간의 집단 성폭력 사태를 이미 인지하고 있었는데도 사건을 숨기고 안이하게 대처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아이들에게서 최초로 수상한 낌새를 챈 이는 이 초등학교의 K 교사였다. 그는 지난해 11월 자신의 학급 학생들이 성행위 를 흉내 내는 것을 보고 상담에 나섰다고 한다. 그는 상담 과정에서 고학년들이 저학년 남학생들에게 강제로 포르노를 보여주며 동성 간 성행위를 강요하고 있으며 이 같은 행위가 학교 내에 만연해 있음을 알게 됐다고 한다.
그런데 이 교사의 보고를 받은 학교 측이 문제였다. 학교 측은 해당 학생들에게 위인전을 읽히는 ‘독서교육’을 시키고 학교방송을 통한 성교육을 실시하는 데 그쳤다. 일부 교사들이 “전체 학생을 대상으로 실태를 조사하고 학생들을 상담 치료해야 한다”고 요구했음에도 학교 측에서는 묵살했다고 한다. 학생들을 영남권역 해바라기아동센터에 보내 상담치료를 받게 한 것은 일부 교사들에 의해서였을 뿐 학교 측에서는 근본적인 문제 해결에 나서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해당 시교육청 역시 관련 사실을 보고 받고도 사건을 숨기기에만 급급했다. 대구시 남부 교육청이 해바라기아동센터로부터 이러한 사실을 보고받은 것은 지난해 12월. 하지만 교육청은 다섯 달 동안 경찰에 신고는커녕 자체 실태 조사조차도 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대책위는 “A 초교의 일부 교사들은 성폭력 사실이 확인된 지난해 11월 대구 남부교육청에 익명으로 이 같은 문제를 문의했지만 교육청에서 돌아온 대답은 ‘동성 간에 서로 좋아서 한 경우는 성폭력이 아니라 학교 폭력으로 보고해야 한다’고 대답했다”고 말했다.
한편 사건을 조사 중인 대구 서부경찰서는 지난 2일 가해학생 11명에 대한 조사를 마치고 법정 구속 연령에 해당하는 만 14세 이상의 가해자 3명을 긴급체포해 ‘성폭력범죄의 처벌 및 피해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나머지 가해학생들 5명은 만 12세가 넘지 않아 경찰 조사 후 부모에게 인계됐다.
이로써 일단락될 것 같은 사건은 엉뚱한 데서 파문이 불거지고 있다. 지난 2일 김도연 과기부 장관이 현장인 해당중학교를 방문한 자리에서 대구의 교육책임자인 신 아무개 교육감은 “성폭력을 막기 위해선 취약지역에 개를 키워야 한다”는 식의 황당한 발언을 했다. 난데없는 ‘개’ 발언에 참석자들 사이에선 정적이 흘렀고 김 장관도 기가 찬 듯 듣고만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김 장관에게서도 발생했다. 이번 사건의 주무대인 해당 초·중등학교에 비서진 등 10여 명을 대동한 채 신 교육감 일행과 함께 승용차 3대로 ‘폼’나게 방문한 것이다. 가뜩이나 진술을 꺼리고 있는 피해 학생들의 학부모들은 자녀들의 전학까지 고려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자 “소리소문 없이 방문해도 알려질까 두려운데 이렇게 동네방네 소문을 다 나게 만드느냐”며 분통을 터트렸다.
김장환 기자 hwany@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