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왕특보’ 염동연 의원(위)과 이강철 전 단장이 요즘 잘 보이지 않아 궁금증을 자아내고 있다. | ||
여권의 한 고위 인사는 최근 사석에서 이런 애매한 말을 불쑥 내던졌다. 이 인사가 언급한 ‘왕특보들’은 염동연 열린우리당 의원과 이강철 전 열린우리당 영입추진단장. 두 사람은 지난 2002년 대선 당시 노무현 후보의 정무특보와 조직특보로 활동, 여권에선 ‘왕특보’로 통한다. 노 대통령의 복심(腹心)을 읽을 수 있는 최측근들로 ‘노무현 대통령 만들기’의 일등공신이라는데 누구도 이의를 달지 않는다.
그런데 요즘 두 사람이 좀처럼 눈에 띄질 않는다는 얘기다. 4·15총선 당시 대구 동구에 출마, 낙선한 이 전 단장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 거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광주 서구갑에서 당선돼 ‘활발하게’ 의정활동을 하고 있는 염 의원이 보이질 않는다는 얘기는 다소 황당하게 들린다. 그런데 앞서 언급한 인사의 얘기를 좀더 들어보면 그 말의 속뜻을 이해할 수 있다. “영남과 호남의 실세로 불리는 두 사람이 6·5재보선 이후 상당히 몸을 낮추고 있는 것 같다”는 얘기다. 영호남에서 ‘노무현 전도사’ 역할을 했던 두 사람이 요즘 들어 ‘맥’을 못 추고 있다는 것이다.
염 의원과 이 전 단장은 ‘노무현 분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노 대통령 또한 이들에 대한 애정이 각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노무현-염동연·이강철’의 친분 정도를 읽을 수 있는 일화 한토막. 노 대통령은 지난해 대통령 취임 직후 첫 비공식 일정으로 두 사람과 오찬을 가졌다. 자신의 선거 캠프를 쌍두마차처럼 이끌었던 것에 대한 마음의 빚을 갚기 위해서였다. 노 대통령은 “두 분이 있었기에 오늘의 내가 있었다. 결코 (신세를) 잊지 않겠다”고 했다. 그만큼 노 대통령의 속내에는 두 측근에 대한 고마움과 믿음이 강하게 자리잡고 있다.
염 의원은 지난 2000년 노 대통령이 해양수산부 장관으로 있을 때 첫 인연을 맺었다. 당시 노 장관이 염 의원에게 “세상을 함께 바꿔보자”고 제안, 의기투합했다. 이때부터 염 의원은 ‘노무현 대통령 만들기’를 위해 총대를 메고 나섰다.
1973년 유신반대 시위를 주도하는 바람에 투옥, 정치권에 발을 들여놓은 이 전 단장. 그는 지난 2002년 노무현 대통령 후보 조직특보를 맡아 백방으로 뛰었고 마침내 ‘주군’을 ‘왕좌’에 올려놓는데 성공했다. 두 사람은 출신지에 따라 ‘호남특보-염동연, 영남특보-이강철’로 통한다. 실제로도 대선 당시 두 사람은 각각 호남과 영남에서 ‘노풍’을 일으키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4·15총선 때도 염 의원은 정무위원장직을 맡아, 총선 후보 선정 과정에서 낙마한 인사들을 다독였다. 막후에서 총선 후유증을 줄이려고 애썼던 것이다. 이 전 단장도 공직후보자자격심사위원회와 비례대표선정위원회 위원으로 총선 후보 결정과정에 깊숙이 참여했다.
두 사람은 당시 ‘전국 정당’을 꿈꾸던 노 대통령의 의중을 따라 직접 광주와 대구에서 출사표를 던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 전 단장은 ‘박근혜 바람’과 정동영 당시 의장의 ‘노인 폄훼 발언’ 등의 영향으로 낙선의 고배를 마셔야 했다.
당연히 당선된 염 의원은 ‘실세’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고, 이 전 단장은 맥이 빠질 수밖에 없는 신세가 됐다. 열린우리당이 국회 과반수(1백52석)를 차지해 ‘전쟁’에선 승리했지만, 자신이 사령관을 맡았던 ‘영남 전투’에선 참패했다. 그래서인지 이 전 단장은 총선을 치른 후 한동안 당사에 모습조차 드러내지 않았다. 대구의 한 병원에 입원했다고만 알려졌다.
그런데 5월 들어 대통령 탄핵 기각 결정이 나면서 두 사람은 제법 눈에 띄는 행보를 보이기 시작했다. 이 전 단장은 자신이 지난해 말 영입한 김혁규 전 경남지사를 총리 자리에 앉히려고 했다. 정가에선 이 전 단장이 김 전 지사가 ‘차기 지도자감’이라는 얘기를 하고 다닌다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그만큼 ‘김혁규 카드’에 애착을 갖고 있었다는 얘기다. 하지만 ‘김혁규 카드’는 6·5재보선 참패로 폐기됐다. 대신 이해찬 총리가 지명됐다.
이 전 단장은 당연히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자신이 직·간접적으로 지원했던 장인태 경남도지사 후보도 낙선했다. ‘영남특보’로서의 체면이 구겨질 수밖에 없었다. 특히 ‘영남발전특위’ 구성 논란으로 이 전 단장이 구설수에 올랐다. 열린우리당의 한 고위 당직자는 “재보선 전에 ‘영남발전특위’가 구성된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호남지역 사람들이 분노했다.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만들어 놨는데, 호남을 배려해 준 것이 무엇이냐’는 불만이 쏟아졌다”고 말했다. 이런 호남 지역의 배신감은 곧바로 재보선 결과로 드러났다. 전남도지사 선거에서도 열린우리당이 패배했던 것이다. 이 같은 재보선 결과는 ‘호남 사령관’인 염 의원의 정치적 입지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렇게 두 사람은 재보선 참패에 대한 책임감 때문인지 몸을 낮췄다. 특히 이 전 단장은 얼굴조차 내밀지 않고 있다. 정치권의 한 인사는 “김혁규 총리 카드가 좌절된 데다, 재보선에서도 참패한 것에 대한 책임감 때문에 근신하고 있는 게 아니겠느냐”고 짐작했다. 이 전 단장의 한 측근은 전화통화에서 “지금은 쉬고 계신다”고만 말했다. 구체적인 근황에 대해선 언급을 피했다. 이 전 단장의 ‘잠행’과 관련해 정치권 일각에선 ‘신체의 특정부위’를 수술 받고서 칩거중이라는 얘기가 나돌고 있다. 물론 정치적 낙담을 잠행의 가장 큰 이유로 꼽고 있다.
그나마 염 의원은 지난 6월 중순 “대통령 덕에 당선된 사람들이 대통령을 뒷받침해서 국정을 안정시키라는 국민의 요구를 무시하고 이제 와서 저 잘난 척만 하고 있다”며 오랜만에 언성을 높였다. “계급장 떼고 논쟁하자”고 말한 김근태 의원(현 보건복지부 장관) 등 당 지도부를 겨냥한 쓴소리였다.
그렇지만 예전만큼의 ‘정력적인 행보’는 보이질 않고 있다는 게 여권 관계자들의 전언. 그렇다면 염 의원이 다소 위축된 모습을 보이는 이유는 뭘까. 열린우리당 수도권의 한 중진의원은 “염 의원이 이끄는 ‘초선모임’이 당의 분열을 조장한다는 오해를 받았다. 그래서 청와대와 일부 중진의원으로부터 모임 중단을 요청 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 요즘 들어 ‘초선모임’ 활동이 전무한 것도 당 안팎의 제지 때문”이라고 말했다.
심지어 당 일각에서는 염 의원을 가리켜 ‘제2의 권노갑’이라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염 의원이 총선과 재보선 공천 과정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제2의 권노갑’이란 별칭 속엔 부정적 의미가 내포돼 있고, 당연히 염 의원으로선 달갑지 않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보니 요즘 더욱 신중한 행보를 보이고 있다는 게 여권 관계자의 추측.
여기에 인사 문제를 놓고도 청와대와 마찰을 빚은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대선과 총선 당시 노무현 후보와 염 의원 자신을 위해 발로 뛰었던 선거 캠프 사람들 가운데 아직도 자리를 잡지 못한 채 정치권을 배회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염 의원과 가까운 한 인사는 “염 의원은 총선 때 자신을 위해 지역구에서 선거 운동했던 사람들조차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염 의원의 힘이 크게 줄어들었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말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공기업 인사문제 등과 관련해서 청와대와 마찰을 빚는다는 얘기가 나돈다.
영호남 가교 역할을 하고 있는 두 명의 ‘왕특보’는 요즘 주춤거리고 있다. 예전만큼 어깨에 힘이 실리지도 않아 보인다. 그럼에도 여권에선 두 실세를 무시하지 못한다. 최근 일련의 정치적 좌절로 운신의 폭이 좁아졌다 해도 아직 두 사람은 노 대통령의 ‘좌(左) 동연-우(右) 강철’로 통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