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구석에 눌러 앉으니 만사가 편합디다”
▲ 안토니파(서산파) 전 보스로 알려진 안상민 씨는 현재 서산에서 이불가게를 운영하며 소시민으로 살고 있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바로 80~90년대 오직 주먹 하나로 서울의 조폭세계를 평정했던 ‘조직폭력계의 기린아’ 안토니파 보스 안상민 씨(50)의 출소 광경이었다.
고향인 서산에서 상경, 수년 만에 서울의 중심가인 강남과 종로, 명동 일대를 차례로 접수하며 ‘밤의 황제’로 군림했던 안 씨. 그는 1997년 봄, 반포 팔래스 호텔에서 수백 명의 ‘아우’들이 모인 자리에서 조폭 두목으로서는 전례 없는 ‘은퇴식’을 치르고 홀연히 조직을 떠났다. 벌써 11년 전의 일이다.
완전히 손을 씻고 고향에서 평범하게 살고 있다는 안 씨. 소문대로 과연 그는 새 삶을 살고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그는 무슨 일을 하며 어떻게 살고 있을까. 그리고 그는 조직세계에 대한 미련이 정말 없는 것일까. 지난 6일 서산으로 그를 찾아가 이 모든 궁금증에 대한 답을 들어보았다.
검찰과 경찰들이 ‘조폭’을 얘기할 때 가장 즐겨쓰는 말이 ‘걸레는 빨아도 걸레’라는 말이다. 조폭들의 ‘개과천선’을 절대 믿지 않는다는 의미지만 한편으로는 어둠의 세계에 몸담았던 사람이 손을 씻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나타내는 말이기도 하다.
안 씨는 이런 점에서 분명 주목할 만한 인물이다. 은퇴 후 모든 조직생활을 정리하고 낙향한 그는 여지껏 단 한번도 구설에 오르지 않은 채 조용히 살고 있다.
“서산 촌놈이죠 뭐. 하하.”
흰색 라운드 티셔츠와 반바지, 슬리퍼를 신고 나타난 안 씨는 그래도 서울에서 손님이 왔다며 재킷을 걸쳐 입었다. 수백만 원짜리 이탈리아 수제구두와 세계적인 디자이너의 정장, 수천만 원을 호가하는 명품시계를 즐겨차던 ‘보스’는 본인 말대로 ‘서산 촌놈’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아내가 사다준 싸구려 티셔츠를 입고도 뭐가 그리 좋은지 연신 싱글벙글이다.
“이게 편해요. 격식차릴 필요도 없고. 예전에는 ‘보스’로서의 체면과 품위를 지키느라 일부러 말도 잘 안하고 웃지도 않았어요. 장난도 못 치고. 하지만 그 생활을 접은 후 완전한 자유인이자 자연인이 됐어요. 이제 폼잡을 필요도 없으니까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살죠. 나를 아는 사람들이 그래요. ‘매서웠던 기운’이 많이 빠졌다고.”
하지만 눈매와 행동 하나하나에서 풍기는 보스의 카리스마는 여전하다. 심지어 느릿느릿하고 조금은 시골스러운 충청도 말투와 억양에서도 포스가 확 느껴진다. 무려 500명이 넘는 조직원을 거느리며 최전성기를 누릴 때 ‘새 삶’을 공언하고 낙향한 것에 대한 후회는 없을까. 안 씨는 이에 대한 대답에 앞서 당시의 화려했던 시절에 대해 짤막하게 언급했다.
“당시 내 승용차가 GM 올즈모빌 방탄차, 벤츠 500, 푸조 이렇게 세 대였어요. 80년대 중반에 현재의 웬만한 아파트 한 대 값이 넘는 승용차를 타고 다닌 거죠. 잘나간다는 두목들도 고작해야 국내 고급승용차나 고만고만한 외제차를 타고 다닐 때였는데 말이죠. 돈과 권력을 한 손에 거머쥔 ‘밤의 황제’였어요. 품위유지비로만 한 달에 수천만 원이 들어갔어요. ‘천하가 내 것’ 같았던 시절이었어요. 모두들 제 앞에 머리를 숙였죠. 업소 수입, 건설업체 입찰건 등으로 들어오는 돈만 해도 엄청났으니 당시 수입이야 말할 필요도 없죠. 세상 부러울 것 없었습니다.”
그랬던 그가 10년 넘게 시골에 파묻혀 ‘조용히’ 살고 있다. 그것도 매일 복잡한 시장골목을 들락거리면서 말이다. 가만있어도 굴러들어오는 돈을 펑펑 써가며 진시황제 못지않게 호의호식하던 시절이 그립지 않냐는 질문에 그는 엷은 미소를 띠며 이렇게 말한다.
“저도 인간인데 미련이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죠. 정말 너무 잘나갔으니까요. 더구나 젊었잖아요. 주먹 하나 믿고 거머쥔 ‘권력’이었는데…. 서산에 내려와서 한동안은 심적 갈등이 심했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생각나는데 미치겠더라구요. ‘이게 뭐냐. 천하의 안상민이가 이 촌구석에서 뭐하고 있나. 다시 올라갈까?’라는 생각도 수없이 했었죠. 밤잠을 못잘 정도였어요. 또 수많은 유혹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마음을 비운 지 오랩니다.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 흔들릴 수도 없는 이유가 있기 때문이죠.”
바로 그의 ‘아내’ 때문이었다. ‘밤의 황제’를 ‘서산촌놈’으로 눌러앉힌 사람이 바로 아내 배정화 씨(50)였다. 전직 보스 안 씨에게 있어 아내는 존경과 참회의 대상이다. 58년 개띠 동갑인 두 사람은 45년지기 친구이자 연인이며 동반자다.
강력한 카리스마와 자존심으로 살아왔고, 소시민으로 돌아온 지금도 그를 함부로 대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지만 안 씨는 아내 앞에서만큼은 ‘예스맨’이다. 직선적이고 입바른 소리를 잘하는 아내가 아무리 송곳 같은 아픈 말을 해도 안 씨의 대답은 무조건 ‘네~ 알았어요’ ‘네~ 그럴게요’다. 아내의 ‘잔소리’와 ‘명령’에도 인상을 쓰기는커녕 오히려 알아서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하고 ‘호출’이 오면 만사 제쳐놓고 달려간다.
아내 배 씨는 안 씨와 한 동네에서 같이 자란 소꿉친구. 10년 넘게 쫓아다닌 끝에 ‘간신히’ 부부의 연을 맺었다고 한다. 하지만 한 가정의 평범한 가장으로 살기에는 안 씨의 욕망이 너무 컸다. 아내는 성실하게 일해서 오순도순 살기를 원했지만 안 씨는 서울로 올라가 새로운 지역을 하나하나 ‘접수’하며 조직을 키워나가는 재미에 푹 빠져 버렸다.
“무려 22년 동안 아내를 내버려두고 객지생활을 했어요. 그렇게 따라다녀서 남의 집 귀한 딸을 붙잡아놓고 독수공방시킨 거예요. 보통 여자 같았으면 도망가고도 남았죠. 아니면 ‘잘나가는’ 신랑 따라 냉큼 서울로 올라와서 고급차 끌고 쇼핑이나 다닐 수도 있었겠죠. ‘서울에 같이 가자. 그럼 떨어져 살지 않아도 되지 않느냐’고 그렇게 설득을 해도 꿈쩍을 안했어요. ‘당신이 무슨 일 하는지 아는데 거길 왜 가냐’는 거였죠. 아내가 얼마나 독하냐면요. 제가 서울에서 조직생활할 때 한 달에 한 번씩 서산에 내려와서 생활비하라고 돈 봉투를 줬는데요, 그때마다 그걸 그냥 패대기쳐 버렸어요.”
사서 고생하는 아내를 이해할 수 없었다는 안 씨는 아내에 대해 얘기하면서 유독 ‘보통 여자가 아니니까 나랑 살았죠’라는 말을 많이 했다. ‘조직폭력배 보스의 아내’로 산다는 것이 평범한 여자의 삶이 아님은 확실하다. 실제로 아내는 천하에 두려울 것 없던 안 씨에게 대놓고 호통을 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 안상민 씨 부부의 이불 가게. 안상민 씨가 서울에서 ‘밤의 황제’로 군림하던 시절에도 아내는 그를 따라가지 않고 서산에서 억척스럽게 이불가게를 운영하며 두 아들을 키웠다. | ||
“그런 아내가 암에 걸렸어요. 끝내주게 곱던 여인네가 94년 말기암 판정을 받고 생사를 오가는 모습을 보니 다 제 탓이다 싶더라구요. 어찌나 허망하던지요. 조직생활이고 뭐고 회의가 느껴졌어요. 그래서 조직을 떠나기로 결심했어요. 남은 인생은 아내를 위해 살기로 작정한 거죠. 그러니 제가 아무리 지금 아내의 뜻에 따라 착실하게 살고 있다 해도 큰소리칠 입장은 아니지요.”
‘아내에 대한 속죄’. 안 씨는 조직생활을 청산한 이유에 대해 그렇게 말했다. 한번 ‘맛’을 보면 너무도 ‘달콤해서’ 절대로 발을 빼지 못한다는 조직의 세계에서 그를 끄집어낸 것은 결국 사랑의 힘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안 씨의 진심이 통했던 것일까. 아내는 10시간이 넘는 대수술과 힘겨운 투병생활 끝에 기적적으로 건강을 회복했다. 물론 몇 달마다 주기적으로 검사를 받고 상태를 체크해야 하지만 억척스럽고 강직한 아내는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시장골목을 떠나고 싶지 않다며 여전히 이불가게를 하고 있다.
건장한 아우들의 철통 호위를 받으며 가끔씩 벤츠를 타고 내려와 ‘세’를 과시하던 보스는 현재 아내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다. 매일 아침저녁 가게 셔터문을 여닫고 수시로 직접 이불 배달까지 하는 안 씨의 모습은 이제 제법 자연스러워 보였다.
“조직에서 손을 씻으려면 무조건 서울을 떠나야 합니다. 서울에 있으면 절대 불가능해요. 유혹이 너무 많거든요. 주변에서도 가만 놔두지 않고 여차저차하다보면 또 개입하게 되고 본의 아니게 억울한 일에도 휘말리게 되죠. 검·경의 감시에서 자유롭지 못한 입장이다 보니 결국은 어떤 일로든 꼬투리가 잡히게 되죠. 김태촌 형님이나 조양은 형님도 그런 케이스예요. 우리같은 사람들은 가슴에 ‘주홍글씨’를 달고 삽니다. 사실 저처럼 보스의 자리에서 가장 화려한 삶을 맛본 사람이 다 털고 서울을 떠나기란 쉽지가 않죠. 하지만 서울에 있으면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수가 없어요. 그런 면에서 촌구석에 묻혀사는 저는 만사 신경쓸 것 없이 편합니다. ‘얼마나 가나 보자’며 의심스런 눈초리로 지켜보던 사람들도 여기 내려와서 제 생활을 보고는 더 이상 뒷말을 않더라구요.”
하지만 안 씨는 현재의 평정을 찾기까지의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다고 고백한다. ‘보스’의 안부를 궁금해하는 아우들의 방문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아우들이 왔다갈 때마다 안 씨는 행여나 구설에 오르지는 않을까 전전긍긍했다. 그래서 데리고 있던 노총각 아우들의 결혼식을 끝으로 웬만한 경조사에는 참석하지 않았다고 한다. 심지어 지난해 대선배인 조일환 회장의 고희연 때도 얼굴만 비추고 급히 돌아왔다고 털어놨다. 물론 이 모두는 쓸데없는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함이다.
안 씨는 이날 ‘사람 사는 맛’에 대해 담담히 얘기했다. 기자를 가장 놀라게 했던 것 중 하나는 그가 타고 다니는 차량이었다. 이날 안 씨는 손수 자신의 애마인 흰색 모닝을 타고 다니며 기자일행을 에스코트했다. 아내의 호출을 받자마자 쏜살같이 시동을 거는 그의 입가엔 미소가 한가득이었다. 그리고 서산시내를 씽~ 돌아 금세 아내가 있는 시장까지 도착했다. 손수 운전을 하고 복잡한 시장골목길에 주차까지 척척 하는 그에게서 전직 보스의 모습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최고급 벤츠 타던 제가 경차 몰고 서산바닥을 신나게 헤집고 다닙니다. 보스체면이요? 하하. 처음에는 아우들이 그랬죠. ‘형님, 도대체 왜 그러시냐?’고요. 근데 재미있는 게 뭔지 아세요? ‘아우’들도 서산 시내에서만큼은 다들 저처럼 경차를 몰고 다닌다는거예요. 서울에서 내려온 애들도 지네들이 타고 온 고급차는 어딘가에 박아두고 경차 타고 나타나요. ‘큰형님’이 모닝 타는데 자기네들이 고급세단을 탈 수 있느냐는 거지요. 그 애들이 뭘 타고 다니건 저는 신경쓰지 않지만 제 입장을 생각해서 예의를 차려주니까 기특하긴 하지요.”
안락함과 화려함이 보장된 ‘보스의 사모님’ 자리를 거부한 이 ‘독한 여인’은 기자가 방문한 날도 이불가게를 지키고 있었다. 33도가 넘는 찜통더위에도 선풍기 한 대에 의존해서 가게 물건을 정성껏 매만지고 정리하는 그의 손길에서는 오랜 장사 이력이 그대로 묻어났다. 불쑥 얼굴을 들이대는 안 씨를 보자 얼굴에 함박웃음을 짓는 그의 아내. 안 씨의 옷 매무새를 매만져주는 모습이 무척이나 행복해 보인다. 그리고 말기암으로 힘든 수술과 투병생활을 거친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너무도 여리고 고운 모습이다. “남편으로서 요즘 안상민 씨는 솔직히 몇 점이에요?”라고 슬쩍 물어봤더니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말한다. “100점이죠!”
이 말에 신이 난 전직 보스는 체면도 버리고 한술 더 뜬다. “서산 최고의 미인이었죠. 제가 하도 고생을 시켜서 그렇지 젊었을 땐 진짜 예뻤어요. 제가 아무나 데리고 살았겠어요?”
이불가게를 나온 뒤 안 씨가 기자를 안내한 곳은 어느 냉면집이었다. 야외 공터에 간이 테이블을 놓고 옹기종기 모여 먹는 곳이었는데 고급 일식집이나 한정식집에 익숙할 법한 전직 보스는 음식점 사장이라도 되는 양 맛 자랑에 침이 마른다. 식사가 끝날 무렵 안 씨는 주방으로 슬쩍 가더니 냉면 1인분을 포장해달라고 주문했다. 그리고 멋쩍은 듯 말하며 웃는다. “우리 집사람 갖다 주려구요.”
얼음 육수가 녹기 전에 가야한다며 서둘러 모닝에 시동을 거는 안 씨의 표정에 뒤늦게 찾은 ‘보통사람의 행복’이 보이는 듯했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