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반 ‘끗발’ 얼마 못가더라
김대중(DJ) 정부 초대 비서실장을 지낸 김중권 전 실장. 그는 이종찬·한화갑과 ‘신주류 3각 편대’를 형성, 권력의 핵심이자 여당 대표를 역임하며 승승장구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 역시 여권 사정에 밝고 기획·실천력이 탁월하다며 그를 차기 대권주자감으로 낙점하는 분위기였다.
영광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영남 출신인 그는 지역적 한계를 극복하려다 결과적으로 무리수가 된 승부수를 뒀다. 지난 2000년 총선 옛 지역구인 울진·봉화에 출마해 줄곧 여론조사 1위를 기록하며 민주당 창당 이래 첫 영남권 현역 의원의 기대가 고조됐으나 불과 19표 차로 낙선하고 만다. 당시 김중권 후보 득표는 DJ계열 정당의 영남지역 후보 중 가장 높았지만 금배지 없이 대선 경선을 치르기는 역부족이었다. 2002년 노무현 후보가 호남지역 경선 1위를 차지하자, 그는 텃밭인 영남지역 경선을 치르지 않은 채 중도 사퇴하며 대권의 꿈을 접고 말았다.
노무현 정부에서 이명박·박근혜·손학규와 함께 잠재적 잠룡으로 입길에 올랐던 이는 정운찬 서울대 총장, 그리고 유시민 복지부 장관이었다. 한 쪽은 의뭉스러운 행보, 다른 쪽은 튀는 행보가 화를 자초했다.
재야에 머물며 최고 몸값을 기록하고 있던 정운찬 전 총장은 정치권 입문 여부를 두고 수차례 입장을 바꾸고 거취 결정을 유보했다. “야권에서 나를 ‘불쏘시개’로 이용하려 한다”, “열린우리당에서 거론되는 게 더 싫다”며 여야 모두 미온적인 태도를 보인 것이 패착이었다. 이후 이명박(MB) 정부 2년차 국무총리로 전격 임명되면서 가장 먼저 치고 나왔으나 이듬해 세종시 수정안 파문으로 사퇴하고 만다.
유시민 전 장관의 튀는 행보는 스스로의 발목을 잡았다. 2002년 대선 직전 개혁당을 창당한 뒤 노무현 후보를 지원해 당선에 공을 세운 것도, 정권 초반 ‘이라크파병동의안’에 반대표를 던지며 대통령에 맞선 것도 그였다. 유 전 장관은 정권 2년차에 진행된 연장 동의안에 대해서도 반대표를 행사했는데, 이후 “비가 올 때는 같이 맞아야 되지 않겠느냐”며 찬성으로 입장을 바꿔 곱절로 욕을 먹었다.
의리를 지킨 덕분인지 유 전 장관은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이후 오랫동안 야권에서 높은 대선지지율을 기록하기도 했다. 당시만 해도 ‘문재인 vs 안철수’가 아닌 ‘유시민 vs 손학규’ 구도였다. 하지만 민주통합당에 합류하는 대신 통합진보당을 택하면서 이후 대권의 꿈보다 내부 패권 다툼에 열을 올려야 했다. 유 전 장관은 지난해 2월 “너무 늦어버리기 전에 내가 원하는 삶을 찾고 싶어서 직업으로서의 정치를 떠난다”며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제2의 MB’를 꿈꿨던 오세훈 전 서울시장도 일순간 뜨거워졌다 차게 식어버린 잠룡이었다. 여권 정치인 가운데 젊고 신선한 이미지를 선점하며 주목받은 오 전 시장은 ‘디자인 서울’, ‘한강 르네상스’와 같은 자신만의 프로젝트를 무리하게 추진하다 여야 모두에 눈엣가시가 됐다. 그 결과, 한강 아라뱃길, 세빛둥둥섬과 같은 돌이킬 수 없는 오점을 남겼다.
MB 정부 2년차인 2009년 4월. 김상곤 전 경기교육감이 무상급식을 들고 나와 당선된 이후 정치권에 회자되기 시작하자 오 전 시장은 무상급식에 자신의 정치적 생명을 거는 모험수를 감행했다. 결과는 대권직행 카드인 서울시장직을 야권의 박원순 서울시장에게 넘기고 말았다.
김임수 기자 imsu@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