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기부 연출 윤태식 주연 추악한 ‘여간첩 조작’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수지 김 사건’의 시작은 지난 198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홍콩에서 만나 결혼하게 된 윤태식과 수지 김(본명 김옥분)은 1987년 1월 3일 돈 문제로 부부싸움을 벌였고 이 와중에서 수지 김이 죽고 말았다. 윤태식은 이를 은폐하기 위해 수지 김의 시신을 숨기고 싱가포르 북한대사관으로 도주해 망명을 시도한다.
하지만 북한 대사관 측은 윤 씨의 망명을 거절했고 다시 미국대사관에 망명을 신청했으나 역시 거절당했다. 미 대사관은 싱가포르 주재 한국 대사관에 윤 씨의 신병을 인계했고 윤 씨는 수지 김을 살해한 사실을 감추고 대사관에 파견돼 있던 안기부 요원에게 “아내는 북한 공작원으로 그와 함께 조총련계 공작원들에 의해 납북될 뻔했다가 탈출했다”고 거짓 진술을 했다.
당시 안기부 등은 윤 씨의 진술에 허점이 많다는 것을 알았음에도 국내 정치상황을 반전시키기 위해 이를 묵인하고 오히려 공안정국을 형성하는 데 적극 활용키로 한다. 안기부장이던 장세동 씨는 이런 사실을 보고받고 진상 발표를 보류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결국 안기부와 외무부 등은 이 사건을 북한의 공작원인 수지 김이 미인계를 써서 해외 주재 한국 상사원을 납치하려 한 대공사건으로 조작해 언론에 흘렸고 언론도 이 사건을 대서특필했다.
이후 살인자인 윤태식은 북한 납치시도를 피해 만행을 폭로한 반공투사로 극진한 대우를 받았다. 또한 윤 씨는 지문인식 기술을 개발해 패스21이란 회사를 세워 성공한 벤처기업인이라는 사회적 명성까지 얻게 됐다.
반면 살해당한 수지 김은 죽어서도 여간첩이란 불명예를 벗지 못했고 그의 일가친척들도 모두 간첩의 가족이란 이유만으로 사회적으로 따돌림을 당했다. 어머니는 실어증을 앓다가 화병으로 사망했으며, 술로 세월을 보내던 오빠는 교통사고로 죽었다. 큰언니는 정신병을 앓다가 변사체로 발견됐으며, 두 동생은 이혼당했다.
영원히 묻힐 것 같던 이 사건은 2000년 모 주간지 보도와 한 방송사 다큐프로그램에 의해 진실이 파헤쳐지기 시작했다. 수지 김의 가족들은 2000년 3월 “수지 김은 북한 공작원이 아니며 윤태식에 의해 살해당했다”고 주장하며 윤 씨를 서울중앙지검에 고소했고 검찰 수사 결과 사건의 진상이 하나 둘 드러났다.
2001년 10월 검찰은 윤태식을 살인과 사기혐의로 긴급체포했고 11월 그를 기소했다. 기소 당시 윤태식의 공소시효는 두 달도 채 남지 않았다. 법원은 2003년 5월 상고심에서 윤 씨에게 징역 15년 6월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결국 수지 김 사건은 북한 공작원에 의한 해외 한국 상사원 납북 미수사건이 아니라 국가안전기획부에 의해 철저히 은폐·조작된 사건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수지 김의 억울한 죽음이 세상에 밝혀지자 수지 김의 유족들은 부당한 공권력을 행사한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해 2003년 8월 14일 서울지방법원으로부터 ‘국가는 유족들에게 42억 원의 위자료를 지급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박혁진 기자 phj@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