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맛’ 넘보다 ‘날개’ 태웠다
▲ 회계부정사건으로 홍역을 치르고 있는 환경운동연합 활동가들이 지난 11월 6일 오전 서울 누하동 환경운동연합 정원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전현직 활동가들의 공금유용 사건에 대한 사죄의 인사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 ||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환경운동의 대부로 불리던 최열 환경재단 대표도 검찰에 구속될 위기에 놓였다. 역시 ‘공금횡령’이 문제가 되고 있다. 최 대표는 혐의에 대해 극구 부인하고 있지만 그가 기대하는 ‘반전’이 일어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특히 시민단체의 재정투명성 문제는 이미 몇 해 전부터 제기돼 왔던 것이었기에 이번 사건에 대한 시민단체 안팎의 시각은 ‘곪은 것이 드디어 터졌다’는 반응이다.
시민운동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그 어느 때보다 높다. 재정 투명성 문제뿐만 아니라 ‘시민 없는 시민운동’ ‘정치권력과의 유착’ 등 시민운동에 가해지고 있는 비판과 그 연유에 대해 취재했다.
시민단체 관련 신문에서 일해 온 한 기자는 시민운동의 가장 큰 문제를 ‘권력’과의 유착이라고 꼽았다. 여기에는 정치권력뿐만 아니라 금권(金權)도 포함된다.
“문민정부를 시작으로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 시절을 거치면서 시민운동이 어떤 형태로든 정치권력과 가까워진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시민단체가 내놓은 아이디어들은 정책에 반영되기도 하고 입법화되기도 하는데 논의되는 곳이 정치권 안이냐 밖이냐에 따라 그 결과가 다르게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외부에서 활동하던 시민단체들이 자신의 아이디어를 보다 현실화시키기 위해 정치권 내부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처음의 의도와는 달리 갈수록 순수성이 사라졌다. 지금은 시민단체를 정계에 진출하는 발판으로 삼는 사람들도 적지 않은 것 같다. ‘시민 없는 시민단체’라는 비판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 기자가 얘기했던 정치권력과의 유착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히는 것이 지난 1997년 이른바 ‘김현철 비디오테이프’ 사건이다
이 사건은 김영삼 정부 말기인 지난 1997년 당시 최대 시민단체였던 ‘경제정의실천연합(경실련)’을 존폐의 기로에 놓이게 했다. 이때 경실련은 문민정부에서 ‘소통령’으로 불리던 김영삼 전 대통령의 차남 현철 씨의 국정개입을 폭로하는 비디오테이프를 입수했다. 하지만 경실련은 이 비디오테이프를 공개하지 않았고 나중에 그 사실이 드러나 큰 후폭풍에 휩싸였다. 특히 당시 정권 고위층에는 경실련 출신 인사들이 상당수 있었고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정치권과의 유착설을 제기하며 경실련을 ‘정실련’으로 부르기도 했다.
시민단체나 운동가가 도덕성에 치명상을 입는다면 시민운동의 영향력은 그만큼 줄어들 수밖에 없다. 이 사건 이후 경실련은 예전의 명성을 회복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경실련 사건을 정치권력과 시민운동의 유착 사례로 꼽는다면 이번 환경운동연합의 공금횡령 사건은 시민운동이 금권에 무릎 꿇은 사례로 꼽힐 만하다. 성격은 다르지만 얼마 전 적정 절차를 거치지 않고 ‘농산물 친환경 인증서’를 불법으로 발급해 4억 3300만 원을 챙긴 환경시민단체와 정신지체아 등을 지원하기 위해 마련한 보조금을 횡령한 장애인단체도 돈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 경우라 할 수 있다.
시민단체 간사로 활동하다 지금은 NGO 대학원에 다니고 있는 한 관계자는 시민단체의 최대 목표 중 하나인 ‘재정자립’이 실제로는 상당한 모순이 있다는 것을 이번 환경운동연합 사건이 잘 보여주고 있다고 말했다.
“정부 지원금이나 기업 후원금 등 돈의 유혹에서 자유로우려면 일반 회원들을 대상으로 하는 모금이 원활히 이뤄져야 하는데 비대해진 시민단체를 지속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후원금을 모집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자연 재정적으로 한계에 부딪치게 되면 운동뿐만이 아니라 활동가 본인들의 생계도 위협받게 된다. 결국 그들의 시선은 정부나 기업 쪽으로 눈을 돌리게 되고 이마저도 이번 사건처럼 다른 용도로 사용될 가능성이 높아지게 된다.”
실제로 시민단체들이 가장 껄끄러워하는 것이 바로 재정내역 공개다. 여기에는 보수와 진보가 따로 없다고 한다. 현재 홈페이지를 통해 재정사용 내역 등 회계자료를 공개하는 시민단체는 손에 꼽을 정도다.
문제는 기업이나 정부와는 달리 도덕성을 생명으로 하는 시민단체는 이런 사건이 발생하면 그 존폐 자체가 흔들린다는 것이다. 경실련이 ‘김현철 비디오테이프’ 사건으로 뿌리부터 흔들렸던 것처럼 환경운동연합도 예외는 아니다. 현재 환경운동연합은 이번 사건 이후 이탈하는 회원수가 크게 증가했다고 한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시민단체 내부에서는 자성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일례로 한국시민단체네트워크가 13일 발표한 ‘시민단체 신뢰도 평가조사’에 따르면 ‘시민단체가 신뢰도 하락 등의 위기를 겪고 있다’는 의견에 동의한다고 답한 사람은 전체 응답자 200명 중 141명(70.5%)인 것으로 나타났다. 시민단체 내부에서도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다.
환경운동연합의 이번 횡령 사건을 타산지석으로 삼지 않고 계속해서 권력이나 돈 같은 ‘힘’을 가진 사람 혹은 기관에 기대고 대가로 타협을 한다면 시민운동은 어쩌면 영원히 시민들의 외면을 당할지도 모를 일이다.
박혁진 기자 phj@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