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미치고 팔짝 뛰게 만드는 그의 정체는?
▲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 ||
심리학자 폴 바비악과 로버트 D 헤어는 그들의 저서 <직장으로 간 사이코패스>에서 사이코패스가 전체 개체군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1% 정도라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 회사 직원 100명 중 한 명은 사이코패스라는 거다. 개방적이고 유연해 통제가 약한 회사에서는 자신의 정체를 숨기기 쉽다. 사이코패스로 들키기는커녕 도전적인 인재, 유능한 사원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신문사 편집기자인 정 아무개 씨는 전 직장에서 악명 높았던 동료가 사이코패스였다고 확신한다. 문제의 동료 L 씨는 평소에 도를 넘어서는 심한 악취를 풍기며 혼자 노래방에 가서 성적욕구를 해소한다고 공공연히 떠벌리고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회식자리에서 시비가 붙었다. 왜소한 체구의 L 씨는 더 왜소한 체구의 다른 동료 C 씨를 때려 입원하게 만들었다. 문제는 다음날. 아무런 심적 동요 없이 깔끔하게 이발을 하고 유유자적 출근한 L 씨를 보며 다들 혀를 내둘렀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농담을 건네며 인사를 했지만 피해자인 C 씨에게는 조용히 뒤에서 ‘고소하면 죽여 버린다’며 협박을 했다고 한다.
오로지 자기 자신, 가족만이 중요한 것이 사이코패스의 전형적인 특징.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사이코패스형 범죄자들은 피해자들의 가족을 걱정하기보다는 ‘아, 내가 이렇게 됐으니 부모님이 얼마나 창피하실까’를 먼저 생각한다는 것이다. 연쇄살인범 강호순이 자기 아들들을 걱정했던 것처럼.
정 씨는 “현재는 회사를 옮겨 L 씨의 자세한 소식을 접할 순 없다”면서 “하지만 전 직장의 상사로부터 L 씨를 왜 뽑았는지 후회된다는 말을 들었다”고 말했다. 권고사직을 종용했지만 L 씨는 요지부동. 오히려 그 회사에 ‘뼈를 묻을 것’이라는 발언을 해 상사를 골치 아프게 한단다.
사이코패스에도 급이 다른 두 종류가 있다. 바로 지적인 사이코패스와 무식한 사이코패스. 지적인 사이코패스는 반사회적인 행동을 거의 하지 않는다. 냉혈한의 모습을 철저하게 숨긴다. 그러다 한방에 뒤통수를 치는 대범함과 모략에 능한 전술을 구사한다. 반면 무식한 사이코패스는 자칫 ‘진상’으로 취급될 만큼 유치하게 동료 간 갈등을 유발한다.
광고회사 입사 2년차에 접어든 송 아무개 씨. 그는 소속 부서 K 팀장을 믿고 따랐다. K 팀장은 좋은 상사였다. 평소에는 엄하지만 타 부서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부하직원을 감쌀 줄 아는 포용력도 있었다. 자신만 믿고 따르라며 끝까지 함께 갈 뜻도 내비쳤다. 그러던 중 ‘절대 신뢰’의 벽이 와르르 무너졌다. K 팀장이 회사 내 주요부서로 옮겨가면서 송 씨만 빼고 전 팀원을 데려갔던 것. 한마디로 토사구팽. 그 주요 부서를 차지하기 위해 오래 전부터 은밀한 로비를 펼쳐왔던 팀장은 송 씨에게는 전혀 티를 내지 않았고 전략적인 차원에서 송 씨만 희생양이 되어 현 부서에 남게 했다. 이런 차갑고 냉정한 모습은 사이코패스의 필수요건이다.
같은 사이코패스형이지만 B 씨(여)는 격이 낮은 경우다. 섬유회사에 다니던 최 아무개 씨(여)는 평소 자신에게 지나칠 정도로 잘해주는 B 씨가 부담스러웠다. 자기 자랑이 많고 허풍을 일삼는 그녀가 못미더웠던 것. 그래도 자신에게는 친절한지라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지내왔다. 그러다 점심시간에 다른 동료와 최 씨가 따로 나가 밥을 먹고 오자 B 씨가 돌변했다. 최 씨가 자신만의 사람이길 원했지만 여의치 않자 앙심을 품은 것. 이후 상사는 물론이고 동료들에게도 최 씨의 흉을 보며 이간질을 일삼았다. 선배라는 이유만으로 업무상으로 괴롭히는 일도 다반사였다.
자신의 시도가 통하지 않으면 한순간에 공격적인 자세로 타인을 괴롭히는 것이 ‘무식한 사이코패스’의 행동 특징이다. 결국 최 씨는 견디다 못해 이직을 택했다.
사이코패스가 부하직원일 경우도 썩 좋은 것은 아니지만 정말 위험한 것은 상사가 사이코패스일 경우다. 게다가 ‘지적’인 부류에 속할 경우 당하는 부하직원은 ‘죽음’이다. IT회사에 다니는 진 아무개 씨(여)는 요즘 스트레스로 폭발 직전이다. 상사의 은밀한 성추행과 접근에 이렇다 할 대응을 못하고 있기 때문.
영업팀장 N 씨는 나이답지 않게 옷매무새도 깔끔하고 평소 행동도 ‘젠틀’하다. 능력도 뛰어나 회사 내에서 실세로 통한다. 그의 여성편력에 대해 소문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겉으로 봐선 전혀 그런 티가 나지 않는다. 진 씨는 입사 후 첫 전체 회식에서 충격적인 일을 당했다. 술자리에서 N 팀장이 진 씨의 가슴을 움켜쥐었던 것. 진 씨는 “너무 놀라 제대로 대응도 못하고 그 자리를 피했다”며 “그때 강하게 대응하지 못했던 것이 실수였다”고 후회하고 있다.
진 씨가 후회하고 있는 이유는 이후에도 N 팀장의 뻔뻔한 행동이 계속됐기 때문이다. N 팀장은 매일 같은 시간에 문자 메시지를 보내기 시작했고 마치 애인처럼 굴었다. 일관되게 깍듯한 행동과 차가운 답변을 보냈지만 소용없었다. 성추행 사실 하나만으로도 조직에서 퇴출은 물론 형사처벌을 받아야 마땅한 N 씨는 겉으로는 신사적인 행동과 실력으로 승승장구하고 있다. 살인이나 강간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잔인성과 냉혈성은 단순한 성추행범을 넘어 사이코패스급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이러한 사이코패스형 상사는 배려라는 개념이 전혀 없으며 부하직원의 성과를 가로채는 것에도 능숙하다. 회사는 자신의 권력과 즐거움과 부를 위한 수단일 뿐이다. 회사 내 사이코패스는 때로 쉽게 드러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물론 앞에 열거한 사람들이 사이코패스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당해본 사람들은 안다. 퇴출시킬 수 없다면 ‘그래 저 놈은 사이코패스야. 내가 참고 피해야지’라는 위안이라도 있어야 내가 ‘사이코’가 되지 않고 회사를 다닐 수 있다는 사실을.
이다영 프리랜서 dylee2@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