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돈 세탁부터 배달까지 ‘논스톱’
특히 박 회장과 문제가 된 정치인들의 경우처럼 해외에서 달러로 돈을 주고받을 경우 달러화 가치가 커서 원화보다 전달하기 쉽고, 보안을 유지하기도 더 용이하다는 점에서 새로운 금품 제공 방법이라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이번 사건을 수사 중인 검찰은 베트남이란 나라의 지역적 특성을 주목하고 있다. 잘 알려져 있듯 베트남은 우리나라 기업인들이 일찌감치 진출해서 ‘대한민국’이란 브랜드가 비교적 깊게 뿌리를 내린 나라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을 비롯해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 등은 이미 현지에서도 잘 알려진 기업인들이다. 기업인들이 베트남에 진출하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고 한다.베트남의 값싼 노동력이나 낮은 세금 등이 기업들을 잡아끄는 ‘보이는 매력’이라면, 자금세탁이 용이하다는 점이나 은행의 보안이 철저하다는 점은 기업을 유혹하는 ‘보이지 않는 장점’이라는 것.
후자의 경우 박연차 게이트로 인해 조금씩 드러나고 있다는 게 검찰 주변의 목소리다.박연차 게이트를 수사하는 검찰은 이광재 민주당 의원을 비롯해 베트남을 한 번이라도 방문한 의원들을 눈여겨보고 있다.
구속된 이광재 의원은 2006년 8월 박 회장의 초청으로 베트남 호치민시에 있는 해외 공장을 방문했다. 그곳에서 박 회장으로부터 5만 달러를 받은 이 의원은 자신의 보좌관 원 아무개 씨에게 돈이 든 가방을 들게 하고 귀국길에 올랐다.
그러나 호치민 공항 검색대를 통과하려는 순간 현지 세관당국의 제지를 받았다. 베트남에서는 7000달러 이상의 돈은 해외로 갖고 나갈 수 없게 돼 있었던 것.
또한 검찰은 지난 2004년 국회 유력 인사를 포함한 의원 몇 명이 캄보디아, 말레이시아를 포함해 4개국 순방길에 올랐다가 일정에도 없는 베트남 방문을 했다는 사실에도 주목하고 있다.
당시 박 회장은 직접 호치민 공항까지 나가 이들 의원들을 마중했고, 이들 의원들은 태광실업 공장을 둘러본 후 박 회장에게 작은 선물(?)을 받고 한국으로 돌아온 것으로 알려졌다.
베트남은 박연차 게이트 때문에 로비 장소로 주목받게 됐지만 사실 일부 기업인들에게는 이미 오래 전부터 친숙한 곳이었다.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다.잘 알려진 것처럼 김 전 회장은 베트남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존경받는 기업인이다.
현재까지도 베트남 국무총리의 경제자문역을 맡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 전 회장의 은닉재산이 베트남에 있다는 루머가 끊이지 않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고 한다.박연차 회장도 베트남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을 정도로 영향력이 있는 인물로 꼽힌다.
이광재 의원의 보좌관이 공항에서 달러를 들고 나오다가 적발됐지만 무사히 귀국길에 오른 것도 박 회장의 영향력 덕분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박 회장은 호치민 시장과는 호형호제하는 사이로 알려져 있다.
야당 유력 정치인의 재산관리인으로 알려져 있는 A 회장도 베트남에서 내로라하는 기업인이다. 90년대에 베트남에 진출한 그는 현재 베트남 IT 업계의 거물이 됐다. 그는 현지에서 학교 기증사업 등 자선사업을 통해 좋은 이미지를 많이 쌓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이 회사의 돈이 베트남에서 줄줄 새고 있다는 얘기도 들린다.
국내 최대 무기중개업체인 모 회사의 B 회장도 베트남과 연관이 깊다.이 회사는 베트남 경찰 등에 각종 무기 등을 납품하고 있다. B 회장 역시 전 정권에서 급성장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그렇다면 기업인들이 이처럼 베트남을 선호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베트남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 한 중소기업 사장은 베트남은 자금세탁이 쉬운 나라라고 말했다. 기업인들에게 스위스, 홍콩 등이 조세피난처라면 베트남은 일종의 자금세탁처라는 것.
국내 회사의 자금을 해외투자 명목으로 베트남 현지 법인에 투자한 후 이를 손실처리 해버리면 자금추적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이 과정에서 각종 검은 돈이 만들어질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베트남 은행들의 보안성이 높다는 점도 기업인들이 베트남을 선호하는 이유라고 한다. 앞서의 중소기업 사장은 “베트남 은행의 세이프티 박스(Safety box:은행금고 내부에 있는 개인금고)에 100달러짜리 묶음을 넣으면 정확히 100만 달러가 들어간다.
이 박스에 열쇠가 있는데 열쇠를 가져오면 신분과 이유를 묻지 않고 금고 문을 열어준다. 돈을 넣은 사람이 열쇠를 가져가 돈을 받을 사람한테 열쇠를 넘겨주면 끝이다. 보안이 철저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노출될 가능성도 거의 없다.
한마디로 검은 거래를 하기엔 이보다 좋을 수 없는 시스템이다. 베트남을 방문한 정치인들도 이런 식으로 돈을 전달받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또한 베트남에서는 한국 기업에 대한 이미지가 나쁘지 않고 중국 정부처럼 간섭이 심하지 않기 때문에 거리는 중국보다 조금 멀어도 편리한 점이 많다고 한다.
결국 이런 점들 때문에 ‘검찰이 박 회장을 만나기 위해 베트남을 방문했던 정치인들을 수사선상에 두고 있다’는 얘기가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있는 것이다.베트남을 방문했던 몇몇 정치인들이 검찰의 칼끝이 언제 자신을 향할지 몰라 전전긍긍해 하고 있는 이유다.
박혁진 기자 phj@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