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교사를 하는 제자와 얼마 전에 제천 금수산을 걸었다. 수놓은 듯 아름다운 단풍을 눈으로 보며 두런두런 얘기하고 걷는데, 그녀가 이런 얘기를 한다.
“우리 고등학생들은 입시에 도움이 되지 않는 어떤 일도 시간낭비라고 생각해요.”
입시를 위한 공부, 취업을 위한 공부, 승진을 위한 공부…. 쓸모없는 공부는 어떤 공부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 어찌 창의적일 수 있겠는가. 쓸모없는 나무라야 산을 지키는 법인데.
그리고 또 의문이 든다. 쓸모 있음과 쓸모없음을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남의 쓸모에 맞춰 결정하는 사람들이 어찌 주인의 삶을 살 수 있을까, 하는. 남의 비위에 맞춰 ‘나’의 쓸모를 결정하는 것은 주인의 삶이 아니라 종의 삶이다.
쓸모없는 나무의 쓸모 있음을 얘기하는 경전은 <장자>다. 제자 혜시가 크기만 했지 줄기는 울퉁불퉁하고 가지는 꼬여 어떠한 목수의 시선도 받지 못하는 나무 얘기를 하자 장자가 이렇게 말한 것이다.
“지금 당신에게 큰 나무가 있는데 그 나무가 쓸모없어 걱정된다면, 그것을 무하유(無何有) 마을이나 끝없이 너른 들판에 심어 놓고 그 옆에서 하는 일 없이 거닐거나 그 아래에서 유유자적하며 낮잠이라도 자는 것은 어떻습니까. 그 나무는 도끼에 찍힐 일도 없고 누구에게 해를 당할 일도 없으니, 쓰일 곳이 없다 해서 어찌 마음 졸이고 괴로울 일이겠습니까.”
장자다운 혜안 아닌가. 그 장자는 쓸모없음의 쓸모 있음에 대해서만 말한 것이 아니다. 장자가 어느 날 친구의 집을 방문했더니 친구가 기뻐하여 종에게 거위를 잡으라고 명령했다. 마침 거위가 두 마리였는데, 한 마리는 잘 우는 거위였고, 또 한 마리는 울지 못하는 거위였다. 당연히 울지 못하는 거위가 밥상에 올라왔다. 제자가 물었다.
“어제 산중의 나무는 쓸모없었기 때문에 천수를 다할 수 있었고, 지금 주인집 거위는 쓸모없었기 때문에 죽었으니 선생께서는 장차 어디에 몸을 두시겠습니까.”
장자가 뭐라고 했을까. 장자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쓸모 있음과 쓸모없음의 사이에 머물 것이다!”
쓸모 있음과 쓸모없음의 사이에 머물겠다는 장자의 말을 자꾸 곱씹게 된다. 남의 쓸모에 따라 살지 않겠다는 의지이므로. 남의 쓸모만 쫓아가는 자는 종이다. 주인은 스스로 쓸모 있음과 쓸모없음을 정한다.
이주향 수원대 교수
※본 칼럼은 일요신문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