홉스의 말대로 법정 안은 만인이 만인에 대해 늑대가 되어 물어뜯는 지옥이다. 분노와 분노가 부딪치고 진실과 논리 대신 거짓이 가득하다. 그런 쓰레기 더미 속에서 판사가 진실을 담은 판결을 쓰기가 쉽지 않다. 소송을 많이 해본 한 사람이 내게 이렇게 재판을 정의했다. 누가 거짓말을 더 잘하느냐의 싸움이고 판사는 그럴듯한 논리를 가진 거짓말을 손들어 주는 거라고. 현실을 정확하게 본 측면이 있다.
얼마 전 점심시간 법원 앞 법률사무소들이 들어차 있는 빌딩에서 불이 났다. 창으로 검은 연기가 치솟고 소방차가 출동해 인근도로가 마비됐다. 불만을 품은 의뢰인이 변호사사무실에 석유를 붓고 불을 지른 것이다. 내가 잘 아는 변호사였다. 판사 시절 그는 공정하고 엄격한 법관이었다. 변호사가 되어서도 그의 올곧은 성품은 변한 것 같지 않았다. 그런 그가 그런 피해를 당하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의 사무실의 모든 사건기록들이 불타버렸다.
분노를 삭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자기의 불행이 모두 남의 탓이다. 사회와 정부의 책임으로 돌린다. 존경할 만한 권위도 사라진 사회다. 대통령에게도 쥐새끼라고 막말을 해 댄다. 시위대가 설득을 하러온 총리와 장관을 감금하고 협박을 했다. 삭이지 못한 분노가 봄날 황사같이 가득 차 있다. 모두 다 “어떻게 해 봐”라고만 할 뿐 그 해결을 위해 첫걸음을 떼는 사람이 없다.
얼마 전 세상이 왜 이러냐고 분노하는 40대를 봤다. 60대의 나는 세상이 너무 감사하고 아름답다고 했다. 그가 이유를 물었다. 내가 자라던 1950~1960년대의 환경을 얘기해 주었다. 세계에서 꼴찌인 가난한 나라였다. 판잣집과 쓰레기 천지였다. 주민등록증 하나를 떼러가도 뇌물을 주어야 하고 지나가는 경찰의 독사눈에 얼어붙을 것 같았다. 봉지쌀에 연탄 한 장씩 새끼줄에 꿰어 가지고 가 하루를 생존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지금 같은 세상이 오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고 했다. 미국유학을 다녀온 그는 내 말을 듣더니 “아, 환경과 잣대에 따라 다른 거군요”하면서 수긍하는 것 같았다.
울분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지혜를 갖추어야 한다. 분노의 해소를 외부에서 구하면 지옥이고 안에서 얻으면 천국일지도 모른다. 광야에서 원망하고 분노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모세는 율법을 선언했다. 율법은 함께 살 수 있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사회적 합의가 담긴 판례 같다는 생각이다.
소송이 늘어나는 걸 거꾸로 사회적인 인프라 구축의 토대로 삼으면 어떨까. 법관들은 무엇이 정의인가를 고심해서 판결문을 작성해야 한다. 함박눈이 내려 세상이 은세계가 되듯 재판마다 작은 정의가 쌓여 분노가 아닌 법과 원칙이 세상을 덮게 했으면 좋겠다.
엄상익 변호사
※본 칼럼은 일요신문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