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행 후 만세 사진… ‘비정한 가장’ 헉!
영화 <임신 36개월>의 한 장면.
초혼에 실패한 이 아무개 씨(45)는 전처와의 사이에서 난 초등학생 딸을 혼자 키웠다. 이 씨는 딸이 자라면서 점점 아이 엄마의 빈자리가 크다는 것을 느꼈다. 이 씨가 캄보디아인 부인 A 씨(25)와 결혼을 결심한 것도 그 즈음이었다. 이 씨는 지인의 소개로 만난 A 씨와 2008년 결혼식을 올렸다.
충남 금산군에서 생활용품점을 운영하던 이 씨는 넉넉한 형편은 아니었지만 그럭저럭 살림을 꾸려나갔다. 남편만 믿고 만리타향으로 시집온 A 씨도 이 씨 전처소생의 딸을 친딸처럼 보살폈다. 2009년에는 이 씨와 A 씨 사이에 둘째 딸이 태어나기도 했다. 그리고 올해 초 부인 A 씨는 이 씨에게 또 한번 임신 소식을 알렸다. 올해가 가기 전 이 씨 가족은 다섯이 될 예정이었다.
단란해 보였던 이 씨의 가정에 그림자가 드리운 건 지난 8월 23일이었다. 이 씨는 이날 새벽 3시 40분께 경부고속도로 하행선 천안삼거리 휴게소 인근(부산 기점 335.9km 지점)에서 스타렉스 승합차로 고속도로 갓길을 운전하다 비상주차대에 주차된 8t 화물차를 들이받았다. 이 씨와 부인 A 씨가 탄 차량은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특히 화물차를 그대로 들이받은 조수석은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파손됐다. 이 사고로 안전벨트를 맨 이 씨는 갈비뼈를 다치는 데 그쳤지만 안전벨트를 매지 않고 조수석에 탑승했던 부인 A 씨는 그 자리에서 숨지고 말았다. 숨진 A 씨는 임신 7개월째에 접어든 상황이라 안타까움을 더했다.
경찰조사에서 남편 이 씨는 자신의 졸음운전과 부주의로 부인과 뱃속의 아이를 잃었다며 눈물을 보였다. 이 씨도 갈비뼈를 다치는 부상을 당해 부인과 뱃속 아이의 장례식을 끝내고 곧바로 병원에 다시 입원을 해야 했다.
그런데 경찰 조사과정에서 단순 교통사고로 볼 수 없는 정황이 하나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유독 조수석만 크게 부서진 걸 수상히 여기던 경찰은 조사과정에서 숨진 부인 A 씨의 혈액에서 수면유도제 성분이 검출됐다는 것을 확인했다. 아이의 건강을 위해 약물복용을 극도로 자제해야 하는 임신 7개월의 임산부가 수면제를 복용했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사실이었다.
의심스러운 부분은 또 있었다. 이 씨가 부인 A 씨 명의로 생명보험 26개를 가입한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이 씨는 A 씨와 결혼한 직후인 2008년부터 지난 4월까지 무려 7년간 꾸준하게 본인과 가족 명의로 보험에 가입했다. 이 씨가 매달 내는 보험금만도 910만 원에 달했다. 이 가운데 부인 A 씨 명의로 된 보험이 26개에 달했다. 이 씨는 부인 명의의 보험료로 매달 360만 원을 납부했다. 부인 A 씨의 명의로 가입된 보험 중에는 A 씨가 사망할 경우 30억 원을 받을 수 있는 생명보험도 포함돼 있었다.
천안동남경찰서 관계자는 “형편이 넉넉하지 않았던 이 씨가 매달 고액의 보험료를 납부할 수 있었던 방법은 대출이었다”며 “이 씨는 매달 1000만 원에 달하는 보험료를 내기 위해 보험약관대출을 통해 3억 원가량을 받았다. 대출 받은 돈은 모두 보험료 납입에 사용해 통장잔고도 남아있지 않은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사고현장을 보도한 뉴스 방송 화면 캡처.
남편 이 씨는 ‘졸음운전’이었다며 범행을 부인했지만 경찰은 국립과학수사연구원과 도로교통공단 등과 합동 수사를 통해 이 씨가 졸음운전을 했다는 주장이 거짓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경찰이 졸음운전이라는 이 씨의 주장을 믿지 않은 이유는 이 씨가 졸음운전자들이 보이는 주행과는 다른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이 씨는 사고지점 800m 전에서는 커브길까지 무사히 통과했다. 졸음운전자들이 커브길을 주행할 때는 여러 번 핸들을 조작하기 때문에 무사히 통과하기가 쉽지 않다. 이 씨는 사고지점 400m 전부터 갑자기 상향등을 켜고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갓길에 세워둔 8t 트럭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전속력으로 트럭을 향해 달리던 이 씨는 사고지점 40m전부터 수차례 핸들을 조작했다. 자신이 졸음운전을 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계산된 연출이었다. 충돌직전 수차례 핸들을 조작하던 이 씨는 결국 만삭의 부인이 타고 있던 조수석 쪽으로 비상주차대에 서있던 트럭을 들이 받았다. 결국 조수석 부분은 종잇장처럼 구겨졌고 이 씨가 탑승했던 운전석은 큰 파손을 피했다.
이 씨가 보험금을 노리고 고의적으로 교통사고를 낸 것이라는 정황은 또 있었다. 아내의 장례를 치르고 병원에 입원한 이 씨가 환자복을 입고 만세를 하는 사진을 스스로 핸드폰으로 촬영한 것이다. 얼마 전까지 자신의 실수로 아내와 뱃속의 아이가 죽었다며 괴로워하던 이 씨와는 상반되는 모습이었다. 이 사진은 삭제돼 있었지만 경찰이 압수된 이 씨의 핸드폰을 조사하면서 복원해 냈다.
동남경찰서 관계자는 “이 씨가 처음부터 보험금을 노리고 A 씨와 결혼한 것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이 씨는 졸음운전을 해 사고가 났고 아내를 죽이려는 의도는 없었다며 혐의를 부인하는 상태다. 하지만 국과수나 도로교통공단 등과 합동 조사를 통해 나온 증거를 토대로 이 씨의 혐의를 입증하는 데 어려움은 없어 구속영장을 신청했다”며 “이번 사건의 경우 오랜 시간 치밀한 계획 아래 이뤄졌을 가능성으로 보아 죄질이 나쁘다고 할 수 있다. 한 사람 앞으로 여러 개의 보험이 가입돼도 보험사간 정보 공유가 이뤄지지 않는다. 그런 부분이 개선되지 않으면 이런 범죄가 또 다시 발생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눈 먼 돈 앞에 자신의 부인은 물론, 그녀의 뱃속에서 탄생을 기다리고 있던 아이까지 죽이는 살육부정은 그렇게 끝이 났다.
배해경 기자 ilyohk@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