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침없는 우승 질주… 그 할아버지에 그 손녀
풋풋한 16세 소녀가 일본 여류 바둑 판도를 뒤흔들고 있다. 후지사와 리나 2단은 ‘괴물’ 후지사와 슈코 9단(작은 사진)의 친손녀다.
후지사와 2단이 누구인가. 올 2월 중국 장쑤(江蘇)성 장옌(姜堰시)에서 열린 제4회 황룡사쌍등배 한-중-일 여자 단체전에 일본 2장으로 출전, 중국 선봉 쑹룽후이(송용혜) 5단의 4연승을 가로막는 것으로 세계무대 데뷔전에서 합격점을 받은 바로 그 소녀다. 일본에는 한-중에 대적할 만한 여자 기사가 없다고 보고, 일본 팀을 전혀 경계하지 않던 사람들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뿐인가, 사람들은 그 소녀가 바로 지난날 독창적 품격의 기예와 파격의 기행으로 바둑팬들의 심금을 울렸던 20세기 바둑의 전설, ‘괴물’ 후지사와 슈코(藤澤秀行) 9단의 친손녀라는 사실에 또 한 번 놀랐다.
“몇 년 전, 2010년에 입단했다는 얘기는 들었다. 11세 6개월. 일본 여자 기사 중에서 최연소기록인 데다가 후지사와 기성의 손녀이고, 아빠도 프로기사여서 기대를 했는데, 그 후에 별로 소식이 없어서, 그게 아니고, 그저 그런 정도인가 했다. 하긴 예전과 달리 최연소 입단기록 같은 게 요즘은 그다지 의미가 없다. 요새는 10대 초반에 입단하는 바둑 천재들이 어디 한둘인가. 문제는 입단 후 어떻게 성장하느냐다. 그런데 드디어 오늘 나타났다. 우리는 모두 리나 할아버지의 열렬한 팬이었다. 리나 아빠에 대해서는 별로 아는 바가 없지만…^^(후지사와 가즈나리 8단이 아빠다).”
이에 앞서, 후지사와 2단은 몇 달 전 6월에 제1회 회진중앙병원배에서 오쿠다 아야 5단(26) 을 꺾고 우승했다. 15세 9개월, 일본 여자프로바둑 사상 최연소 타이틀 획득 기록이다. 무카이 5단과 오쿠다 5단은 요즘 세계여자대회 단골 일본대표로 얼굴이 자주 보인다. 여자 기사 중에서는 손꼽히는 강자다.
회진중앙병원배는, 타이틀 이름만큼이나 독특한 기전이다. 본선 토너먼트 입장권은 8매이고, 결승은 단판인데, 제한시간이 각자 5시간으로 빅3처럼 이틀에 둔다. 우승 상금 700만 엔. 여류본인방은 580만 엔이고, 여류명인과 여류기성은 똑같이 500만 엔이니, 상금으로 말하자면 회진중앙병원배가 실질적인 여자 프로기전 서열 1위이고 여류본인방이 2위인 셈이다. 우리 여자 기전 우승 상금이 1000만~1200만 원인 것에 비긴다면 500만 엔, 700만 엔은 크다. 게다가 너도나도 빨리빨리, 속기, 속기 하는 시대에 그게 꼭 좋은 것은, 옳은 것은 아니라는 듯, 시대의 흐름에 저항하듯 복고풍의 이틀바둑을 들고 나왔으니 만만치 않다. 그를 통해 후지사와 2단 같은 재목들이 계속 등장하기를 바란다.
일본에 건너가 후학 양성에 힘을 쏟고 있는 홍맑은샘 2단(오른쪽)이 후지사와 리나 2단의 스승이다.
어쨌거나 현시점에서 말하자면 후지사와 2단이 서열 1~2위 타이틀을 석권한 것인데, 다만 그러니 이제 후지사와 2단이 1등이라고 단언하기는 아직은 좀 이른 것이 셰이민 명인-기성과의 정면승부가 아직 없었기 때문이다. 셰이민의 경력은 실로 화려 찬란하다. 2006년 제8기 여류최강전 우승이 첫 타이틀이었는데, 17세 1개월, 당시로서는 여자기사 사상 최연소 기록이었다. 이듬해 17세 11개월로 역시 사상 최연소로 제26기 여류본인방에 취임했고, 2012년 제31기까지 6연패하다가 32기 때 무카이에게 빼앗겼다. 그걸 이번에 후지사와가 빼앗은 것.
셰이민은 또 2008년에는 제20기 여류명인을 쟁취했고(이것도 사상 최연소), 2014년 올해 26기까지 무카이, 오쿠다 등의 도전을 뿌리치면서 7연패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2010년에는 제13기 여류기성에 올라 올해 17기에 이르는 동안 15기 때 한 번을 빼고 네 번을 제패했다. 3대 여류기전에서만 17회 우승의 대기록을 세우고 있고, ‘명예 여류본인방’과 명예 ‘여류명인’ 칭호를 이미 따놓았다. 일본에서는 한 타이틀을 5연패 이상 하면, 이후 타이틀에서 물러나면 ‘명예OO’로 불러준다. 과연 지금 셰이민과 후지사와가 맞붙는다면?
“관록이나 노련미에서는 당연히 셰이민이겠지만, 5 대 5로 본다. 내년에 만난다면 후지사와에게 걸겠다. 셰이민은 어느덧 중천을 지난 해, 후지사와는 뜨는 해 아닌가. 나이도 25세와 16세. 과거의 사례를 보거나 요즘 추세로나 후지사와가 6 대 4 정도로는 무조건 유리할 것이다. 그리고 이제 한-중-일 여자바둑은 18세 최정, 17세 위즈잉, 16세 후지사와의 각축이 될 것으로 보인다” 평자들의 얘기다.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후지사와는 홍맑은샘(33)의 제자다. 아마 정상급의 실력이었는데도 입단 운이 따르지 않자 과감히 일본에 건너가 2005년에 바둑도장을 열어 활동을 시작했고, 2009년에 드디어 관서기원에서 입단을 꿈을 이룬 홍맑은샘 2단. 도쿄 이치가야(阿佐ケ谷)에 있는 ‘홍도장(洪道場)은 벌써부터 명문 바둑도장으로 발돋움해 있다. 프로기사 12명을 배출했다. 전 세계 20세 미만의 신예들이 경쟁한 제1회 글로비스배 세계바둑U-20에서 예상 밖으로 한-중의 신진정예를 따돌리고 우승, 일본 신예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킨 이치리키 료 7단(17)을 비롯해 90년대 생 풋풋한 일본 청년기사들 중에 최근 농심배 등에서 일본 대표로 출전하는 실력자들이 대개 홍도장 출신이다. 현재 35명 소년들이 일본 바둑 재건을 꿈꾸고 있다.
“리나가 여섯 살 때 우리 도장에 왔습니다. 10여 년 같이 공부하다보니 이제는 제자라기보다 막내 여동생 같고, 딸 같고 그렇습니다. 공부를 열심히 합니다. 입단 후 향상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있습니다. 다음 목표는 여자 세계대회입니다. 기대하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이광구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