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문의 뭉칫돈’ 사정기관들 본체만체
▲ CJ 그룹 본사 | ||
항소심 재판부는 원심에서 인정된 이 씨의 혐의에 대해 대부분 무죄판결을 내렸다. 특히 재판부는 살인교사 혐의에 대해서는 의심할 부분은 있지만 입증책임이 있는 검찰 측의 소명이 부족했다고 지적했다. 검찰 수사의 부실함을 꼬집은 셈이다.
이날 재판부의 판결에서 특히 눈에 띄는 대목은 이재현 회장의 차명재산에 대한 부분이다. 재판부는 피고인 이 씨가 이 회장 차명자금 중 170억 원을 임의로 사채업자에게 빌려줘 배임·횡령을 저지른 혐의와 관련해 이 회장 차명재산 규모가 수천억 원 이상에 이를 수 있다고 언급해 주목을 끌었다.
1심 재판부는 이 씨가 운용했던 자금 규모를 537억 원 정도로 봤지만 항소심에서는 이 씨가 본인이 관리하던 자금 규모가 수천억 원에 이른다고 진술했다는 것이다. 1심 재판부와 2심 재판부가 공소 사실 파악에 이렇게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은 드문 일이다. 2심 재판부가 원심 판결을 백팔십도 뒤집자 사법부 주변에서는 검찰 수사 과정에 대해 고개를 갸우뚱하는 이들도 늘고 있다.
이재현 회장의 차명재산과 관련한 의혹들을 짚어봤다.
2008년 11월 이재현 CJ그룹 회장의 개인 자금을 둘러싼 살인청부 의혹 사건을 수사했던 경찰은 이 회장이 그룹 재무팀을 통해 운용한 차명재산이 380억 원에 이른다는 잠정 결론을 내렸다. 경찰은 지난 2006년 5월부터 작년 3월까지 그룹 전직 자금부장 출신인 이 아무개 씨가 조직폭력배 출신 박 아무개 씨와 거래한 내역을 추적한 결과 이 씨가 모두 380억 원을 집행한 사실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당시 경찰은 CJ그룹과 이 회장이 주식을 차명으로 관리한 것에 대해 조세포탈 혐의를 적용하기로 하고 국세청에 ‘조세포탈이 성립하는지 여부 및 정확한 포탈 세액을 확정해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차명재산 논란이 불거지자 이재현 회장 측은 ‘선대인 이병철 회장으로부터 상속받은 돈’이라고 밝히며 관련 세금을 납부한 바 있다.
경찰로부터 사건을 넘겨받은 검찰은 이 씨에 대해서만 살인 미수 교사 혐의 등을 적용해 기소하고 이 회장의 차명재산 등에 대한 부분은 별다른 수사를 진행하지 않았다. 현행법에서는 차명재산과 관련해 신고하지 않거나 탈세할 경우 증권거래법 위반이나 조세포탈 혐의 등으로 처벌할 수 있다.
특히 이 씨가 운영하던 자금이 이 회장의 차명재산이었던 만큼 그 규모를 꼭 파악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수사 기관에서는 이 전 회장에 대해선 어떠한 조사도 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검찰 관계자는 ‘조세포탈 등은 국세청에서 고발이 들어오지 않으면 수사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답변했다. 당시 사건을 맡았던 검찰에서는 수사진이 도중에 교체되는 등 내부에서도 적지 않은 혼선이 있었다.
결국 이 회장의 차명재산을 둘러싼 의혹은 검찰이 뚜렷하게 결론내지 않아 국세청이 풀어야 할 숙제로 남겨졌다.
그렇다면 차명재산과 관련한 의혹 및 조세포탈 여부를 밝힐 수 있는 열쇠를 쥐고 있었던 국세청은 어떤 입장이었을까.
▲ 이재현 회장 | ||
국세청 출신의 한 세무사는 “수정신고를 하고 세금을 납부했다 하더라도 이 회장의 경우처럼 금액이 크거나 재산 형성 과정에 의문이 있으면 통상적으로 국세청에서 과세표준과 세액을 결정하기 위해 재조사하는 것이 관례”라고 말했다. 이 세무사는 또 “법인세나 부가세 같은 경우는 신고하는 즉시 효력이 발생되지만 상속세나 증여세는 국세청에서 신고세액이 합당한지 면밀한 검토를 거친다”며 “조사 결과 탈세액이 크다면 검찰 고발까지 이어지는 게 일반적인데 이 회장의 경우 검찰에 고발되지 않은 것이 이상할 정도”라고 덧붙였다.
만약 국세청이 이 회장 측의 상속세 수정 신고를 받아들였다면 명의신탁됐던 차명주식에 대해서도 수탁자에게 증여세가 부과돼야 한다. 국세청은 차명으로 관리된 주식에 대해 증여세를 부과했는지에 대해서도 별다른 설명을 하지 않고 있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국세청 내부에서조차 국세청이 일부러 이 회장을 봐 준 것 아니냐는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심지어 재계 일각에서는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의 구명로비 의혹 수사과정에서 이 회장이 검찰 조사를 받은 사실까지 다시 들춰내며 CJ 그룹과 국세청의 인연을 거론하고 있다.
‘박연차 게이트’ 수사가 한창이던 2009년 4월 검찰은 현 정권 실세로 통하는 천신일 세중나모그룹 회장이 태광실업의 세무조사를 막기 위해 한상률 전 국세청장에게 로비를 펼친 정황을 잡고 수사를 진행한 바 있다. 이 과정에서 검찰은 한 번도 언급되지 않았던 이 회장을 극비리에 소환조사하기도 했다. 특히 천 회장 소유의 세중 DMS라는 회사를 CJ 측에서 37억 원에 매입했는데, 매입대금이 시장가에 비해 터무니없이 높아 무성한 뒷말을 낳기도 했다. 사정당국 일각에서는 천 회장이 이재현 회장의 구명 로비를 벌인 대가로 세중 DMS를 고가에 CJ 측에 넘긴 게 아니냐는 의혹이 불거지기도 했다.
검찰 주변에서도 CJ가 고가에 매입해준 배경엔 천 회장이 이 회장의 구명을 위해 수사기관과 한상률 전 국세청장에게 로비를 벌인 정황이 있는 것 아니냐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검찰은 이 부분에 대해서 별다른 수사 결과를 발표하지 않은 채 무혐의 처리했다.
CJ그룹과 국세청의 끈끈한 인연은 또 있다. 이주성 전 청장의 딸이 CJ 그룹 본사에서 일했던 적이 있으며, 국세청 고위직 인사들 중 몇 명이 CJ 사외이사로 일하고 있다는 점 등이다. 실제로 CJ는 허병우 전 서울지방국세청장과 홍철근 전 대구지방 국세청장을 사외이사로 두고 있다. 한 기업에서 두 명의 국세청 고위간부 출신을 사외이사로 두는 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일로 평가받고 있다.
결국 이 사건에 직·간접적으로 연관이 있는 경찰 검찰 국세청 등 사정기관이 약속이나 한 듯 이 회장의 차명재산에 대해서는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는 셈이다. 세 기관 모두 이번 사태의 불똥이 자신들에게 튈까 전전긍긍하고 있다는 후문이다.
사정기관에서 이 회장의 차명재산을 밝히는 것에 대해 소극적인 입장을 보이자 오히려 언론이나 시민단체 등에서는 차명재산에 대한 각종 추측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이 회장이 납부한 세금만 1700억 원에 이른다는 점에 미뤄 차명재산 총 규모는 최소 수천억 원에서 최대 수조 원대에 이를 것이란 관측에 힘이 실리고 있다. 일각에서는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이 4조 5000억 원의 차명 재산에 대해 납부한 세금이 1800억 원이었던 점을 들며 이 회장의 차명재산도 이와 비슷한 규모일 것이라는 관측까지 내놓고 있다. 법조계 관계자들은 구체적으로 세율이 어떻게 적용됐느냐에 따라 액수가 달라지겠지만 이 회장의 차명재산은 세율을 50%로 감안해도 최소 3400억 원대는 될 것이란 견해를 내놓고 있다.
이 회장 차명재산과 관련한 각종 의혹들에 대해 CJ 측은 “삼성특검 이후 CJ 측도 (차명재산) 실명화 작업을 진행했다”며 “중요한 것은 실명화 이후 모든 세금을 국세청에 자진 납부했다는 점”이라고 해명하고 있다.
하지만 지난 20년간 물밑에서 운영해왔던 차명재산을 이제 와서야 실명화 했다는 점에서 이재현 회장과 CJ 측은 도덕적 비난을 면하기 어려워 보인다.
이재현 차명재산 어떻게드러났나
자금관리인이 꺼내 쓰다 '덜컥'
이 회장의 개인자금을 관리하던 CJ 그룹 전 자금팀장 이 아무개 씨가 살인교사 미수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으면서 불똥이 옮겨 붙은 것이다.
이 씨는 2002년 3월 CJ에 입사해서 회장 비서실 재무1팀에서 일하다 이 회장의 신임을 얻게 됐고, 이후 이 회장의 차명주식과 자금운용 업무를 맡았다. 그는 미국 아이비리그 대학에서 MBA 과정을 이수한 인재로 알려졌다.
2005년 4월부터 2007년 4월까지 재무 2팀장을 맡았던 이 씨는 안 아무개 씨로부터 사채업자 박 아무개 씨를 소개받았다. 이 씨는 월 2~3%의 이자를 받기로 하고 박 씨에게 수차례에 걸쳐 2007년 1월까지 모두 170억 원을 대여해줬다. 심지어는 박 씨가 투자하는 사업에 은행에서 CJ그룹 명의로 100억 원이 넘는 돈을 대출받아 건넸지만 이후 사업이 여의치 않으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틀어졌다.
이 씨는 박 씨가 자금반납을 거절하고 있던 데다 자신이 CJ그룹 비자금을 관리한다는 걸 박 씨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섣불리 상환 압박을 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던 이 씨는 지인을 통해 박 씨를 살해하고 중요한 서류가 담긴 가방을 훔쳐올 것을 부탁하고 3억 원을 건네기로 했는데, 부탁을 받은 사람들이 마음을 바꿔 죽이지는 않고 가방만 훔쳐왔다. 이후 이 씨와 안 씨 두 사람은 자금은 계속 제공하되 폭력을 문제삼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박 씨와 합의했다.
하지만 2008년 2월쯤 서울경찰청이 관련 첩보를 입수하고 내사에 돌입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 씨는 관련자들을 해외로 도피시켜야겠다면서 살인 청탁을 했던 정 아무개 씨에게 도피자금 3억 원을 주며 해외로 도피할 것을 주문했다.
경찰도 뚜렷한 혐의를 찾지 못해 갈팡질팡하던 이 사건은 같은 해 9월 한 언론이 내사 사실을 보도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이후 관련된 언론 보도가 쏟아졌고 경찰 수사도 급물살을 탔다.
결국 경찰과 검찰은 이 씨를 살인교사 미수, 배임 등의 혐의로 기소했고 2009년 6월 1심 재판부는 이 씨에게 징역 6년을 선고했다. 1심 재판부는 이 전 회장의 차명재산을 537억 원으로 판단, 3분의 1에 해당하는 돈을 비정상적으로 사용한 것으로 보고 배임 혐의를 인정했다.
하지만 2심 재판부의 판단은 달랐다. 2심 재판부는 수천억 원의 차명재산 가운데 170억 원이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고 볼 수 없는 점 등을 들어 배임 혐의 등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또한 살인교사 미수 혐의 등에 대해서도 재판부는 검찰이 구체적으로 혐의를 입증하지 못했다고 판단해 무죄를 선고했다.
이처럼 1심과 2심 선고 결과가 정반대로 나오면서 이제 대법원이 어떤 판결을 내릴지에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박혁진 기자 phj@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