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전선 어때요” 어머니 상중 안보 걱정
▲ 지난해 필자와 국회에서 만난 박근혜 전 대표. | ||
얼마 전 일본 게이오대학 법대의 유명한 한국전문 석학 오코노기 마사오 교수를 만났을 때 한국 정치 지도자 중 누구를 만나고 싶으냐고 물은 바 있다. 그런데 거의 노타임으로 “다른 사람은 제쳐놓고 박근혜 전 대표를 만나고 싶다”고 해서 놀랐다. 오코노기 교수는 지난 대선 때 이명박 후보가 BBK 등으로 몹시 시달릴 때도 이번에는 당시 야당(한나라당)의 이명박 후보가 당선될 것이라고 예언을 한 사람이다. 오코노기 교수와 담소를 나눌 때 옆에는 게이오대학 한국연구소의 니시노 준야 교수도 있었다.
박근혜 전 대표는 알려지기로는 대한민국의 유명 정치인으로는 드물게 말로 인한 잡음이 없었으며 부패에 연루된 전력도 거의 없었다. 박 전 대표의 밸런스 있고, 강직한 그리고 신중한 태도는 안정적으로 한나라당을 이끄는 데 기여했고 ‘선거의 여왕’이라는 이명을 얻기도 했다.
박근혜 전 대표는 1974년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8·15 경축식장에서 저격당하기 전에 서강대를 졸업했다. 졸업 후 프랑스의 그르노블(Grenoble)대학으로 유학을 가게 됐고, 이때는 비서실이 아닌 경호실장(박종규)과 청와대 보좌관(차장)인 내가 직접 주불대사관 노영찬 참사관과 협력해 동경을 경유해 안전하게 그르노블까지 가도록 안내했다. 이때 박정희 대통령 내외가 김포비행장까지 전송을 나왔는데 육영수 영부인과는 그것이 마지막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그르노블에 있는 동안 어쩌다가 육 여사가 딸에게 전화를 걸려고 할 때가 있었다. 그런데 청와대 내에는 프랑스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육 여사가 나한테 전화를 걸어보라고 했는데, 나도 그 당시에는 프랑스어 실력이 지금과 같지 않았다. 힘들게 전화를 걸어보면 어떤 프랑스 여인이 “박근혜 씨는 외출 중”이라고 말해줬다. 시차도 있고 하여 서울의 오후는 그르노블의 아침이라 등교를 했던 것이다. 그래서 “외출 중입니다”라고 보고하고 나도 퇴근했던 기억이 몇 차례 있다. 부족했던 불어 실력이 탄로가 안 나서 다행이었다. 불어 실력도 실력이지만 그때 국제전화는 지금은 상상도 못할 정도로 거는 것 자체가 복잡했고, 통화음질도 나빴다. 겨우 거는 수준이었다.
74년 8월 15일, 국립극장에서 열린 8·15경축식전에서 육 여사는 저격당했고 병원에서 운명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다행히 연단 밑에 몸을 숨겨 문세광의 총탄을 피할 수 있었다. 이때 단상에는 정일권 국회의장, 양택식 서울시장, 김정렴 비서실장, 조상호 의전비서관, 박종규 경호실장이 있었는데 저격이 발생하자 박종규 경호실장만이 권총을 뽑고 응사했다. 이때 모든 조명이 무대를 향해 있어서 무대에서 관중석은 보이지가 않았다. 그 후 박종규 경호실장한테 내가 그와 같은 상황에서 응사하게 된다면 지그재그로 뛰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총탄에 맞는다고 조언하기도 했다. 이 무렵 김종필 총리는 서산에서 휴가 중이라 서울에 없었다.
▲ 박정희 전 대통령, 육영수 여사가 생전 필자 부부를 청와대 행사에 초대한 모습. | ||
어쨌든 8·15 사고 이후 청와대는 곧 프랑스로 박근혜 영애의 귀국을 타전했고 박근혜 영애는 둘째 날 이후부터 조문객을 맞이했다. 당시 귀국 직후 박근혜 영애가 한 “휴전선은 이상 없습니까?”라는 질문은 그의 애국심을 높이 평가하게 하는 일화가 됐다. 장례식 날에는 많은 청와대 직원들이 눈물을 터뜨렸다. 마당에서 경호실과 비서실 직원이 합동 추모식을 가진 후 정문에서 양쪽으로 갈라져 두 줄로 배웅을 했다. 박종규 경호실장은 대통령을 수행했다. 그래서 경호실은 내가 제일 앞에, 비서실은 다른 수석이 앞에 섰는데 이때 대통령이 우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참고로 저격사건이 난 8월 15일은 경축행사, 지하철 개통식 등 대통령이 다섯 군데나 행사에 참석하도록 스케줄이 짜여 있었다. 이를 경호실은 행정요원까지 총 200명으로 감당해야 했으니 결국 사고가 터진 것이었다.
그 후 박근혜 영애는 어머니를 대신해서 5년간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했다. 영국의 앤 공주가 아동구호기금을 운영했듯이 새마음재단을 운영하여 불우이웃돕기에도 힘을 썼다. 개인적으로 몇 차례 만난 바 있는 미국의 클린턴 여사가 퍼스트레이디 때 수업한 경륜과 경험을 바탕으로 상원의원, 대통령 후보, 국무장관으로 이어진 것과 흡사한 느낌이다.
1974년 저격사건은 내 개인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그날 나는 청와대 경호실의 상황실에서 근무했다). ‘피스톨 박(실제로 대한사격협회 회장을 맡기도 했다)’으로 유명한 박종규 경호실장이 책임을 지고 사퇴를 하면서 나도 청와대를 떠나게 됐다. 당시 사표를 수리하던 박 대통령은 “임자는 (청와대를) 나갈 필요가 없는데…, 좀 쉬고 있어”라며 전별금 봉투를 건네줬다. 제법 ‘두툼한’ 액수였다. 어쨌든 청와대를 나오면서 태권도와 스포츠외교에 전념하게 됐으니 새옹지마라고 할 수 있겠다.
1979년 박 대통령 서거 후에 신당동 사저에서 박근혜 전 대표를 만날 기회가 있었다. 보기에도 안쓰러울 정도로 초췌한 모습이었지만 그때도 흐트러짐 없이 육 여사처럼 당당하고 고매한 인상을 주었다.
2000년 내가 국회에 입문하면서 다시 박근혜 ‘의원’을 만났다. 통일외교통상위원회에서 2년간 함께 활동했다. 언제나 준비되어 있고, 밸런스가 있고, 무게가 있음을 느꼈다.
▲ 박근혜 전 대표가 부시 대통령 취임식 참석을 위해 방미 때 찰스 랜절 하원의원과 함께한 모습(윗사진)과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의원 만찬(박근혜 전 대표, 고 박주천 의원, 필자의 모습이 보인다). | ||
또 2001년 국정감사 때 미국과 캐나다에 김종하 부의장과 박근혜 의원 등과 함께 동행한 바 있다. 당시 박근혜 의원은 늘 확증에 의한 적절한 질문, 적절한 지적 그리고 적절한 몸가짐, 적절한 의연함을 보여줘 깊은 인상을 받았다. 물론 그때도 지금 못지않은 카리스마도 갖고 있었다.
김대중 대통령을 따라 평양의 남북정상회담(2000년)을 수행했는데 당시 만찬석상에서 한철해, 조경석 대장 등 북한의 군사위원회 의원들에게 한국 역대 대통령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의견을 물어본 적이 있다. 특히 박정희 대통령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했더니 “독재는 했지만 경제개발과 근대화를 이룩하여 재평가합네다”라는 예상외의 긍정적인 답변이 나와 깜짝 놀랐다. 그 후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는 2002년 5월에 평양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 정치인으로는 유일하게 회담을 하였다고 들었다. 우연은 아닌 것 같이 느껴졌다.
노무현 정권 하에서 곤욕을 치르고 나온 필자에게 2008년 8월 이명박 대통령의 특별복권이 발표됐다. 그 직후 박근혜 전 대표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어려울 때 못 도와드려 죄송합니다”라고.
그리고 지난해 8월 5개월간의 <중앙일보> 연재를 끝내고 “미련한 사람은 자기경험에서 길을 찾고, 현명한 사람은 선배에게 길을 찾는다”라는 단행본을 발간하게 돼 출판기념회를 가졌다. 지인들을 초대했는데 그 중 한 사람이 한병기 전 대사 내외였다. 한 전 대사는 당초 강원도 속초에 갈 일이 있어서 참석하지 못하겠다고 알려왔다. 그러나 그날 갑자기 속초에서 전화가 왔다. “지금 출판기념회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가는 길”이라는 것이었다. “못 온다더니 웬 일이냐”고 물었더니 “박근혜 전 대표가 이틀 전에 대통령특사 자격으로 유럽으로 떠나면서 자기는 (출판기념회에) 참석을 못하니 대신 좀 참석하는 게 어떠냐고 해서 올라오는 중”이라는 것이다. 아주 작은 것까지 꼼꼼히 챙기는 섬세함을 잘 보여주는 일화라고 생각한다.
박 전 대표는 말이 많지 않고, 아주 신중한 사람이다. 얼마 전 체육계의 한 후배로부터 박 전 대표가 어떤 호칭으로 나를 부르냐는 질문을 받았다. 잘들 몰라서 그러는데 박근혜 전 대표는 워낙에 말수가 적다 보니 상대의 호칭을 사용하는 경우가 드물다. 그리고 나 같은 경우에는 굳이 호칭을 써야 할 상황에서는 함께 의원생활을 했기에 “김 의원님”이라고 한다. 또 거의 40년이 다 돼가는 1970년대초 청와대 시절에도 호칭 사용은 많지 않았고, 필요할 때는 직함(보좌관)과 영애라는 표현을 썼던 것으로 기억한다.
오랜만에 ‘박근혜 영애’라는 표현을 써보니 느낌이 새롭기만 하다. 그의 조국을 위한 긴 여정에 행운과 성공이 있기를 빈다.
김운용 전 IOC 수석부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