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돈 받고 압력행사 주군 얼굴 먹칠
서울동부지검 특수부(형사 6부)는 최근 한나라당 소속 국회의원 보좌관 몇 명이 한 건설업체로부터 수천만 원의 뇌물을 수수했다는 의혹에 대해 수사를 진행하고 있다. 검찰수사 선상에 오른 보좌관들이 모두 한나라당 소속으로 알려지자 여권은 이번 사건이 당의 이미지에 타격을 주지 않을까 노심초사하고 있다. 가뜩이나 세종시 문제로 내홍이 심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소속 보좌관들이 비리사건에 연루된 사실이 드러날 경우 당의 도덕성이 적잖은 상처를 입을 것이기 때문이다.
검찰은 한나라당 보좌관들이 한 저축은행에 ‘모 건설업체가 빌린 대출금의 만기를 연장해달라’는 압력을 넣어주는 대가로 건설업체로부터 뇌물을 받은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국회의원 보좌관은 입법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지만 한편으로는 행정기관에 대한 감시견으로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기도 한다. 과거 일부 보좌관들은 이 권력을 악용해 각종 이권에 개입한 사실이 드러나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검찰은 이번 기회에 일부 국회의원 보좌관들의 비리를 뿌리뽑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내비치고 있다.
사건은 지난 2008년 11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서울 송파구에 위치한 A 건설사는 몇 해 전 대전에 400억 원을 투자해 주상복합건물을 지었다. 하지만 분양이 좀처럼 되지 않자 건설사는 회사 명의로 H 은행에서 118억 원을 대출받아 분양 희망자들에게 빌려주는 조건을 내걸었다. 그러나 이마저도 여의치 않아 분양이 저조하자 A 건설사는 결국 유동성 위기를 맞게 된다. 특히 저축은행으로부터 대출받은 돈의 만기가 돌아오면서 부도 일보 직전에 놓이게 됐다.
이에 회사 측 임원은 평소 친분이 있던 박 아무개 의원의 당원협의회 이 아무개 전 사무국장에게 ‘대출 만기가 연장될 수 있도록 힘써 달라’는 청탁을 했다. 회사 측은 청탁과 함께 이 전 국장에게 2억 원을 건넨 것으로 알려졌다. 이 전 국장은 자신이 운영하는 회사가 A 사의 토목공사를 해준 것처럼 가짜 서류를 만들어 2억 원을 받았다. 얼마 후 H 저축은행은 A 사로부터 상환계획서를 받고 만기를 8개월 연장해줬다. 이 전 국장을 통한 청탁 로비가 성공한 듯한 모양새였다.
하지만 상환 압력을 받은 저축은행 관계자가 이 사실을 검찰에 제보하면서 사건은 수면 위로 급부상했다. 검찰은 이 전 국장을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알선수재’ 혐의로 구속기소했고, 그는 얼마 전 법원에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았다.
이 전 국장의 개인비리로 끝날 것 같던 사건은 수사 과정에서 ‘폭탄 진술’이 나오면서 확대되기 시작했다. 검찰이 자금 용처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국회의원 보좌관들 몇 명에게 돈을 줬다’는 이 전 국장의 진술을 확보한 것이다.
이 전 국장은 검찰 수사 과정에서 “기획재정위 소속 의원의 보좌관 B 씨에게 5000만 원, 정무위 소속 의원 보좌관 3명에게도 각각 1000만 원씩을 전달했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전 국장은 받은 돈 중 나머지는 개인적인 용도로 사용했으며 이 중 3000만~4000만 원은 베트남에서 암달러상을 통해 환전한 것으로 검찰 수사 결과 드러났다.
검찰은 이 전 국장이 보좌관들에게 건넨 8000만 원의 현금을 인출한 날 보좌관 중 한 명과 두 시간이 넘게 통화한 사실도 알아냈다. 돈을 건넨 이 전 국장이나 돈을 받은 보좌관들은 모두 강남 지역에 지역구를 둔 의원들의 보좌관 출신인 데다 서울 지역 모 대학 동문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국회 주변에서 이 대학 출신 국회 보좌관과 출입 기자는 그 수는 많지 않지만 정기적으로 모임을 갖는 등 끈끈한 유대관계를 맺고 있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검찰은 이 전 국장이 돈을 건넨 보좌관들이 기획재정위나 정무위 소속 의원들 밑에서 일한다는 점에 미뤄 이 전 국장이 4명의 보좌관들을 통해 금융감독원이나 은행 측에 로비를 했다고 판단하고 있다. 기획재정위와 정무위는 국책은행과 저축은행 등 금융권 업무를 관여하는 ‘알짜’ 상임위원회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검찰은 조사 과정에서 이 전 국장으로부터 “(기획재정위 소속 의원 보좌관이) 5000만 원을 받은 뒤 ‘금감원 측에 부탁을 했고 일이 잘 돼가고 있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는 진술을 받아낸 것으로 전해졌다.
검찰은 조만간 관련 보좌관들을 소환해 이들이 실제로 금감원이나 은행 측에 영향력을 행사했는지를 조사할 방침이다. 하지만 해당 보좌관들은 이번 일에 대해 한결같이 ‘모르는 일’이라고 답하거나 기자들과의 접촉을 피하고 있다.
이번 사건은 연루된 보좌관들이 모두 여당인 한나라당 소속이라는 점과 한꺼번에 4명의 보좌관들이 돈을 받았다는 점에서 정치권에 미칠 파장이 적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국회의원 보좌관들은 이번 사건에 대한 검찰의 수사 추이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국회의원 보좌관들이 연관된 사건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지난해에는 국회 정무위 소속 수석 전문위원이었던 정순영 씨 뇌물 수수 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몇몇 보좌관들이 정 전 위원과 민원인들을 연결시켜 주고 그 대가로 돈을 받은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다.
검찰의 한 관계자는 “국회의원 보좌관들이 가지는 영향력은 크지만 거기에 걸맞은 검증시스템이 제대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조그마한 유혹에도 흔들리는 것 같다”며 “소수의 보좌관들이 관련된 비리들을 제대로 수사해야만 열심히 일하는 다른 대부분의 보좌관들이 억울한 오해를 받지 않을 수 있다”고 말했다.
박혁진 기자 phj@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