콕콕 찍는다 했더니 쏙쏙 빼돌린 거였어?
▲ SAT 시험 문제를 유출한 학원 강사가 잇따라 적발되면서 논란이 일고 있다. 사진은 강남 어학원 밀집지로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련 없다.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 ||
지난 1월 18일 강남 E 어학원 강사 김 아무개 씨가 SAT 문제를 유출한 혐의로 불구속 입건된 데 이어, 1월 23일 에는 경기도 모 고등학교에서 장 아무개 씨 일당이 SAT 문제를 지능적으로 빼돌린 사실이 발각되면서 학원가가 술렁이고 있다.
특히 장 씨 일당의 검거 과정에 1월 21일 입국한 ETS(미교육평가원) 보안 담당자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ETS가 시험지 유출 혐의자 목록인 이른바 ‘블랙리스트’를 보유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소문마저 나돌고 있는 실정이다. ETS 측이 ‘블랙리스트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밝혔지만 ‘블랙리스트’ 존재 여부를 둘러싼 공방전은 그치지 않고 있다.
SAT 문제 유출 사고가 잇따르자 교육과학기술부가 서울과 부산 지역의 SAT 전문학원 100여 곳에 대해 전면 조사에 착수하는 등 사태는 일파만파로 번지고 있는 형국이다. 학원가를 격랑 속으로 몰아 놓고 있는 ‘SAT 시험 문제 유출’ 사건 후폭풍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시험을 앞두고 커닝의 유혹을 느껴보지 않은 학생은 아마 없을 것이다. 매 순간 성적의 압박을 느끼는 학생으로선 커닝을 해서라도 좋은 성적을 거두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을 것이다.
학부모 또한 마찬가지다. 우리 아이가 잘될 수만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 수단이 비록 자신의 양심 한 구석을 찌르는 비수라 해도 개의치 않는다. ‘SAT 문제 유출’ 사건은 더 좋은 성적에 목말라 있는 학생과 학부모들의 애절한 심정을 교묘하게 파고들어 이익을 취한 학원가의 검은 그림자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강남 E 어학원 강사 김 씨는 지난해 1월 24일 태국 방콕에 건너가 현지에 있는 수험생에게 1만 5000원을 주고 문제지를 구입했다. 김 씨는 문제지와 답안을 미국 유학생 2명에게 이메일로 전송했다. 태국과 미국의 시차를 이용한 지능적인 수법이었다. 김 씨로부터 문제지를 건네받은 두 학생은 2400점이 만점인 SAT 시험에서 2200점 이상의 고득점을 올렸다. 이들은 강남 E 학원에서 김 씨의 SAT 강의를 받던 학생들이었다.
하지만 김 씨의 행각은 두 학생이 평소 학원 모의평가 성적보다 50~100점 이상 높은 점수를 받았다는 점을 수상히 여긴 한 수강생 학부모의 제보로 덜미가 잡혔다.
김 씨는 직접 SAT 시험에 응시해 이를 토대로 강의 자료를 만들었다. ETS 측은 학생도 아닌 그가 SAT에 자주 응시하는 것을 의심해 2007년에는 한 차례 응시자격을 박탈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SAT는 미국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꼭 필요한 시험일까. 미국에는 약 3300개의 대학이 있다. 대부분의 미국 대학은 유학생에게 SAT 성적을 요구하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학생과 학부모들이 SAT 성적에 이토록 집착하는 이유는 상위 60~70개 대학이 SAT 성적 제출을 필수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아이가 이왕이면 더 좋은 대학에서 공부하길 원하는 학부모 입장에선 SAT 고득점을 위해 ‘스타 강사’를 찾을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1월 27일 기자와 만난 강남의 한 유명 어학원 실장은 “옆 학원 유학 설명회에 갔더니 보유하고 있는 기출 문제를 보여주더라. 이 학원은 ‘기출 문제를 얼마만큼 가지고 있느냐’는 학부모들의 질문 전화를 받아왔다. 기출 문제 유출은 학원가에서 공공연히 행해져 왔다”고 말했다.
1월 23일 경기도 모 고등학교에서 SAT 시험지를 몰래 빼돌린 장 씨 일당의 수법도 가히 놀라웠다. 지우개 속에 칼 심을 박아 문제지를 찢거나 공학용 계산기 메모 기능을 이용해 문제를 입력했다. 장 씨는 차 아무개 씨 등 대학생 세 명에게 10만 원씩 제공하며 함께 움직였다. 장 씨는 지난해 12월 5일 SAT 시험을 치렀는데 당시 시험 감독관은 그의 행동을 의심해 ETS 측에 보고를 했다고 한다. 이후 장 씨는 다음(1월 23일) 시험에 재응시해 시험지를 빼돌리려다 시험을 관리 감독하는 ETS 본사 직원에게 현장에서 적발됐다.
그렇다면 1월 23일 당시 경기도 모 고등학교에 있었던 시험 감독은 장 씨의 의심스런 행동을 눈치채지 못한 것일까. 이와 관련 1월 27일 기자와 만난 수서경찰서 지능팀 관계자는 “시험 감독은 수사대상이 아니다. SAT 시험지가 워낙 두껍기 때문에 시험장에서 칼을 이용해 문제지를 찢는 것을 감독이 알아차리기란 쉽지 않다”고 말했다. 강남의 한 어학원 관계자는 “작년에 한 학생이 SAT 시험을 사전에 신청하지 않은 대기자 자격으로 현장 등록하고 시험을 본 뒤 문제지를 들고 중간에 도망갔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고 전했다. 현재 장 씨 일당은 특수절도 및 업무방해 혐의로 구속돼 수서경찰서에서 조사를 받고 있다.
김 씨와 장 씨가 속해있던 E 학원과 R 학원은 SAT 전문 학원 업계에서 1, 2위를 다투는 학원으로 알려졌다. 2004년부터 5년간 E 학원에서 SAT 독해 과목을 가르치던 김 씨는 지난해 말부터 R 학원 강사로 활동했다. E 학원이 김 씨의 학력 위조 사실을 알게 되면서 김 씨가 R 학원으로 자리를 옮긴 것으로 확인됐다. 실제로 김 씨는 경기도 모 대학을 졸업했을 뿐 유학 경험은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R 학원에서 강의하던 장 씨는 어떨까. 수서경찰서 지능팀 관계자는 “장 씨가 MIT를 나온 것으로 알고 있다. 장 씨의 유학생활을 살펴봤을 때 사실인 것 같아 학력 조회를 따로 해보진 않았다”고 밝혔다.
강남의 한 유명 어학원 관계자는 “김 씨가 E 학원에서 자리를 옮기면서 R 학원까지 기출 문제 유출 영향을 받은 것 같다”면서 “경찰에선 강남의 다른 SAT 학원까지 수사를 확대한다고 했지만 이번 사건으로 E 학원과 R 학원은 오히려 광고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다. 다른 학원들은 SAT 수강생이 몰리는 여름 방학 때 수강생을 뺏기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사태가 확산되자 서울시 교육청은 1월 26일 수강료를 게시하지 않고 강사 해임 사실을 통보하지 않은 R 학원 측에 45일간 휴원 조치를 내렸다. 또 수서경찰서는 1월 28일 R 학원을 압수수색하는 등 수사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블랙 리스트’ 존재 여부를 둘러싼 논란도 가열되고 있다. 논란이 확산될 조짐이 일자 ETS 측은 ‘블랙 리스트는 존재하지 않는다’며 진화에 나섰다. 하지만 ETS 측이 문제지 유출 의심 대상자를 따로 관리하고 있을 것이란 관측이 학원가 주변에서 설득력 있게 나돌고 있다. 여러 차례 SAT 시험을 치른 김 씨의 응시자격을 박탈한 것이나 장 씨의 현장 검거를 위해 직접 보안 담당자를 국내에 파견한 점은 ETS 측이 국내 학생들의 응시 횟수 및 유출 관리를 꼼꼼히 체크하고 있다는 방증으로 풀이된다.
학부모들은 이번 기출 문제 유출 사건으로 미국 명문 대학에서 한국 학생의 정원을 줄이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는 분위기다. 미국 대학이 입학 정원의 일정 비율을 정해 유학생을 받고 있기 때문에 같은 점수라면 자국 학생을 뽑을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또한 ETS 측에서 SAT 시험 횟수를 축소하거나 국내 시행을 중지하지 않을까 염려하는 목소리도 없지 않다.
하지만 학원가 관계자들은 이번 사건으로 ETS 측이 국내 학생들에게 불이익을 주진 않을 것이란 관측을 내놓고 있다. 강남의 유명 어학원 관계자는 “토익(TOEIC), 토플(TOEFL), SAT 등 ETS가 주관하는 시험에 한국 학생들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ETS 측이 한국 시장을 포기하긴 어려울 것이다. ETS가 ‘블랙 리스트’ 존재를 부인한 이유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고 귀띔했다.
SAT는 1년에 여섯 번 치러진다. ETS는 그중 세 번은 기출문제를 공개하고 있다. ‘스타 강사’들은 공개되지 않는 나머지 세 번의 기출문제를 확보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이들 스타 강사들은 학원 강의는 물론 학교 특강과 소그룹 과외 지도를 겸하고 있다. 미국 명문 대학 진학률이 높은 외고나 민사고의 경우 학원보다 고액의 수강료를 지불하고 학교로 스타 강사를 초빙한다고 한다. 강남의 한 유명 어학원 관계자는 “기출문제를 여러 번 푼다고 실력이 향상되진 않는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사고력을 키워 출제된 문제의 개념을 이해하는 과정을 소홀히하고 있다. 고득점 수험생들까지 성적 유지에 급급해 유출된 기출문제를 찾아다니는 현실이 실로 안타까울 따름이다”고 말했다.
고득점, 고학력, 고스펙에 눈이 멀어버린 학생과 학부모, 양심을 저버리고 문제를 유출한 ‘스타 강사’, 기출문제 유출 강사를 스카우트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펼치고 있는 유명 어학원들. ‘SAT 문제 유출’ 사건으로 표출된 우리 학원가의 부끄러운 자화상이다. 사정당국과 교육 관련 기관들이 학원가 주변에서 기생하고 있는 수많은 독버섯을 어떤 식으로 제거해 나갈지 귀추가 주목된다.
정유진 기자 kkyy1225@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