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물정 어둡고 특권의식으로 똘똘
▲ 이건희 전 삼성 회장이 지난 5일 호암아트홀에서 열린 호암 탄생 100주년 기념식을 마치고 여동생 이명희 신세계 회장의 손을 잡고 식장을 빠져나오고 있다. 이 전 회장 왼쪽의 홍라희 씨 뒤로 이재용 부사장의 모습도 보인다. 사진공동취재단 | ||
‘배신자’라는 일각의 손가락질을 의식한 듯 김 변호사는 서문에서 “이 글은 고백록이나 고발서가 아니며 백서도 아니고 오히려 그들 모두”라며 교묘하게 선을 그었다. 하지만 엄청난 홍역을 치른 바 있는 삼성으로서는 부담을 가질 수밖에 없어 보인다. 특히 이번에는 베일에 싸여있던 ‘삼성 로열패밀리’의 라이프스타일과 특권의식을 폭로하면서 핵심인사들의 실명까지 공개하고 있어 적잖은 파장을 예고하고 있다.
김변호사는 이 책을 통해 삼성이 권력기관을 상대로 어떻게 로비를 해왔는지, 또 경영권 세습과정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에 대해 상세히 밝히고 있다. 책에는 일반인들은 알 수 없는 삼성의 실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는데 가장 흥미로운 것이 바로 이건희 전 회장과 그 일가들이 사는 방식이다. 김 변호사는 이와 함께 삼성 임원들의 ‘어색한’ 충성심에 대해서도 폭로하고 있다.
김 변호사에 따르면 구조본 팀장들은 ‘회장님과 그룹을 보위하기 위해’라는 표현을 즐겨 썼으며, 공식문서에도 ‘이건희’ ‘회장’ 등의 불경스러운 표현은 삼갔다고 한다. 중국 봉건제 시절 공문서에 황제의 이름을 함부로 쓸 수 없었던 것처럼 삼성은 ‘이건희’는 ‘A’로, 이 전 회장의 부인인 ‘홍라희’는 ‘A′’, 이재용은 ‘JY’, 이부진은 ‘BJ’, 이서현은 ‘SH’로 썼다 한다.
이 전 회장 일가는 특권의식에 빠져 상식에 벗어난 행동도 자주 했다고 한다. 김 변호사는 “이건희 일가는 자신들이 법 위에 있다고 믿었으며 유럽귀족 흉내를 몹시도 내고 싶어했다”고 증언한다. 그는 이 전 회장의 생일잔치 풍경을 예로 들었다.
2003년 1월 9일 저녁 6시 호텔신라에서 열린 그의 회갑잔치에는 유명 국악인과 성악가, 가수 등이 대거 출연했다. 일가의 파티에는 연예인과 연주자, 모델 등이 대거 동원되는데 가수 나훈아 씨는 “나는 내 공연을 보기 위해 표를 산 대중 앞에서만 공연하겠다”는 뜻을 밝히며 초청을 거절했다고 한다. 초청된 손님들에게는 상당한 수준의 와인이 제공되며 에피타이저로는 거위 간, 메인 요리로는 일본 최고급 등심에 트뤼프 버섯으로 만든 소스가 나왔다고 한다. 손님 한 명당 드는 와인과 음식값은 50만 원으로 손님을 300명으로 계산하면 먹고 마시는 비용으로만 1억 5000만 원이 들었다. 수억 원대의 초청공연과 선물비용을 합치면 하루 파티비용만 10억 원에 달했다고 김 변호사는 주장했다.
김 변호사에 따르면 호텔신라에는 특별 서비스 교육을 받은 여직원을 일컫는 ‘드림팀’이 존재한다. 검은 유니폼을 입은 이들이 테이블 옆에 서 있다가 온통 금빛으로 덮인 음식뚜껑을 열어주는 장면은 직접 보지 않고는 상상하기 힘든 풍경이라는 것이 김 변호사의 얘기다. 하지만 이런 잔치에서도 김 변호사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패밀리의 테이블에는 프랑스에서 항공기로 공수된 냉장 거위간과 병당 천만 원짜리 페트뤼스 와인이 올려지는 반면 손님들의 테이블에는 냉동 거위간과 훨씬 저렴한 와인이 제공됐다는 것이다.
이 전 회장의 독특한 생활습관도 흥미롭다. 재택근무를 좋아하는 이 전 회장은 출근하는 일이 거의 없어 주요 서류가 모두 집으로 전달되는데 모든 지시사항은 구두로 전달된다. 그는 집에서 녹화해둔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며칠씩 계속 보는가 하면 거울을 수시로 들여다보는 버릇이 있으며 자기 몸으로 이것저것 시험하기를 좋아한다고 한다.
또 이 전 회장이 타는 엘리베이터는 중간에 서지 않으며 온도는 25~26℃에 맞춰져 있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자택 지하실에는 유·무선 연락을 받을 수 있는 통신팀이 항시 대기하고 있는데 이는 외국호텔에 묵을 때도 예외가 없다. 그의 옆방에 통신팀이 대기한다. 또 회의를 아무리 오래 해도 화장실에 가지 않는 이 전 회장의 습관으로 인해 회의가 있는 날 사장들은 아침부터 국과 물을 포함한 일체의 수분 섭취를 피한다고 한다.
▲ 이건희 전 회장의 전용기. 100명이 넘게 탈 수 있는 초음속 여객기를 16인승으로 개조했다. 내부엔 침실과 와인바까지 갖추고 있다고 한다. | ||
패밀리들이 ‘그들만의 세상’에 갇혀 실물경제에 대한 감각이 둔했다는 얘기도 눈길을 끈다. 이 부사장은 백화점 상품권을 써본 적이 없다고 했는데 금전에 대한 감각도 없어 사람들이 조의금과 축의금을 얼마나 내는지도 몰라 엉뚱한 금액을 내기도 했다는 것이 김 변호사의 얘기다. 이서현 제일모직 전무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국내 판매용 의류에 대해 “100만 원짜리 옷을 만들어봤자 (창피해서) 누가 입겠느냐”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자산이나 상품의 적정가격에 대한 감각이 무딘 홍라희 전 리움미술관 관장은 보성에 좋은 차 밭이 있다는 말을 듣고 현지답사도 않고 20억 원에 선뜻 땅을 샀다가 사기를 당한 적도 있었다고 김 변호사는 회고했다.
김 변호사는 삼성 패밀리의 명품사랑에 대해서도 적고 있다. 이 전 회장은 페루 고산지대에 서식하는 산양의 털로 짠 ‘비큐냐’ 양복을 무척 좋아했는데 양복 상의만 1500만 원에 이르고, 코트는 무려 5000만 원대라고 한다. 그는 가끔 자신이 입고 있는 점퍼를 제일모직에 보내 연구해 보라고 했는데 제일모직에서는 그 옷의 브랜드는커녕 원단의 재질조차 알 수 없었다고 한다. 홍 전 관장은 일본의 디자이너인 ‘이세이미야케’의 옷을 좋아한다고 한다. 그녀는 제일모직의 여성복 디자인을 결정해주기도 했는데 그녀의 의사가 반영된 옷이 도무지 팔리지 않아 제일모직 여성복 사업부장은 연말마다 쫓겨나는 수모를 당해야 했다고 한다.
타워팰리스에 대한 일화도 있다. 2002년 10월 타워팰리스가 첫 입주자를 받을 당시 이 전 회장은 입주자 자격심사를 지시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김 변호사는 “타워팰리스는 일반인들과 자신들을 구별짓고 싶어하는 이 전 회장의 철학이 고스란히 드러난 것”이라며 “당시 이 전 회장은 삼성 고위 임원, 변호사, 의사 등 전문직으로 성공한 사람들을 입주시키라고 했다”고 비꼬았다.
이 전 회장은 영향력 있는 공무원에게 뇌물 주는 일을 ‘섭외’라 불렀는데 결혼기념일, 아이들 생일 등을 꼼꼼히 챙기고 꽃과 와인을 보내는 등 로비대상에게 ‘감동 서비스’를 하도록 직접 지시했다고 한다. 섭외대상은 정·관·법조·언론계 등 가리지 않았는데 법조계를 예로 들면 ‘공직 재기용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서열을 매겨 영입을 추진했다고 한다. ‘도둑 잡는 일은 도둑이 가장 잘 안다’며 대도 조세형을 보안업체 에스원에서 영입하도록 지시한 것도 외부 인재영입에 대한 유별한 욕심을 보여준 사례로 꼽히고 있다.
이 전 회장의 전용기를 타본 경험도 흥미롭다. 김 변호사는 후배 검사의 상가에 급히 갈 일이 있었는데 당시 현직 검사 몇 명과 함께 이 전 회장의 전용기를 타는 특혜를 받았다고 한다. 회장 전용기를 위해 삼성은 대한항공에서 베테랑 조종사 5명과 스튜어디스 2명을 스카우트하기도 했는데 공기밀도가 낮은 성층권으로 비행, 전혀 흔들림을 느낄 수 없었다고 한다. 100명이 넘게 탈 수 있는 초음속 여객기를 16인승으로 개조한 탓에 공간은 넉넉했고. 침실과 와인바까지 갖춰져 있었다고 회고했다.
삼성‘김용철 행보’촉각
‘용인시장 출마 막아라’
▲ 김용철 변호사의 회고록(왼쪽)과 2007년 삼성 비자금을 폭로할 당시의 기자회견 모습. | ||
삼성그룹의 지주회사 격인 삼성에버랜드가 소재한 용인시장에 출마해 양심선언의 정당성 및 이 전 회장의 사면복권 부당성에 대해 정치적 심판을 내려야 한다는 논리를 폈다는 전언이다.
김 변호사가 책을 발간한 것도 선거 출마를 위한 사전 정지작업이 아니냐는 시각도 없지 않다. 실제로 김 변호사는 출간을 통해 삼성의 실상을 알리고 선거비용을 마련할 계획을 세웠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김 변호사의 심상찮은 행보에 삼성 측은 삼성가의 비공개 X파일이 또다시 폭로될지 모른다는 우려감 때문에 바짝 긴장하고 있는 분위기다.
이에 대해 삼성 측은 최근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김 변호사의 용인시장 출마설은 금시초문”이라며 “소설 쓰듯이 쓴 것인 만큼 책 내용에 대해 우리는 할 얘기가 없다. 관심도 없고 현재 어떤 대응도 고려하지 않고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