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서에서 국모까지’ 아들 수령 만들려다…
1994년 미국 카터 대통령 부부와의 회담 당시 잠시 모습을 드러낸 김성애(앞줄 맨 오른쪽). 그는 지난 8~9월께 노환으로 사망했다고 알려지고 있다.
중국 대륙의 근현대사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여성은 누구일까. 많은 이들이 주저 없이 마오쩌둥(毛澤東)의 두 번째 부인 장칭(江靑)을 꼽을 것이다. 절대미모의 여배우 장칭은 그의 연극에 홀딱 반한 마오쩌둥의 눈에 들어 베이징(北京)에 입성했다.
하지만 이는 중국 인민들에겐 불행의 시작이었으며, 장칭 본인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마오를 등에 업은 장칭은 1960년대부터 ‘4인방’의 핵심으로서 직접 정치에 개입했고 중국 근현대사의 가장 큰 아픔으로 기억되는 문화대혁명을 주도했다. 장칭의 절대 권력은 그의 남편 마오의 죽음으로 막을 내렸으며 1991년 옥살이 도중 쓸쓸히 생을 마감한다.
중국에 장칭이 있다면, 북한엔 김성애 전 조선여맹위원장이 있다. 김성애 역시 북한 최고지도자의 후처 출신이라는 공통점이 존재하고, 남편을 치마폭에 감싸 권부의 중심에서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는 점도 비슷하다. 또 말년 비참한 삶의 모양새도 판박이다.
최근 대북학술기관 NK지식인연대는 1994년 김일성-카터 회담 이후 자취를 감춘 김성애가 지난 8월과 9월 사이 자강도 강계의 100호 특각(별장)에서 사망했다고 알렸다. 박건하 NK지식인연대 사무국장은 “북한 내부 소식통에 의하면, 김성애의 사인은 노환이라고 한다”며 “90세의 고령인 점을 감안한다면 그의 사망설은 사실일 가능성이 무척 높다”고 밝혔다.
김성애의 시작은 미약했다. 본인 스스로도 권부의 중심에 오르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1998년 작고한 신경완 전 노동당 부부장의 증언에 따르면, 애초 김성애는 평안도 강서군에서 농사꾼의 딸로 태어나 중등교육(사범학교로 추정)을 마친 평범한 처녀에 불과했다. 김성애가 학교를 마치고 군에 입대(혹은 징집)한 것은 1947년께다. 통신병 보직을 받고 최고사령부 무전수로 근무한 그는 능력을 인정받아 김일성 관저 교환수로 등용된다. 공교롭게도 그를 발탁한 이는 김일성의 본처인 김정숙이었다고 한다.
1949년 9월, 자신을 발탁한 김정숙이 해산을 하다 죽었다. 당시 김정일은 여섯 살, 김경희는 세 살에 불과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김성애는 자신이 김정숙의 자리를 대신할 것이라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김정숙 사후 자연스레 관저의 살림을 맡게 된 김성애는 소설 <임꺽정>으로 유명한 홍명희 북한 내각 부수상의 딸 홍기연과 함께 김정일과 김경희의 육아 및 교육에도 관여하게 된다.
애초, 김일성의 빨치산 동료들이 후처로 눈여겨봤던 이는 김성애가 아닌 앞서의 홍기연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부친 홍명희가 이를 거절함으로서 관심은 김성애로 모아졌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교착상태에 있었던 1951년(혹은 1952년), 김성애는 자연스레 김일성의 아이를 임신하게 된다.
평소 지근거리에서 살림을 도맡아가며 보좌한 미모의 젊은 여성에 천하의 김일성도 그냥 지나치지 못했던 것이다. 더군다나 전쟁의 압박과 격무에 시달린 환경 속에서 전처를 잃은 아픔까지 겹쳐있었던 당시 김일성의 심리적 상황이 이를 재촉했다. 물론 주변의 권유도 있었다. 결국 김성애는 가까운 동료였던 박정애 당시 당 중앙위원에 임신 사실을 알렸고, 출산 즈음에 김일성과 혼인하게 된다. 명실상부한 북한 최고지도자의 안주인이 된 것이다.
조선노동당 제6차대회 경축야회를 보는 김일성-김정일 부자.
다만 김정일 입장에서 계모 김성애가 부담됐던 것은 나이가 고작 16세 정도밖에 차이나지 않았고, 게다가 친모가 발탁한 선생님이었다는 점이다. 하루아침에 누나 혹은 이모뻘 되는 지인이 자신의 어머니가 됐다는 점은 어린 김정일에게 많은 혼란을 야기했을 터였다.
김성애가 차츰 정치에 눈을 뜨게 되는 계기는 아들 김평일 주 폴란드 북한 대사가 태어나면서부터다. 1954년 김성애가 출산한 김평일은 한눈에 봐도 김일성의 체구와 외모를 쏙 빼닮았다. 김평일은 학창시절 학생들을 줄줄이 끌고 다니는 지도력과 카리스마가 있었고, 학업성적 역시 우수했다. 주변에서도 그를 영민한 후계자감으로 염두에 두었으며, 김일성 역시 내심 ‘당은 김정일에게 맡기겠지만, 군은 김평일에게 맡기겠다’는 생각이 있었다는 후문이다.
김성애의 권력욕과 그 토대가 되는 자신감은 영민한 후계자감이었던 아들 김평일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후계자 논의가 본격화되기 시작한 1960년대부터 측근 세력을 권부에 심어나가며 권력의 중심에 나섰다. 본격적인 ‘아들 김평일 후계자 만들기 프로젝트’를 가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김성애가 대중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된 시기는 1969년 북한 최대 여성조직인 조선민주여성동맹(여맹)의 위원장에 오르게 되면서부터다. 사망설을 제기한 박건하 사무국장은 당시에 대해 “김성애가 여맹 위원장을 맡았다는 소식이 <노동신문> 1면에 게재됐다”며 “사실상 김성애는 이 시기 조선의 국모였고, 그 위세가 전 인민이 기억할 정도로 대단했다”고 회상했다.
김성애가 여맹을 맡고 가장 먼저 한 일은 죽은 김일성의 전처 김정숙의 흔적을 지워나간 것이다. 단골로 등장했던 김정숙 관련 교육 자료는 당에서 삭제됐고, 기념물들 역시 철거됐다. 김정숙을 치켜세웠던 집필자들은 모두 좌천됐다. 그리고 그 자리를 김성애가 차지했다. 아들 김평일의 후계경쟁을 위해선 우선 자신의 자리를 공고히 하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그 위세는 대단해서 남편 김일성도 함부로 하지 못했다. 김성애 권력의 최정점이었던 1971년, 김일성은 전국농업대회에서 공개적으로 ‘김성애의 얘기는 내 얘기와 마찬가지다’라고 선포했다. 현재도 마찬가지지만, 당시에도 북한의 ‘최고 존엄’은 법이 아닌 수령의 교시였다. 김성애의 말 자체가 수령의 교시가 됐다는 뜻이었으며 이는 아들들에게도 절대 허락지 않는 사안이었다. 이 당시 김성애는 북한 정권의 살아있는 권력이었으며 수령과 버금가는 2인자와 다를 바 없었다.
김정일의 두 번째 부인인 성혜림의 언니 성혜랑은 자신의 수기 <등나무가 있는 집>을 통해 당시 김성애의 막강한 권력에 대해 이렇게 회자했다.
“1971년 태어난 김정남(김정일이 성혜림 사이에 낳은 장남)이 생후 4개월이었던 당시, 대장암을 앓아 봉화진료소에 입원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국모 김성애가 소아과를 시찰하러 온다고 했고, 병원은 긴장감이 돌았다. 정남의 외할머니는 김성애가 돌연 문을 열고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정남을 업고 병원 뒷문으로 허둥지둥 도망쳤다. 김성애는 전처의 자식 김정일의 뒤를 캐기 위해 정남을 찾아 나서려고 왔던 것은 아닐까.”
당시 김정남은 김정일에게 있어선 아킬레스건이었다. 정남은 유부녀였던 성혜림을 꼬드겨 얻은 혼외자식이었다. 김정일 자신의 후계구도를 위해선 감춰야 할 부분이었고, 김평일을 후계자로 올려야 했던 김성애로서는 좋은 ‘먹잇감’이었던 셈이었다. 김성애의 당시 급작스런 병원 시찰 일화는 결국 김정일에 대한 압박이었으며, 당시 정치 구도에 있어서도 김정일이 분명한 열세에 놓였다는 것을 증명한다.
당연한 얘기지만, 권력의 중심에서 김평일 후계자 만들기에 혈안이 돼 있었던 김성애는 전처 자식 김정일, 김경희와는 극단적인 대립구도를 형성하게 된다. 다음은 김일성 회갑연에 있었던 신경완의 목격담이다.
1994년 당시 핀란드 대사로 재직한 김성애 아들 김평일 모습. 연합뉴스
김성애의 막강한 권력에 있어서 제동을 걸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지나치면 오히려 독이라고 했던가. 당시 김성애는 당 위에 군림하는 월권행위를 자행하기 시작했고, 점차 김정일은 물론 기존의 핵심 세력인 빨치산 세력에게까지 피로감을 가중시켰다. 신경완은 당시 상황에 대해 이렇게 묘사했다.
“김성애는 2인자로 행세했다. 문제는 기존 빨치산 원로들까지 무시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대신 자신의 혈육인 남동생 김성갑, 김성호 등을 당에 중용했다. 1973년 9월 여맹회의 공식석상에서도 김성애는 김정일을 두고 그저 ‘정일’이라고 호칭했다. 이 당시 공식적으로 김정일의 호칭은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 ‘친애하는 당중앙’으로 쓰였던 시기다.”
김성애의 몰락은 결국 도가 넘은 월권행위와 측근의 비리가 적발되면서 시작된다. 그리고 김정일과 김성애의 월권행위에 불만을 품은 기존의 빨치산 세력들이 본격적으로 결탁하면서 순식간에 이뤄진다. 탈북 작가 임일은 자신의 연재 기고문을 통해 김성애 권력이 최고정점에 있었던 1971년경 남동생 김성갑의 비리 사건이 그의 몰락에 있어서 결정적이었다고 지적한다.
그 일화는 이렇다. 김성애의 남동생 김성갑은 누나를 등에 업고 당 요직을 맡고 있었다. 김성갑은 이 시기 모친(김일성 장모)을 모시고 김일성광장 주석단 뒤에 위치한 평양의 중심부에 웅장한 저택을 신축해 살았다. 문제는 이 신축장소가 애초 김일성의 지시로 ‘인민대학습당(국립도서관)’이 들어설 곳이었다는 것. 당시 평양시당의 간부는 이 사실을 알았지만, 당시 김성애 라인에 서기 위해 신축 허가를 내주고 아부를 했던 셈이다. 결국 이 사실을 안 김일성은 김성애를 불러 노발대발 화를 냈다.
이를 기점으로 김일성과 김성애는 불화가 생겼고, 김정일과 빨치산 세력들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김정일은 이 시기 김성애와 그 측근세력의 비리를 들춰내며 본격적인 ‘곁가지 쳐내기’ 작업을 시작한다. 그동안 여맹을 중심으로 진행한 김성애 본인의 우상화 작업과 측근들의 마약, 착복, 문란한 성행위 등 범죄가 세상에 드러나게 되면서 김성애 라인은 서서히 무너졌다. 그리고 1974년 6월 평양시당 대회를 기점으로 김성애는 권력의 중심에서 멀어졌고, 자신의 모든 것이었던 아들 김평일은 1979년 유고 대사를 시작으로 현재까지 쓸쓸히 해외를 전전하고 있다.
김성애는 1994년 미국 카터 대통령 부부와의 회담 당시 잠시 모습을 드러낸 것 외에는 완벽하게 종적을 감췄다. 현재까지도 북한 최장수 대사로 지내고 있는 아들 김평일과는 만나지도 못하는 신세로 지냈다. 일설에 의하면 김성애는 1998년까지 여맹위원장 직함을 갖고 있었지만, 이미 숙청된 1974년을 기점으로 정치 무대에서 물러난 것으로 보고된다. 그리고 나머지 삶 대부분은 교외의 특각에서 ‘반 감금’된 채 지낸 것으로 보인다.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