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찬용 인사수석(왼쪽)과 고영구 국정원장 교체설의 배후에는 여권 내 영-호남그룹의 권력투쟁이 있다는 분석이다. 작은 사진은 후임으로 거론되는 이강철씨(왼쪽)와 권진호 안보보좌관. | ||
두 자리에 대한 교체설은 노무현 대통령이 ‘찔끔개편’이라는 일부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국면전환용이 아니라 수요가 생기면 그에 따라 언제든 인사한다”는 원칙을 강조해 왔던 점에 비춰 그 자체론 ‘있을 수 있는’ 일로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내막을 들여다 보면 사정이 간단치 않다는 것이 여권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특히 국정원장의 경우 교체설이 여권 내에서 이른바 ‘언론 플레이’를 통해 불거지고, 그에 대해 노 대통령이 부인하는 상황으로까지 이른 상태다.
개편설에 대해 그동안 인사문제를 놓고 사사건건 맞서온 영·호남 그룹의 ‘물밑 암투’가 주요 배경이라는 주장이 나오는 것도 예사롭지 않다. “대선, 총선에서 호남이 보여준 압도적 지지에 비해 인사에서 소외받고 있다”는 호남그룹의 주장과 “여권의 불모지인 영남지역 인사들을 중용해야 한다”는 영남그룹의 반박이 이번에도 맞부딪치고 있다는 것이다.
논란의 중심에 서 있는 고영구 국정원장과 정찬용 청와대 인사수석은 현 정권 출범을 전후해 임명한 노무현 1기 핵심 멤버다. 고 원장은 2003년 4월24일에, 정찬용 청와대 인사수석은 노 대통령이 당선자 시절인 2003년 2월6일 임명됐다.
이들에 대해 교체설이 나오는 요인은 여러 가지로 분석된다. 우선 6·30 개각을 필두로 일련의 여권 진용 개편을 통해 노 대통령 취임을 전후해 임명된 정부 고위직들이 줄줄이 물러나고 있는 상황을 꼽을 수 있다. 대략 1년 4~5개월여를 재임한 만큼 “할 만큼 했다”는 평가라 하겠다. 그러나 그보다는 여권 내 주요 세력간 권력투쟁의 반영이라는 평가가 더 우세하다.
두 자리 중 우선 관심이 가는 부분은 청와대 인사수석의 교체 여부다. 일단 정 수석의 거취에 대해선 머지않아 물러날 것이란 관측이 많다. 청와대 수석-보좌관 중 정권 출범 이후 현직을 유지하고 있는 이가 정 수석과 조윤제 경제보좌관 둘뿐인 데다 최근 들어 정 수석의 향후 거취를 점칠 수 있는 조짐들이 하나둘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여권 내에선 노 대통령이 지난 1일 정 수석의 ‘부재’ 중 문화재청장, 식품의약품안전청장 등 차관급 6명에 대한 인사를 단행한 것을 ‘경질 예고’로 받아들이고 있다. 당시 정 수석은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파나마를 방문(8월28일~9월4일)중이었으며 인사에 관여치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청와대 인사수석이 대통령 특사로 해외 방문에 나선 것도, 그나마 며칠 안되는 외유기간 중 인사수석의 고유업무인 정부 고위직 인사를 단행한 것도 이례적이라는 것이 여권 내 시각이다.
여권 한 인사는 이에 대해 “노 대통령이 정 수석을 대통령 특사로 중남미에 보낸 것은 교체를 염두에 둔 배려로 해석하면 될 것이다. 정 수석의 경우 광주시장 보선과 국회의원 재·보선 출마설이 나돌았지만 박광태 현 시장에 대한 무죄 판결과 불투명한 선거일정 때문에 물러나면 마땅히 옮겨갈 자리가 없는 상황이다. 노 대통령으로선 이 같은 점을 감안해 상대적으로 ‘격(格)’이 높은 대통령 특사로 마지막 예우를 한 것이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여권 내에서 정 수석의 사퇴설이 나오기 시작한 것은 대략 7월 하순께로 알려졌다. 그동안 영남그룹을 중심으로 한 ‘퇴진론’이 정점에 달했던 시기다. 이전만 해도 영남그룹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지 않던 노 대통령이 교체를 고민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인 것으로 알려졌다. 정보기관이 정 수석의 업무수행과 관련해 제기된 몇몇 의혹 사항에 대한 스크린에 들어간 것도 비슷한 시기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정 수석에 대한 영남그룹의 불만은 그가 정부 산하단체와 공기업 인사에서 ‘영남 배제, 호남 우대’의 경향을 보였다는 것으로 집중된다. 4·15 총선, 6·5 재보선을 거치며 배려해야 할 낙선자들이 많았던 영남권으로선 정 수석을 핵심 걸림돌로 여겼던 것이다. 열린우리당의 한 영남권 의원은 “상대적으로 노 대통령의 관심도가 떨어지는 정부 산하단체와 공기업 고위직 인사에서 정 수석이 ‘전횡’을 하고 있다는 불만이 여러 경로를 통해 청와대에 전달된 것으로 안다. 이를테면 정 수석이 김대중 정권 시절 해당 기관에서 고위직에 임명된 호남 출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다면평가제 등을 교묘히 악용하고 있다는 것 등이다”고 밝혔다.
영남그룹의 ‘정찬용 흔들기’가 효과를 내기 시작했음은 정 수석이 대통령 특사로 파나마로 떠난 8월28일 직후부터 영남인사들의 정부기관-공기업 요직 임명설이 갑자기 흘러나오면서 확인됐다. 공민배 전 창원시장(경남 창원갑 출마)이 대한지적공사에 8월30일 내정된 데 이어 김정길 전 행자부 장관(부산 영도 출마)의 민주평통 수석부의장 임명설, 추병직 전 건교부 차관(경북 구미 출마)의 대한주택공사 사장 내정설 등이 대표적인 예다.
그러나 영남인사 중용설의 ‘핵’은 노 대통령의 핵심측근인 이강철 열린우리당 국민참여운동본부장의 거취다. 특히 그가 청와대 인사수석을 맡을 것이란 얘기가 나오면서 이 본부장을 미는 영남그룹과, 정 수석의 현직 유지 또는 다른 호남인사로의 대체를 요구하는 호남그룹간 갈등도 불거지기 시작했다.
여권 관계자들에 따르면 이 본부장은 8월 중순 청와대에서 노 대통령과의 단독면담에서 정 수석의 후임으로 인사수석을 맡고 싶다는 의향을 개진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이날 노 대통령에 전국정당화를 위해 영남인사의 발탁이 중요하며 이를 위한 방편으로 영남인사가 인사수석을 맡는 것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밝혔으며 노 대통령도 공감을 표시했다는 후문이다.
‘이강철 인사수석’설이 거론되자 여권 내 호남그룹은 발끈했다. 가뜩이나 6·5 재보선을 계기로 호남 민심이 ‘탈 열린우리당’으로 흐르고 있는데 정 수석을 교체할 경우 “호남권이 뒤집어질 것”(A 의원)이라는 우려가 터져 나온 것이다. 이들은 특히 정 수석의 후임으로 이 본부장이 거론되고 있는 데 대해 알레르기 반응을 보였다. 6·5 전남도지사 보선에서 이 본부장이 주도적으로 제기한 영남발전특위 논란으로 선거에 패배했다는 인식 때문이었다.
전남의 한 의원은 “굳이 바꿔야 한다면 명망 있는 다른 호남 인사로 메워야지 왜 영남인사가 거론되는가. 영남권은 이미 청와대에 김병준 정책실장과 문재인 시민사회수석, 박정규 민정수석 등이 있고 비서관 수에서도 다른 지역에 비해 월등히 많지 않느냐. 만약 소문대로 이 본부장이 인사수석에 임명된다면 호남에서 난리가 날 것이다”고 말했다.
9월 초 뜬금없이 터져 나온 국정원장 교체설도 따지고 보면 영·호남 그룹간 세력 다툼의 산물이란 분석이 나온다. 고영구 원장의 거취가 최근 다시 거론된 배경은 대외적으로 외교-안보라인 전면 개편의 필요성에다 김선일씨 피랍-살해사건 과정에서 국정원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점, 그리고 고 원장의 원 운영과 조직장악력에 대한 비판적 평가 등으로 설명된다.
그러나 위의 요인 못지 않게 현 정권 출범 후에도 여전한 국정원 내 호남인맥의 요직 독점과 관련이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급격한 인적 쇄신 대신 ‘안정 속의 개혁’을 표방해 왔던 고 원장에 대해 영남그룹을 중심으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 확산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권진호 청와대 국가안보보좌관의 ‘사퇴 후 국정원장 이동’설을 언론에 흘린 장본인으로 영남 출신 한 여권 핵심인사가 거론되면서 이 같은 관측은 힘을 얻기 시작했다.
여권 내에선 권 보좌관의 거취 문제가 수면위로 부상된 배경을 고 원장의 사퇴를 기정사실화하기 위한 포석으로 해석하고 있다. 권 보좌관을 딱히 문책해야 할 별다른 사유가 없음에도 사퇴설이 나돈 것은 그가 국군 정보사령관과 국정원 1차장을 지내 정보기관의 생리와 운영에 정통해 국정원장감으로 손색이 없다는 여권 핵심부의 판단에 따른 것이란 분석이다. 권 보좌관의 교체 여부를 둘러싼 논란이 국정원장 교체설로 이어진 것은 애초부터 의도된 것이란 얘기라 하겠다.
여기서 영남그룹이 왜 고 원장을 비토하고 나섰는가가 궁금해진다. 영남그룹은 당초 현 정권 초대 국정원장으로 원로인 신상우 전 국회부의장을 적극 지원했다. 대선 동안 민주당 내 ‘반노-비노세력’과 연계했던 호남인맥을 정리하기 위한 적임자로 영남그룹의 원로인 ‘신상우 국정원장’ 카드를 밀었던 것이다.
그러나 내정단계에까지 이르렀던 신 전 부의장 카드는 노 대통령 주변 386그룹들의 반대로 좌절됐다. 영남그룹은 고 원장 임명 당시만 해도 그가 호남인맥 정리에 적극성을 띨 것이란 기대를 표명했다. 그러나 막상 고 원장이 ‘조직 안정’을 내세워 물갈이 대신 소폭의 기구 개편과 보직 이동 선에서 인사를 매듭짓자 영남그룹의 고 원장에 대한 평가는 급격히 악화됐다.
영남권 한 핵심인사는 “국정원 개혁의 수위와 속도를 놓고 고 원장과 서동만 전 기조실장이 대립했을 때 영남권 여권 인사들은 절대적으로 서 전 실장을 지지했지만 노 대통령은 고 원장의 손을 들어줬다. 그후 4·15 총선 시기까지 국정원은 영남권 인사들에게 전혀 정보다운 정보를 제공하지 않았다. 나중에 국정원 국내 파트의 요직이 여전히 호남인맥들로 채워져 있다는 얘기를 듣고 영남인사들이 분개한 적이 있다. 고 원장에 대한 불신이 ‘바꿔야 한다’로 바뀐 것은 대략 총선 한 달 후인 5월 중순 경부터다”고 말했다.
고 원장의 거취 논란은, 외교-안보라인 대폭 개편설로 번지며 파문을 낳자 노 대통령이 “국정원장 인사를 생각한 바 없다”(9월3일)고 밝혀 일단 수면밑으로 잠복한 상태다.
그러나 사퇴설이 공공연히 거론된 마당에 고 원장이 길게 지금 자리에 앉아 있지는 않을 것이란 관측이 많다. 구체적으로 노 대통령의 러시아 방문 등이 끝나고 난 뒤인 10월 초·중순이 교체시기로 꼽힌다. 아울러 ‘권진호 원장’을 전제로 세 명의 차장(1-2-3차장)도 교체할 것이란 얘기도 나오고 있다.
이준원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