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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경찰서 형사계 사무실만큼 다양한 사연을 지닌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또 있을까. 지난 3일 오전 경기도 안산경찰서에서 만난 30대 여인 구연화씨(가명?4)의 과거 또한 남달랐다. 경찰에 따르면 그녀는 지난 96년 11월부터 99년 5월까지 2년 6개월 동안 모두 16차례에 걸쳐 남편의 술과 음료에 극약을 탄 혐의. 경찰은 지난 7월31일 이 같은 혐의로 구씨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무시하는 남편과 무시당하는 부인. 오랜 갈등의 시간을 거쳐 마침내 극약을 먹고먹이는 살벌한(?) 관계로 발전하기까지, 이들이 걸어온 지난 5년간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봤다.
‘내가 이대로 살아서 뭐해. 그냥 먹고 죽자.’ 지난 96년 11월6일 오후 4시, 집에서 약봉지를 뜯는 그녀의 손은 서러움에 복받쳐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어제 일만 해도 그랬다.
전날 부부는 남편 친구들과 집 앞 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셨다. 술자리에서 헤어져 귀가한 뒤 남편 친구들은 남편의 안부를 전화로 물어왔다. 아내는 ‘별일 없다’는 대답을 해주고 전화를 끊었다. 이에 ‘전화를 바꿔주지 않았다’며 임신 8개월째인 자신을 구타했던 남편.
문득 그녀의 머릿속에는 얼마 전의 일도 떠올랐다. 당시 그녀는 경기도 수원의 미용실에서 피부미용사로 일하고 있었다. 하루는 미용실을 찾은 손님 가운데 한 명이 그녀에게 ‘쪽지’를 건네왔다. 이전부터 싫다는 그녀에게 무선호출기를 사주는 등 환심을 사려했던 바로 그 남자였다.
별 생각없이 호주머니에 메모를 넣어둔 아내는 귀가 후 뜻밖의 일을 당하고 만다. 엉뚱하게도 그 메모가 남편의 손에 들어가게 된 것. 그때부터 온 집안에 난리가 났다. 마침 집에는 친정 어머니도 있었는데 남편은 그 앞에서 부인을 다짜고짜 구타했다. 그녀는 그 일로 짐을 싸 친정으로 도망갔었다.
자살을 결심했던 아내의 머릿속에 지난 날의 기억들이 스칠 무렵, 그날따라 일이 커지려고 그랬던 것일까. 6시에 귀가하던 남편이 뜻밖에도 두 시간이나 일찍 집에 돌아왔다. 남편이 “야, 먹다남은 술 좀 가져와봐”라며 소리질렀을 때 그녀는 순간 ‘못된 생각’을 품게 된다. ‘만약 저이가 없어진다면….’
‘먹으면 죽는 약’을 먹어야 할 사람은 순식간에 그녀가 아닌 남편으로 바뀌었다. 아내가 먹으려고 했던 약은 소주 반 병에 녹은 채 남편에게 건네졌다. ‘소주에 웬 건더기가 있지….’ 남편은 소주에서 뭔가 씹히는 것을 느꼈지만 그때는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두 번째 ‘투약’은 그 다음 해인 97년 5월에 있었다. 그때도 남편은 어김없이 K병원으로 실려갔지만 목숨은 건질 수 있었다. 사정은 98년 5월 세 번째 투약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몇 차례의 ‘임상실험’을 거쳐 아내는 소주 반 병이나 한 병에 약 한 봉지를 타면 그대로 쓰러진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그때부터 아내는 작전(?)을 변경했다. 소주 대신 남편이 즐겨 마시는 대용량 헬스음료에 약을 타기로 한 것.
남편은 헬스에 취미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거의 매일 5백∼6백cc짜리 빈 통에 5백cc가량의 주스와 근육강화제를 섞어 마셨다. 바로 이 음료에 약을 탔던 것. 아무래도 용량이 많은 주스에 탔던 만큼 효과는 덜 했다. 경찰에 따르면 그녀는 이 점을 노렸는지도 몰랐다.
남편의 몸 속에 약기운이 조금씩 쌓여가면서 병원에 실려가는 횟수도 점점 늘었다. 혀가 검게 변하는가 하면, 상처가 나면 피가 멎지도 않았다. 약간만 부딪혀도 시퍼렇게 멍이 들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남편은 지난 99년 5월 병원에 입원해 상태가 좋지 않은 소장 30cm를 잘라내야 했다.
그때까지 병명조차 파악하지 못했던 남편은 지난 2000년 7월 서울 S병원으로 옮긴 뒤에야 자신의 이름모를 병이 비타민 K3 결핍 때문에 생겼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 와중에 아내가 집을 나가는 사건이 벌어진다. 당시 아내가 가출한 사유는 이랬다. 아내의 주장에 따르면 지난 92년 3월에 결혼한 뒤로 남편은 줄곧 그녀가 가진 것이 없다며 구박했다고 한다.
이런 남편의 마음을 바꿔보려고 그녀는 “강원도에 엄마에게 물려받은 산이 있는데 그곳에 도로가 생긴다. 시가로 따지면 1억원에 이른다”는 거짓말을 했다. 컴퓨터로 1억원이 입금된 통장 속지를 출력해 통장에 붙인 뒤 남편에게 보여주기도 했다. 남편의 환심을 사기 위해 돈을 빌려 지프형 승합차까지 사준 아내는 그 빚을 갚기 위해 갖은 고초를 겪어야 했다.
인근 공단의 한 회사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남편의 월급으로는 그 빚의 이자조차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불어가는 빚을 감당하지 못한 아내는 결국 남편이 입원해 있는 틈을 타 훌쩍 도망가 버린 것. 이 일로 그녀는 사기혐의로 고소돼 경찰에 쫓기는 신세로 전락한다.
한편 부인의 가출 이후 병원에서 퇴원한 남편은 집안을 살피던 도중 냉장고 뒤에서 수상한 물건을 발견하게 된다. 바로 쥐약 봉지. 봉지 뒷면에는 ‘해독을 위해서는 비타민 K3 복용’이란 내용의 문구가 써있는 것이 아닌가.
순간 자신의 이름모를 병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깨달은 남편은 곧바로 경찰에 신고를 했다. 이런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던 아내는 가출생활이 2년째 접어들던 지난달 아이들을 보고 싶은 마음에 채권자들과 합의를 한 뒤 안산경찰서 조사계를 ‘스스로’ 찾았다. 하지만 정작 그녀를 기다린 곳은 조사계가 아닌 형사계 형사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