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이름만 들으면 누구나 알 만한 국내 유명 대기업 임원. 가정에는 한창 커가는 아이들이 있을 것이다. 막내는 이제 중학교를 다니고, 큰 아이는 갓 대학에 입학했을지도 모른다. 그동안 앞만 보고 열심히 달려온 덕분에 회사에서도 가정에서도 당신의 위치는 흔들리지 않을 만큼 탄탄하다.
이제 모든 고생이 끝나고 달콤한 미래만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았던 당신. 어느날 사무실 책상 위에 ‘발신인 불명’의 수상한 편지 한 통이 배달된다. 당신이 평생을 바쳐 쌓아올린 행복이라는 이름의 작은 성은 그 편지를 받는 순간 흔들리게 된다. 당신의 머릿속도 갑자기 복잡해진다. 바로 남 몰래 저지른 ‘불륜’ 때문에.
“나는 당신이 좋아하는 포르노 업자인데 며칠 전 당신의 불륜증거를 입수하게 됐다. 포르노 업계에 있다보니 이렇게 부수입을 올릴 수 있는 보물도 얻게 됐다. 불륜증거를 돌려받고 싶으면 아래에 있는 은행계좌로 1백만원을 송금해라. 입금확인 후 우편으로 증거물을 보내주겠다. 직접 돌려받고 싶으면 시간과 장소를 정해 이메일로 연락해라. 문제를 시끄럽게 하고 싶으면 마음대로 해라. 만약 성질 건드리면 즉시 가족들에게 알리겠다.”
지난 두세 달 동안 수많은 ‘당신’들에게 배달된 수상한 편지의 전문이다. 편지를 보낸 장본인은 서른여섯 살의 사내 조명국씨(가명). 그는 ‘불특정 다수’의 대기업 임원들에게 비슷한 내용의 협박편지를 보내 ‘제 발이 저린’ 이들로부터 돈을 뜯어내다 최근 경찰에 붙잡혔다.
조씨는 O대학 치의예과를 중퇴한 뒤 일정한 직업 없이 지내던 백수. 금품을 노린 범죄의 상당수가 카드빚 때문에 시작되듯 조씨 역시 무려 4천여만원에 이르는 카드빚을 지고 있던 상태였다. 빚과 생활고에 떠밀려 공사현장을 떠돌던 그에게 불현듯 ‘영감’이 떠오른 것은 지난 4월. 당시 국내 몇몇 언론에 보도된, 일본에서 벌어진 한 황당한 사건을 접한 뒤였다.
이 사건은 흥신소 직원을 사칭하는 사토 사토루(44·무직)란 사람이 불특정 다수의 중년남성들에게 불륜을 폭로하겠다는 내용의 거짓 편지를 보내 돈을 뜯어낸 기상천외한 공갈협박극이었다.
범인 사토는 일본내 민간 신용조사기관이 작성한 회사별 중역 명단과 고액 납세자 명단에서 무작위로 범행 대상을 골랐다. 이 가운데 도쿄와 사이타마, 지바, 가나가와 등 일본 수도권에 사는 회사 중역 수백 명을 가려뽑은 범인.
그는 이들에게 보낸 협박편지에서 “당신이 바람 피운 증거를 확보하고 있다”면서 “증거물을 없애는 대가로 50만엔(약 5백만원)을 지정한 계좌로 입금하지 않으면 불륜 사실을 집과 이웃, 회사 등에 폭로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더욱 어처구니없는 것은 이 허술한 협박 편지를 받은 사람들 가운데 속아넘어간 이들이 적지 않았다는 사실.
지난 4월 인터넷을 뒤적거리다 이 기사를 본 조씨는 순간 무릎을 쳤다. 더 이상 신용카드도 쓸 수 없던 상황이라 돈이 절실히 필요했던 것. 먼저 그는 인터넷 증권거래소 사이트를 검색해 국내 주요 상장회사의 대표 및 임원 현황을 파악했다. 이 가운데서 불륜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40∼50대 임원 2백50여 명을 골라냈다.
범행에 필요한 은행계좌는 인력시장에서 만난 유아무개씨(34)에게 5만원을 주고 두 개를 개설할 수 있었다. 이메일 역시 다른 사람의 명의를 도용해 10여 개를 개설해 둔 상태. 만반의 준비를 마친 조씨는 지난 4월17일부터 두 달여 동안 모두 2백50여 명의 대기업 임원들에게 불륜을 폭로하겠다는 공갈 협박 편지를 보냈다.
괴편지를 받은 중년 임원들의 반응은 조씨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다양했다. 가장 흔한 유형은 일단 “증거가 있다면 다시 연락달라”며 짐짓 큰소리를 쳤던 타입. 협박받은 사실을 경찰에 신고했던 몇몇 피해자들은 이 유형에 가까웠던 사람들이다.
두 번째는 ‘읍소형’. 조씨의 근거없는 협박에 겁부터 집어먹고 통사정을 했던 케이스다. 피해자들이 답답한 나머지 “어쩌다보니 술 좀 마시고 실수한 것 같은데 증거를 가지고 있다면 용서해달라”며 매달리는 경우도 있었다. 심지어 한 피해자는 조씨가 밝힌 이메일 주소로 만날 시간과 장소를 통보한 뒤 약속장소에 나가 혼자 한 시간 가량 기다리기까지 했다.
가장 황당한 유형은 끽소리 없이 조씨가 요구한 대로 돈을 보내준 ‘순종형’. 경찰에 따르면 이 부류에 속한 9명의 피해자들은 대체로 불륜의 사실여부와 상관없이 구설수에 오르는 것 자체를 꺼려 돈을 보냈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피의자가 요구했던 금액이 1백만원에 ‘불과’했다는 점도 부유층 피해자들이 순순히 돈을 보내게 됐던 이유 중 하나였다.
협박 편지로 두 달 만에 9백만원을 손에 거머쥔 조씨. 그는 이 돈마저 유흥비로 탕진한 뒤 다시 협박행각을 이어가다 지난 6월21일 서울경찰청 기동수사대에 붙잡혔다.
지난 6월27일 경찰에서 조사를 받고 나가던 한 피해자는 “회사마다 조금씩 틀리기는 하지만 대기업 대표이사쯤 되면 대부분 비서들이 우편물을 개봉해서 내용물만 갖다준다”며 “이렇게 황당한 편지가 오면 사실 관계를 떠나 일단 비서들 보기가 민망스럽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그는 또 “그 자리에 있다보면 접대를 비롯해 술자리가 워낙 많기 때문에 이런 협박을 받으면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고 토로했다.
자신이 황당한 사건의 등장인물이 됐다는 사실에 어처구니가 없었던 것일까. 이 피해자는 조씨를 빗대 “돈을 벌어먹는 방법도 참 가지가지”라고 말한 뒤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단독] 배우 김사랑 소유 김포 아파트 세무당국에 압류…체납 사유·금액 ‘눈길’
온라인 기사 ( 2026.05.15 14:54: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