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재벌그룹 회장이 나를 변호사로 선임하겠다는 연락이 왔다. 이상했다. 그 재벌그룹에는 수백 명의 변호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를 선택한 이유는 간단했다. 담당 재판장과 내가 가장 친하다는 것이었다. 그건 사실이었다. 회장실로 오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나는 잠시 생각했다. 그것은 삶의 철학관에 관련된 것이었다.
작은 개인법률사무소를 차린 목적은 자유인이 되고 싶어서였다. 굶지만 않으면 디오게네스처럼 당당하고 싶었다. 상대방에게 열등감을 갖는 것은 그와 똑같은 잣대로 자신을 재기 때문이다. 부자 앞에서 비열해지는 건 그 부자에게 신세를 져볼까 하는 마음 때문이다. 권력자에게 아부하는 건 그의 힘을 업어 출세해 보겠다는 마음 때문이다.
돈은 물론 필요하다. 그러나 칼라일의 말처럼 속인의 속박을 면할 정도만 되면 될 것 같았다. 교사나 목사 그리고 변호사 같은 전문직은 약간의 자존심이 본질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룹 회장에게 변호사가 필요하시다면 오시라고 했다. 회장의 심기가 상한 것 같았다. 그 그룹의 해외지사에 근무하는 친척 형에게 본사 소환명령이 떨어졌다. 명문대를 나오고 이사까지 된 친척 형은 애처로울 정도로 나에게 사정했다. 내가 졌다.
회장은 한 시간 이상 친척 형과 나를 대기시켰다. 그러다 들어간 회장실 풍경을 보고 나는 더 씁쓸했다. 고교동기인 그룹의 임원들이 모여 있었다. 얼굴 표정에는 하나같이 모멸감이 서려 있었다. 회장과 단둘이 되었을 때 그에게 속삭였다. 그런 유치한 연출을 하시니까 기분이 좋으시냐고. 며칠 후 밤늦게 회장이 몰래 사무실을 찾아왔다. 나는 회장을 근처의 허름한 음식점으로 안내해서 국수 한 그릇을 샀다. 작은 돈이지만 내가 국수 값을 지불하니까 마음이 가벼웠다.
회장은 내면이 공허한 사람 같았다. 재벌그룹의 이런저런 고민을 털어놓았다. 그 역시 나약한, 고용된 허수아비 회장이었다. 사람들은 꼭 냄새를 풍기려고 한다. 돈 있으면 돈 냄새를 풍기고 권력이 있으면 권력 냄새를 풍긴다. 근육질의 조폭들도 원색의 힘의 냄새를 자랑한다.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가야금 명인이 된 황병기 씨 인터뷰를 본 적이 있다. 그는 ‘소년이여 야망을 가지라’는 소리가 가장 싫었다고 했다. 50년이 넘게 기타 하나에 목숨 건 록뮤직 대부 신중현 씨가 70대의 뮤지션으로 아들과 함께 연주하는 모습도 좋았다. 진짜한테서는 냄새가 나지 않았다. 껍데기가 아닌 속이 꽉 찬 사람이 많은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엄상익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