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라 부르더니…술 취해 짐승 돌변
지난해 12월 31일 ‘인천 여행가방 할머니 살인사건’의 피의자인 정형근 씨에 대한 현장검증이 이뤄졌다. 작은 사진은 정 씨의 수배전단. 연합뉴스
A 군(17)의 신고가 접수된 건 지난해 12월 22일 오후 3시 7분경이었다. 하교 중 인천 남동구 간석동의 한 빌라 앞을 지나던 고등학생 두 명은 수상한 여행가방 하나를 발견했다. 시신을 성인용품 쯤으로 추측했던 경찰은 신고 접수 한 시간 만에 현장에 도착했다. 가로 60㎝, 세로 40㎝, 두께 30㎝의 여행가방 안에는 작은 체구의 전 아무개 할머니(71)가 반으로 접힌 채 참혹한 모습으로 들어 있었다. 머리는 둔기에 맞아 일부 함몰된 상태였고, 오른쪽 옆구리, 목 등 5군데에서 흉기에 찔린 흔적이 발견됐다.
경찰은 범인의 대담한 시신 유기 방식에 놀랐다. 보통의 살인범이 야산이나 인적이 드문 곳에 시신을 유기하는 데 비해, 범인은 사람들 눈에 띄기 쉬운 주택가에 시신을 버렸기 때문이다. 가방이 발견된 빌라 인근 CC(폐쇄회로)TV를 분석한 결과 유력한 용의자는 정형근 씨였다. 21일 오후 10시 10분경 빌라 담벼락에 여행용 가방을 놓고 자리를 뜨는 정 씨의 모습이 고스란히 CCTV에 잡혔다.
정 씨는 평소 전 씨 할머니와, 그 딸과도 친하게 지내온 사이였다. 전 씨 할머니는 인천 부평구에 있는 한 시장에서 야채가게를 운영하고 있었고, 할머니의 딸 역시 인근에서 포장마차를 꾸렸다. 일용직 노동자였던 정 씨가 동료들과 함께 전 씨 할머니의 딸이 운영하던 포장마차에 자주 들르면서 자연스럽게 가까워졌다. 정 씨는 할머니의 딸과 교회를 나가기도 하고, 전 씨 할머니를 ‘어머니’라 부를 정도로 친한 사이였다.
사건의 발단은 술이었다. 20일, 전 씨 할머니와 정 씨는 할머니의 야채가게에서 낮부터 술잔을 기울였다. 소주 3병을 나란히 나눠 마시고도 성에 차지 않았던 두 사람은 정 씨의 집으로 가 한 잔 더 하기로 했다. 할머니는 딸에게 “잔칫집에 간다”고 말하고 가게 문을 닫았다. 시장을 나온 두 사람은 오후 5시경 택시를 타고 간석동에 있는 정 씨의 집으로 향했다. 두 사람이 나란히 걸어가는 장면이 CCTV에 잡혀 공개되기도 했다. 처음 방문한 정 씨의 집이 사지가 될 줄은 전 씨 할머니는 꿈에도 몰랐다.
이미 술에 취한 상태였던 정 씨는 할머니를 상대로 욕정을 품었다. 다가가 바지를 벗기려고 했지만 할머니는 거세게 저항했다. 화가 난 정 씨는 옆에 있던 머그컵을 들어 할머니의 머리를 내리쳤다. 우발적으로 저지른 폭행이었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미동이 없는 할머니를 보고 정 씨는 두려움이 일었다. 일단 시신을 감춰야겠다는 생각에 화장실로 끌고 가 여행가방을 찾아왔다. 하지만 할머니는 여전히 살아 있는 상태였다. 정 씨는 부엌에서 칼을 들고 할머니를 수차례 찔러 살해했다.
정 씨가 피해자와 함께한 모습(위)과 시신 유기 후 이동 모습 등은 고스란히 CCTV에 잡혔다. 사진제공=인천남동경찰서
일요일이었던 21일, 정 씨는 전 씨 할머니 가족의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 평소처럼 교회에 출석했다. 할머니의 딸은 “어제 어머니가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고는 했지만 특별히 걱정하는 것 같진 않았다. 다음날인 월요일에도 포장마차를 찾았다. 정 씨가 포장마차를 찾았을 때는 전 씨의 가족이 실종신고를 한 뒤였다. 신고를 접수하고 딸을 상대로 경위를 조사하러 온 경찰을 보고 정 씨는 포장마차를 나섰다.
이후의 도피생활은 더욱 허술했다. 평소 갖고 있던 아들의 체크카드와 휴대폰만 들고 정처 없이 걸었다. 개봉동에서 아들 명의의 체크카드로 현금 45만 원을 찾고, 지인에게 전화를 걸기까지 했다. 10시간 가까이 걸어 문래동의 한 모텔에서 23일 숙박하고, 다음날 오전 모텔에서 나와 다시 정처 없이 걸었다. 이틀간 관악산 바위 밑에서 잠을 자며 도피생활을 하다가 또 다시 남산에서 이틀 간 노숙했다. 28일에는 남산 인근 해방촌 등지를 배회하다가 다음날 을지로 4가로 이동했다. 노숙하며 도피하는 기간 내내 술은 하루도 거르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졌다.
정 씨가 덜미를 잡힌 것도 술 때문이었다. 을지로 4가에서 노숙인들을 술친구 삼아 공원에서 함께 막걸리, 소주 등을 마셨다. 어느 정도 술기운이 오른 상태에서 술이 떨어지자 정 씨는 호기롭게 “술을 사오겠다”며 인근 편의점으로 향했다. 추적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은 채 아들의 체크카드로 술값을 결제했다. 결제 내역은 곧바로 경찰에 접수됐고, 정 씨는 현장에서 체포됐다.
검거된 정씨는 수배 전단에 나온 모습 그대로였다. 옷 한 번 바꿔 입지 않고 다녔던 것이다. 수사를 담당했던 인천 남동경찰서 관계자는 “알코올 중독 수준이었던 정 씨가 언젠가 술에 의한 실수로 체포될 것으로 예상했다”고 말했다.
경찰 관계자는 “묵묵히 조사에 응하던 정 씨가 아들이 장문의 편지를 들고 경찰서에 오자 대성통곡했다. 정 씨와 달리 반듯한 아들의 심성이 인상 깊었다. ‘아버지가 살아계신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죗값을 치르고 나올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적었더라”며 “정 씨는 프로파일러에게 장시간의 조사를 받고 있다”고 밝혔다.
서윤심 기자 hear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