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은 지난 9월14일 오전 광주 북구 용봉동의 한 아파트에서 일어났다. 당시 홀로 집을 지키던 여대생 손아무개씨(22)가 침실에서 손과 발이 묶인 상태에서 하의는 벗겨지고, 얼굴에는 그 모습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비닐테이프가 칭칭 감겨진 채로 발견됐던 것.
사건을 담당한 광주 북부경찰서 관계자는 당시 “범행수법으로 보아 원한관계에 의한 계획적인 살인으로 보인다. 손씨의 하의가 벗겨진 것도 범행과정에서 범인이 성폭행을 하려 했기 때문이 아니겠나”라며 사건 해결에 자신감을 내비쳤다.
경찰은 손씨의 아파트가 13층으로 고층인 데다가 외부 침입의 흔적이 없는 점을 들어 범인이 아파트 출입문으로 들어와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보았다. 또한 손씨의 아파트 출입문은 비밀번호를 입력해야 열리는 전자식 출입문이어서 손씨가 출입문을 열어줄 만큼 잘 아는 사람이나 비밀번호를 알고 있는 자의 소행으로 추정했다. 일단 용의자의 범위가 ‘손씨 주변 사람’으로 좁혀졌던 셈이다.
그러나 사건 발생 1백일이 지나도록 경찰은 단 한 명의 뚜렷한 용의자도 확보하지 못했고, 수사도 벽에 부딪친 상태다. 한 수사 관계자는 “초기에 분명하게 보이던 것까지 시간이 지나니 모든 게 의혹투성이다. 지금 상황에서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애초에 추정했던 원한관계에 의한 살인 가능성도 자신 있게 말 못하겠다”라며 수사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한 예로 범인이 손씨의 하의를 벗겨 놓은 것도 처음엔 성폭행의 흔적으로 보았으나 경찰은 손씨의 시신을 부검한 결과 성폭행은 없었다고 결론지었다. 한 수사 관계자는 “부검 결과 정액음성반응이 나왔고 성폭행의 흔적은 전혀 없었다. 범인이 수사에 혼란을 주기 위해 일부러 손씨의 하의를 벗긴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그렇다면 도대체 사건 당일 손씨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났던 걸까.
경찰이 밝힌 바로는 거실에서 범인과 손씨의 다툼이 있었고 이 과정에서 손씨가 얼굴과 머리에 타박상을 입고 피를 흘린 것으로 추정된다. 그뒤 범인이 손씨를 완전히 제압한 후 침실로 끌고가 손씨의 손과 발을 결박하고 얼굴 전체를 노란색 비닐테이프로 동여매 질식시켰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건 현장인 손씨 아파트 거실과 침실에 범인이 남긴 흔적은 아무 것도 없었다.
경찰이 가장 의문스러워 하는 것은 거실의 발자국. 경찰은 거실에 손씨의 족적과 피가 어지럽게 흩어져 있던 것으로 보아 범인이 손씨와 거실에서 심하게 다툰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거실에는 범인의 족적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한 수사 관계자는 “범인이 신발을 신고 거실로 들어왔든, 맨발로 들어왔든 족적을 남기지 않을 수는 없었을 텐데 족적은커녕 족적을 지운 흔적도 찾아보기 어려웠다”고 말했다.
‘원한관계에 의한 면식범의 소행’이라는 경찰의 ‘가설’과는 달리 손씨 주변 인물들에게서 별다른 용의점을 발견하지 못한 것도 수사를 미궁에 빠지게 한 요인 중 하나.
사체 부검 결과 손씨는 오전 9시에서 10시 사이에 피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시각은 손씨 가족들이 모두 외출하고 손씨가 혼자 남아 있던 시간대. 범인이 손씨 가족의 생활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자라는 추측이 가능한 대목이다.
또한 경찰은 범인이 손씨를 완전히 제압한 후 보다 용이하게 살해할 수 있음에도 굳이 비닐테이프로 얼굴을 감는 엽기적이고 어려운 방법을 사용한 점을 들어 ‘원한관계에 의한 살인’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문제는 손씨 주변 인물들 가운데 손씨 가족과 원한을 맺었거나 사건 전후로 수상한 기색을 보인 이들이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 한 수사 관계자는 “수사에 착수하자마자 손씨와 손씨 가족 주변의 모든 인물에 대해 조사하고, 사건 당일 행적에 대해 샅샅이 뒤져봤지만 의심 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털어놨다. 이제 ‘원한관계에 따른 면식범의 범행’이라는 가설 아래서는 용의자를 찾아내기가 더 어려워진 셈이다.
한 수사관은 “혹시 면식범 외에 손씨의 아파트를 쉽게 드나들 수 있는 자의 소행일 가능성도 염두해 두고 가스검침원, 음식점 배달원, 세탁소 종업원 등을 상대로 탐문수사도 해 봤지만 소득은 없었다”고 말했다. 이 수사관은 “이젠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두고 수사를 진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경찰이 하나 기대를 걸고 있는 것은 사건 현장에서 범인이 들고 간 손씨의 휴대폰에 담긴 ‘비밀’이다.
범인은 현장에 족적, 지문, 머리카락 하나 남기지 않을 정도로 주도면밀하게 범행을 했다. 손씨의 얼굴에 감을 노란색 테이프까지 미리 준비해왔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 테이프에도 지문이나 옷감 부스러기 등이 하나도 묻어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범인은 고무장갑을 끼고 범행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듯 철두철미한 범인이 손씨의 휴대폰을 따로 들고 간 까닭은 대체 무엇일까.
한 수사 관계자는 “집안의 다른 물건은 그대로 두고 손씨의 휴대폰만 가져간 것으로 보아 휴대폰에 범인을 특정지을 만한 단서가 있지 않나 생각된다”라고 말했다. 위치 추적 결과 손씨의 휴대폰은 사건 당일 오후 남구 월산동 동신대 한방병원 인근에서 전파가 확인됐지만 끝내 발견되지는 않았다.
이렇듯 단서 하나 없이 수사가 제자리만 맴돌자 일각에서는 “이대로라면 범인이 자수를 하더라도 검사가 기소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자조 섞인 반응까지 나온다. 한 수사관은 “물증이 있어야 기소를 할 텐데 설사 범인이 자백을 하더라도 법정에서 부인해버리면 무죄로 풀려날 판이다”고 전했다.
또 다른 수사 관계자는 “증거를 남기지 않은 점도 그렇고, 범인이 매우 차분하고 침착한 것 같다. 웬만한 범죄자들은 이렇게 하라고 해도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의문이 쌓여가는 손씨 사건. 하지만 수사팀은 포기하지 않고 ‘얼굴 없는 범인’을 끝까지 추적할 것이라고 다짐하고 있다. “총성이 들리지 않는다고 전쟁이 끝난 건 아니다.” 한 수사관이 남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