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네가 누구인지 알고 있다
▲ 화성연쇄살인사건을 다룬 영화 <살인의 추억>의 한 장면. 앞에 합성한 용의자 사진은 7차사건 수사 당시 실제 목격자들의 진술을 토대로 작성한 몽타주다. | ||
현상금 500만원
▣용의자 인상특징
○나이 : 24~27세가량
○신장 : 165~170cm가량
○머리 : 스포츠형
○코가 우뚝하고 눈매가 날카로움
○얼굴 : 갸름하고 보통 체격
○평소 구부정한 모습
-88년 9월7일 밤 9시30분에 조암에서 출발하여 수원으로 오는 시외뻐스에서 위와 같은 인상을 가진 자가 가재리에서 승차하는 것을 보신 분
영화 <살인의 추억>으로 더 유명해진 화성연쇄살인사건 7차 사건 당시 경찰이 작성해 배포한 수배전단이다.
베일 속의 범인은 부녀자를 상대로 강간하고 목 졸라 살해한 후 피살자의 블라우스, 목도리, 속옷 등으로 결박하고 은밀한 부위에 역시 피살자의 포크나 우산 등으로 난행을 잇달아 저질러 십수 년 전 전국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이 사건의 범인이 살아 있다면 아마도 지금쯤 40대 중후반의 나이가 되었을 것이다. 화성연쇄살인사건 9건 중 대부분은 공소시효가 만료됐고 8차 사건과 9차 사건만이 공소시효가 지나지 않았다.
그나마 이 두 건마저도 올해 11월과 내년 4월이면 공소시효가 끝나 자칫 화성연쇄살인사건은 영구 미제로 남을 상황이다.
화성연쇄살인사건이 동일범의 소행이 아니라는 논란도 있었지만 당시 담당 형사였던 하승균 전북 임실경찰서장은 <화성은 끝나지 않았다>는 책에서 86년 9월부터 91년 4월까지 저질러진 9건의 연쇄살인사건이 동일범에 의한 소행이라고 밝혔다.
하 서장은 9개 사건의 범행 수법이 유사하고 피살자를 결박하는 매듭의 모습과 살해 후 피살자의 현금을 모두 가져간 점, 5건의 사건현장에서 모두 검출된 정액과 B형 혈액형 등을 그 이유로 꼽았다.
또한 하 서장은 7차 화성 사건의 목격자와 유일한 생존자인 김아무개씨(45)의 진술을 바탕으로 범인이 남자로서는 다소 작은 168cm 내외의 키에, 갸름한 얼굴형과 방위형의 짧은 머리를 지녔었다며 그 특징과 범인의 몽타주를 책에서 소개하기도 했다.
그러나 경찰은 범인의 인상착의를 확보했음에도 검거에는 실패했다. 그렇다고 경찰 수사가 끝난 것은 아니다. 팀원이 4명으로 줄어들긴 했지만 태안지구대에 설치된 수사본부도 아직 추적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특히 경찰은 지난 99년부터 프로파일링(profiling·범죄유형분석으로 범인의 특징을 알아내는 수사방법)기법을 도입, 물밑에서 화성연쇄살인사건 해결에 매달리고 있다.
화성연쇄살인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프로파일링에 입문하게 됐다는 서울경찰청 과학수사계 권일용 경사는 “화성사건은 프로파일링의 교과서 같은 사건이다. 그러나 화성사건이 발생할 당시는 프로파일링에 대한 개념조차 없던 시절이라 관련된 자료가 축적되지 못해 15년이나 지난 사건을 정확하게 프로파일링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권 경사에 따르면 프로파일링을 하기 위해선 범행현장을 직접 확인해야 하나 현장 사진만으로 범죄유형을 구체적으로 분석하기 어렵다는 것.
그럼에도 ‘범행에는 일정한 패턴이 존재하고 특히 동일범에 의한 연속된 범행은 범인의 신상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제공한다’는 프로파일링의 관점에서, 미궁 속의 화성연쇄살인사건은 프로파일링 전문가들이 한 번쯤 도전하고 싶어 하는 사건이다. 그렇다면 과연 프로파일링 전문가들은 화성연쇄살인사건 범인의 윤곽을 어떻게 그리고 있을까.
먼저 전문가들은 피살자들이 납치된 지점을 주목하고 있다. 1차 사건의 이아무개씨(71)만을 제외하고 피살자들은 모두 버스정류장 근처에서 납치·살해됐다. 이에 대해 프로파일링 전문가들은 범인이 당시 이 지역 버스를 자주 이용하던 사람, 즉 범행장소인 화성과 인근의 수원 지역 거주자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동국대 임준태 교수(39·경찰행정학)는 “피해자가 납치된 지점과 사체가 유기된 장소로 보아 범인은 화성 일대에 거주지 수준의 분명한 연고를 가지고 있고 화성시 화산저수지를 중심으로 반경 4.2km 내에 거주하던 사람”이라고 설명했다.
임 교수는 지리학적 프로파일링(Geographic Profiling·연쇄범행의 규칙성으로 범인의 은신처를 과학적으로 추정하는 방법)기법을 도입해 미국과 캐나다의, 10차례 이상 살인을 저지른 연쇄살인범들의 특징을 분석한 결과 ‘범인이 연쇄살인 중 8번째 사건부터 자신의 거주지로부터 반경 4km 내에 사체를 유기한다’는 통계를 제시했다.
이에 대해 또 다른 전문가는 “미국과 캐나다와 달리 당시 화성에서는 자가용 승용차가 드물었고 범인이 이용 가능한 교통수단이 버스가 유일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화산저수지를 중심으로 반경 7km까지 확장해 범인이 수원시 고등동과 화서동 일대에 거주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사건 담당자였던 하승균 서장도 자신의 책을 통해 “7차 사건에서 사건 당일 범인을 태운 버스기사가 전한 범인의 하차 지점으로 보아 화성사건의 범인은 화성이 아니라 수원시 고등동 일대에 거주했던 것으로 확신한다”고 밝혔다.
프로파일링 전문가들은 “당연한 말이지만 발치수와 체격은 비례한다. 245mm의 운동화를 신었다면 범인은 틀림없이 170cm를 넘지 않는 키에, 왜소한 체구를 지녔을 것이다”고 설명했다. 이 같은 추정은 화성사건의 유일한 생존자인 김아무개씨(45)와 7차 사건 당시 목격자인 버스기사와 안내양의 진술과도 일치한다.
서울경찰청의 권 경사는 “범인은 외형상으로는 특별할 것도 없고 주변의 관심을 끌 만한 사람도 아닐 것”이라며 “잔인한 살해수법과 달리 겉보기엔 조용하고 심지어 모범적인 모습을 갖추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그것이 화성연쇄살인사건처럼 치밀한 연쇄 범행을 저지르는 범인들의 공통된 특징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경찰은 범인의 직업을 유추할 수 있는 귀중한 단서를 8차 사건에서 획득했다. 범행현장에서 범인의 것으로 보이는 흰 머리카락을 발견한 것이다.
그런데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분석 결과 이 머리카락에서는 나트륨, 망간, 아연 등이 일반인에 비해 수십배 내지 수백배의 수치가 검출됐다. 즉 이 머리카락의 주인은 비철금속 계통의 장비나 기타 기계류를 10년 가까이 다뤄온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 적어도 그정도 기간 동안 비철금속에 노출돼야 비슷한 수치가 검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
프로파일링 전문가들은 대부분의 연쇄살인범들이 30세 미만의 나이에 첫 범행을 저지른다고 말하고 있다. 화성연쇄살인사건의 경우도 흡사하다. 사건의 유일한 생존자와 목격자 증언에 따르면 86년 당시 범인의 나이는 24~27세로 추정됐다. 아직 살아 있다면 적어도 40대 중후반이 되었을 범인은 과연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일각에선 지난 91년 4월 이후 동일한 수법의 살인 행각을 멈춘 것으로 보아 범인이 사고사나 자연사한 것이 아니냐는 의견을 내놓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나이 등으로 보아 범인이 아직 살아서 또 다른 ‘자신만의 유희’를 즐기고 있을 가능성도 적지 않다.
프로파일링 전문가들은 “엽기적이고 이상심리를 가진 연쇄살인범들은 결코 자신들의 ‘행동’을 멈출 수 없다. 비록 살인이나 범행은 저지르지 않더라도 다른 방법을 통해 자신의 강렬한 욕구와 쾌감을 충족시키고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분명한 것은 이 얼굴 없는 범인이 자신의 실체를 감추고 있는 지금도 화성연쇄살인사건은 얼마 남지 않은 공소시효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건일지
▲1차 사건=86년 9월15일 오전 6시20분께 이아무개씨(71)가 딸집에서 하룻밤 자고 귀가하던 중 태안읍 안녕리 목초지에서 피살.
▲2차 사건=86년 10월20일 오후 10시쯤 박아무개씨(25)가 선을 보고 귀가하기 위해 버스를 타러가다 태안읍 진안리 농수로에서 강간·피살.
▲살인미수 사건=86년 11월30일 오후 9시께 태안읍에 사는 김아무개씨(45)가 교회에 가기 위해 논길을 걷다 범인의 습격을 받아 강간당한 후 가까스로 도주. 화성사건의 유일한 생존자
▲3차 사건=86년 12월12일 오후 11시께 권아무개씨(24)가 남편과 헤어져 혼자 귀가하던 중 버스 하차 후 태안읍 안녕리 자신의 집 50m 앞에서 강간·피살.
▲4차 사건=86년 12월14일 오후 11시께 이아무개씨(21)가 선을 보고 귀가 중 버스 하차 후 정남면 관향리 논둑에서 강간·피살.
▲5차 사건=87년 1월10일 오후 8시 50분쯤 여고생 홍아무개양(18)이 친구와 헤어진 뒤 귀가하던 중 버스 하차 후 태안읍 황계리 논에서 강간·피살.
▲6차 사건=87년 5월2일 오후 11시께 박아무개씨(29)가 귀가하는 남편을 마중하기 위해 우산을 들고 버스정류장으로 가던 중 태안읍 진안리 야산에서 강간·피살.
▲7차 사건=88년 9월7일 오후 9시30분쯤 안아무개씨(54)가 분식집 일을 마치고 귀가하던 중 버스 하차 후 팔타면 가재리 농수로에서 피살. 사건 당일 범인을 태운 버스기사 등 목격자 2명 확보.
▲8차 사건=90년 11월15일 오후 6시30분께 여중생 김아무개양(14)이 하교 후 귀가하다 태안읍 병점리 야산에서 강간·피살. 공소시효 2005년 11월.
▲9차 사건=91년 4월3일 오후 9시쯤 권아무개씨(69)가 수원 딸집에 갔다가 귀가하던 중 버스 하차 후 동탄면 반송리 야산에서 강간·피살. 공소시효 2006년 4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