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추만 뜯기고 유유히 사라진 범인
하지만 아직까지는 사건의 진상을 밝혀낼 만한 뚜렷한 단서가 발견되지 않은 상태. 과연 이 교포의 죽음 뒤에는 어떤 진실이 숨겨져 있는 걸까.
지난 5월27일 오후 2시께 서울 방이동 올림픽공원 동2문 주차장 근처의 한 옥외주차장에서 재미교포 Y씨(51)가 피를 흘리며 쓰러진 모습으로 발견됐다. 당시 Y씨는 가슴, 등, 목 등을 흉기로 찔려 숨진 상태였고, 지갑과 금품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경찰은 누군가 원한관계로 Y씨를 살해한 것으로 보고 수사에 착수했다. Y씨가 피살된 직후 근처에 있던 한 시민이 “흰색 승용차가 북2문 방향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보았다”고 제보함에 따라 경찰은 이 흰색 승용차의 운전자를 유력한 용의자로 꼽았다.
문제 차량의 운전자가 자신의 차를 Y씨의 벤츠 승용차 옆에 세워놓고 범행을 한 뒤 도주한 것으로 추정한 것이다.
이 옥외주차장은 곳곳에 CCTV가 설치된 곳. 애초 경찰은 쉽게 수사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북2문 출입구의 CCTV는 20일 전부터 고장난 상태로 방치돼 경찰은 용의자의 차량과 모습을 확보하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숨진 Y씨 주변을 탐문한 결과 경찰은 형제간 재산 갈등이나 남녀 문제로 빚어진 살인, 우범자의 우발적인 범행 등 크게 세 가지 가능성을 두고 수사를 벌이고 있다. 그러나 사건 현장에서 범행도구는 물론, 범인을 특정 지을 만한 물증이 거의 발견되지 않아 자칫 사건이 장기화될 가능성도 엿보이고 있다.
주변에 따르면 교포 Y씨는 어릴 적 부모가 이혼한 뒤 어머니와 함께 살다가 지난 80년 결혼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간 것으로 전해진다. 현지에서 사업을 했으나 실패하고 아내와 이혼까지 하는 등 순탄치 않은 삶을 살아왔다고 한다.
한편 Y씨의 아버지는 재혼해 슬하에 아들 하나와 딸 둘을 뒀는데, 지난해 8월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Y씨가 아버지의 1백억원대 유산을 자신은 배제하고 이복동생들이 나누어가진 것을 알고 지난 4월6일 귀국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이런 정황에 따라 사건 초기 경찰은 Y씨가 이복형제들과 유산상속 문제로 다투는 과정에서 피살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Y씨 이복형제들 주변에 수사력를 집중했다. 그러나 Y씨와 이복형제들은 자라면서부터 교류가 거의 없었고, 유산문제에 대해서도 서로 얼굴을 붉힐 만큼 다투지는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한 수사관은 “‘(Y씨가) 상속문제로 소송을 준비중이었다’고 Y씨 친구가 전하기는 했지만, 당장 소송을 하기보다는 Y씨가 이복형제들을 만나 ‘나에게도 유산의 일부를 줘야 되지 않느냐’고 말한 정도였다”며 “Y씨와 이복형제들의 재산문제가 첨예한 갈등으로까지 비화되진 않았던 것 같다”고 전했다.
즉 재산을 둘러싼 이복형제와의 갈등으로 인해 Y씨가 피살된 것으로 섣불리 단정하기는 어렵다는 것.
Y씨의 이복 남동생은 지난달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 ‘시기상의 미묘함’ 때문에 비상한 관심을 끌기도 했다. 그러나 경찰이 이복 남동생의 최근 행적에 대해 확인작업을 벌인 결과 의심할 만한 특이한 점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나머지 이복 여동생들의 알리바이도 현재까지는 분명한 상태다.
이런 가운데 Y씨의 벤츠 승용차 안에서 제3자의 지문 10여 점이 발견돼 사건은 또 다른 전기를 맞는 듯했다. 경찰은 이 지문의 주인이 범행과 연관이 있을 것으로 보고 신원확보에 주력했다.
조사결과 문제의 지문은 Y씨의 여자친구 K씨(51)의 것으로 드러났다. 수사관계자는 “K씨가 Y씨와 30여 년 전 잠시 사귀다 최근 Y씨가 귀국하면서 다시 만난 사이”라고 전했다.
K씨는 낮에는 자신이 운영하는 가게에서 일하고 주로 퇴근 후 Y와 만나 왔던 것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K씨는 사건 당일에는 Y씨를 만나지 않았다고 말했고, 실제 K씨의 알리바이도 확인됐다. 그러나 경찰은 숨진 Y씨와 K씨가 최근 자주 만난 점을 들어 이번 사건이 남녀문제에 얽힌 살인일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K씨 주변인물에 대해서도 조사를 하고 있다.
두 갈래의 수사가 차츰 벽에 부딪히자 경찰 내부에서는 ‘우범자에 의한 우발적인 범행’ 가능성도 조심스레 제기되고 있다. 한 수사관계자는 “금품을 노린 단순 강도나 우범자의 소행일 가능성도 생각해봐야 한다. Y씨의 벤츠 승용차 의자가 뒤로 완전히 눕혀져 있었고, 창문도 열려 있던 점으로 보아 Y씨가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우범자가 금품을 노리고 Y씨를 공격한 것일 수도 있다”고 전했다.
또한 이 관계자는 “그 외에도 용의자인 흰색 승용차 운전자가 Y씨의 차 바로 옆에 자신의 차량을 주차시켜놓았던 것으로 보아 주차문제 등 사소한 말다툼을 하다 Y씨에게 흉기를 휘둘렀을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이 추론대로라면 범인은 평상시 칼을 소지하고 다니는 우범자라는 얘기다.
경찰이 사건 현장에서 수거한 유일한 ‘물증’은 Y씨 시신 옆에 떨어져 있던 단추 하나. 한 수사관계자는 “문제의 단추는 Y씨가 범인에게 저항하는 과정에서 떨어진 범인의 것으로 보인다”면서 “대낮에 흉기를 사용한 범행이고, 피해자가 거칠게 저항한 흔적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주변에 목격자나 다투는 소리를 들은 사람이 있을 것으로 보고 탐문수사를 강화하고 있다”고 전했다.
현재 경찰은 이동통신회사에 Y씨의 휴대폰 통화내역조회를 의뢰해 사건 당일 Y씨와 통화한 인물들에 대해서 수사를 펴는 한편 Y씨의 이복형제들과 여자친구 K씨 주변에 대해서도 다시 저인망식 수사를 벌이고 있다.
과연 Y씨의 죽음 뒤에 감추진 진실은 무엇일까. 재산갈등일까, 남녀문제일까. 이도 저도 아니라면 우범자의 우발적 범행일 뿐일까. 수사가 제자리를 맴돌면서 의문은 점점 커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