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일병아, 미안하다…조국을 용서해라”
2002년 군에서 사망한 고 서승완 일병이 12년 만에 현충원에 안장됐다. 오른쪽 작은 사진은 서 일병 외 유공자 8명의 합동 봉안식에서 유족 대표가 헌화하는 모습.
가족들의 긴 싸움은 사망 당일부터 시작됐다. 전화를 받고 그길로 서 일병이 근무하던 육군사관학교 근무지원단으로 달려갔다. 사건 현장은 조사관이 도착하기 전에 이미 훼손돼 있었다. 서 일병은 각종 비품을 보관했던 정비실에서 발견됐다. 머리엔 비닐봉투를 쓰고 목 부근에는 전투화 끈과 압박붕대가 묶여 있었다. 서 일병을 발견한 동료들은 놀라서 비닐봉투를 벗기고 심폐소생술을 시도했다. 당시 현장을 찾았던 서 일병의 삼촌 서 아무개 씨(58)는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는 최초 발견 모습이 보존되지 않았고, 경황이 없던 동료들의 진술은 오락가락했다. 목에는 끈 자국이 선명했지만 목을 맬 만한 기둥은 어디에도 없었다”고 회상했다.
군 당국은 사망 다음날 바로 부검을 해야 한다고 유족들에게 전했다. 부검을 하고 장례를 치르면 사건은 이대로 덮일 터였다. 유족을 도왔던 천주교인권위원회는 “군 당국 입장에선 부검을 하지 않고 장례를 치르면 추후에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무조건 빨리 부검을 하려 한다”며 응하지 말라고 조언했다.
제대로 된 현장조사 없이 장례를 치를 순 없었다. 사건 처리를 서두르려는 군 당국을 유족은 믿을 수 없었다. 서 씨는 “국방부는 처음엔 순직처리에 힘쓸 테니 일단 장례를 치르자고 설득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망자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겨버렸다”며 답답함을 토로했다.
유족은 국군 수도병원 앞에서 명확한 조사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군의 침묵 속에 시위는 40여 일간 이어졌다. 더워지는 날씨에, 한 달 넘게 차가운 보관소에 있을 아들 생각에 가족은 조금씩 무너졌다. 부검의를 가족이 직접 지정하는 조건 하에 부검을 허락했다.
부검 과정에서 군 당국은 또 한 번의 상처를 안겼다. 부검 감정서는 8월 중순이 지나서야 나올 예정이었지만 7월 말 사망통지서가 날아왔다. 통지서에 적힌 사망 원인은 자살이었다. 조사 결과가 나오기도 전이지만 결론은 이미 나와 있었다. ‘부검 결과는 애초에 중요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군 생활은 훈련소에서 생긴 질병으로 더욱 힘들었다. 아킬레스건 염으로 수차례 치료를 받아야 했고, 호전되지 않은 상태에서 훈련을 또 받는 악순환이 반복됐다. 절뚝거리며 걸었던 서 일병을 보며 선임들은 비웃고 “꾀병 부리지 말라”, “아프니까 군 생활 편하냐”며 모멸감을 줬다.
서 일병 외 유공자 8명의 합동 봉안식.
군의 뒤늦은 대처는 또 있었다. 조사 과정에서 부대 내 가혹행위가 만연했다는 점이 드러났다. 참고인 조사를 받은 한 일병은 “하루라도 맞지 않으면 이상할 정도였다. 100일 휴가를 나왔다가 돌아가면서 ‘돌아가서 또 맞아야 하나’라는 생각에 끔찍했다”고 진술했다.
또 다른 참고인은 “욕설도 빈번했다. 맞아서 고막이 터진 사람도 있었다. 병장은 상병을 갈구고, 상병은 또 보이지 않는 곳에 가서 일병과 이병을 갈구는 ‘내리갈굼’은 일상이었다”고 말했다. 이등병은 군화를 선 채로 신어야 하고, 일병은 무릎 꿇고 신을 수 있으며 상병이 돼서야 앉아서 신을 수 있게 하는 등 불합리한 군대문화도 만연했다. 몸이 약했던 서 일병 앞에서 동기를 때리며 “너 때문에 맞는 거다. 똑바로 해라”는 말을 자주 했다. 서 일병은 복무 중 부조리에 대해 장교에게 얘기했지만 근본적인 시정은 없었다.
곡절 끝에 받아든 부검 결과도 유족을 울렸다. 부검의는 ‘어떤 방식으로 사망했는지는 모르지만 의사(목을 매어 죽음)로 사망에 이르렀다’는 취지의 아리송한 부검 결과서를 냈다. 목을 맬 물건도 없었고, 스스로 목을 졸라 사망에 이를 가능성은 극히 적었다.
서 일병의 아버지는 이듬해 1월 재조사 민원을 제기했다. 육군 민원제기 사망사고 재조사반은 2004년 또 다시 같은 결론을 내렸다. 기존 조사 결과를 확인하는데 그친 재조사 결과를 받아든 유족들은 이대로 포기할 수 없었다. 다시 2006년 설립된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 진정을 내 다시 재조사를 요청했다. 2년에 걸친 조사 끝에 400페이지에 달하는 재조사 결과서를 토대로 2008년 인권위원회는 순직을 권고했다.
하지만 권고는 말 그대로 ‘권고’에 그쳤다. 2011년, 유족은 국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 소송에 들어갔고, 2012년 4월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받았다. 이에 그치지 않고 유족은 지속적으로 순직 처리를 요구했고, 지난해 여름 이른바 ‘윤 일병 사건’이 여론을 들끓게 하면서 급물살을 탔다. 서 일병의 삼촌 서 씨는 “이렇게 쉽게 인정될 거였는데. 빨리 해주질 않았나. 하지만 아직도 어떻게 죽었는지만 명확히 알고 싶다”며 아쉬움을 표했다.
약한 눈발이 날리던 지난 19일. 서 일병의 유골은 대전 현충원에 안장됐다. 친지들과 유족의 싸움을 응원했던 이들이 자리를 지켰다. 서 일병 외 유공자 8명의 합동 봉안식으로 치러졌다. 봉안식이 끝나고 유골함은 묘지로 옮겨졌다. 뗏장도 입히지 않은 작은 봉분 앞에서 어머니는 한없이 “미안하다”며 울부짖었다.
대전=서윤심 기자 hear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