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퍽질퍽…팬들도 이런 축구 처음이야
22일 호주 멜버른에서 열린 아시안컵 8강전 한국 대 우즈베키스탄 경기에서 손흥민이 연장 후반 두번째 골을 성공시킨 뒤 그라운드에 쓰러져 차두리의 축하를 받고 있다. 왼쪽은 슈틸리케 감독. 사진제공=대한축구협회
#한국산 ‘늪 축구’
한국과 우즈베키스탄의 8강전을 생중계한 SBS는 경기가 끝난 후 배경 음악으로 조관우의 ‘늪’을 틀었다. 한국 축구대표팀이 조별리그에서부터 보여 온 이른바 ‘늪 축구’를 겨냥한 것이었고, 이는 시청자들의 뜨거운 관심으로 이어졌다. ‘늪 축구’란 실력이 월등한 팀도 한국과 만나면 여느 팀과 마찬가지로 하향평준화가 돼 패배를 맛본다는 뜻이다. 축구팬들은 8강전까지 계속되는 슈틸리케호의 무실점 승리를 빗대 ‘어서와, 이런 축구 처음이지?’라는 유행어를 내세우며 ‘늪 축구’에 열광하고 있다.
사실 축구대표팀은 조별리그 3경기를 통해 수비 조직력에서 불안한 모습을 나타냈다. 그래서인지 슈틸리케 감독은 3경기에 모두 다른 조합의 수비수를 내세웠다. 오만전에서는 김주영-장현수가, 쿠웨이트전은 김영권-장현수, 호주전은 김영권-곽태휘가 나섰다. 슈틸리케호는 조직력이 살아나지 않으면서 경기 중간 패스 미스로 실점 위기를 맞기도 했지만 신기하게도 상대팀은 골을 기록하지 못했다.
곽태휘
그리고 한국 축구의 주전 수문장으로 점을 찍은 골키퍼 김진현과 미드필드를 책임지는 기성용-박주호도 ‘늪 축구’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우즈베키스탄전에서도 상대의 패스에 포백라인이 무너지는 등 실점 위기에서 김진현의 빠른 판단과 활발한 움직임으로 무실점 경기를 마쳤다. 아시안컵의 신조어로 탄생한 ‘늪 축구’의 행운이 앞으로 남은 2경기에서 어떤 의미로 이어질지 지켜봐야 할 것 같다.
#‘슈틸리케의 법칙’
국제대회에서는 경기 열리기 하루 전 기자회견을, 이틀 전에는 훈련장에서 선수 인터뷰를 갖는다. 기자회견에는 감독과 선수 한 명이 참석하고, 훈련장 인터뷰에는 감독의 지목을 받은 선수 한 명이 나서는데, 슈틸리케호에서는 인터뷰에 나선 선수들이 경기에서 맹활약을 펼친 사례가 반복되었다. 그로 인해 ‘머피의 법칙’이 아닌 ‘슈틸리케의 법칙’이란 신조어가 또다시 탄생한 것.
지난 9일, 아시안컵 조별리그 첫 경기인 오만전을 앞두고 슈틸리케 감독은 주장 기성용과 함께 기자회견장에 나타났다. 첫 경기인데다 주장이라는 상징성이 있기 때문에 기성용은 슈틸리케 감독의 부름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기성용은 이후 오만전에서 구자철, 박주호와 함께 미드필드를 장악하며 경기를 지배했다. 경기는 1-0 승리.
쿠웨이트전을 앞두고선 경기 이틀 전 훈련장 인터뷰에 남태희가 기자들 앞에 나타났다. 이청용 등 부상 선수의 속출로 대표팀 분위기가 어수선한 상황에서 슈틸리케 감독은 남태희에게 많은 기대를 나타냈다. 그 결과 남태희는 전반 36분 헤딩골이자 결승골을 기록했다. 만약 쿠웨이트전에서 패했더라면 한국의 8강 진출은 위기에 직면했을 지도 모른다. 더욱이 쿠웨이트전을 앞두고선 차두리가 기자회견에 나섰다. 차두리는 남태희에게 정확한 ‘택배 크로스’를 배달한 주인공이었다.
호주전을 앞두고 훈련장 인터뷰는 이근호와 이정협이 맡았고, 이들은 호주전 결승골을 합작하며 히어로로 떠올랐다. 호주전 기자회견에 나선 곽태휘는 늪 축구의 진수를 보여주며 베테랑 선수가 대표팀에 왜 필요한지를 경기력으로 증명했다. ‘슈틸리케 법칙’은 축구대표팀 내에서도 승리의 상징으로 대변되고 있다.
골키퍼 김진현(왼쪽 세 번째)은 ‘슈퍼세이브’로 한국의 4연속 무실점 행진을 이끌었다. 사진제공=대한축구협회
#베테랑의 존재감, 곽태휘-차두리
슈틸리케호에서 차두리(35)와 곽태휘(34)는 가장 나이가 많은 고참들이면서도 팀이 4강을 향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수훈 선수로 꼽힌다. 팀이 흔들릴 때마다 단단한 중심축 역할을 하면서 나이 어린 선수들을 잡아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대회를 앞두고 가벼운 부상으로 조별리그 1, 2차전에 결장한 곽태휘는 호주와의 3차전과 우즈베키스탄전에서 2경기 연속 풀타임 활약으로 포백 수비를 이끌었다. 곽태휘는 몸을 사리지 않는 플레이와 거친 수비로 상대 공격수들을 제압했고 세트피스 때는 공격에 적극 가담해 자신의 장점인 헤딩 슈팅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우즈베키스탄전에서 곽태휘의 평균 패스 거리는 14.77m. 1, 2차전을 뛰지 못한 데 대한 미안함을 안고 있는 그는 희생정신과 투혼을 발휘하며 온 몸을 던졌다. 곽태휘의 에이전트인 오앤디 김양희 사장은 “경기 후 태휘와 문자를 주고받았는데, 이번 대회에서 꼭 우승하고 싶다고 말하더라”면서 “아직 완전한 몸 상태가 아니지만, 후배들과 함께 멋진 작품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특별하게 다가온다”고 설명했다.
우즈베키스탄전에서 70m의 폭풍 같은 드리블을 선보인 차두리의 존재감은 더욱 빛을 발했다. 공수 모두에서 완벽한 모습을 보인 차두리는 베테랑의 품격을 경기력으로 증명해보였다. 오죽했으면 SBS 배성재 아나운서가 “저 사람이 월드컵 때 왜 해설을 했는지 모르겠다”라는 ‘의미있는’ 얘기를 방송에서 했을까.
사진제공=대한축구협회
아시안컵에서 다양한 스토리를 만들어 내고 있는 ‘슈틸리케호’에 대한 축구인들의 시선도 매우 긍정적이었다. 4년 전 카타르 아시안컵에서 대표팀의 지휘봉을 잡았던 조광래 대구FC 대표이사는 “물론 아쉬운 점도 있지만, 호주에서 선보인 축구대표팀의 모습은 어떻게 해서든 이기는 축구를 하고 있기 때문에 높은 점수를 줄 수밖에 없다”면서 “공간 확보나 공격에서 수비로 전환하는 데 매끄럽지 못한 장면들이 있었다. 그래도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고 달려드는 선수들의 모습을 보면서 슈틸리케 감독이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었다”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지난 22일 한국갤럽이 발표한 여론 조사에 따르면 ‘슈틸리케 감독이 대표팀 감독으로서의 역할을 잘하고 있다고 보십니까?’라는 물음에 남녀 656명 중 54%가 ‘잘하고 있다’라고 대답했다. ‘잘못하고 있다’는 답변은 5%에 불과했다. ‘축구 관심층’이라고 밝힌 응답자의 66%가 슈틸리케 감독의 대표팀 지휘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대표팀의 한 관계자는 슈틸리케 감독의 지도 스타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슈틸리케 감독을 전형적인 독일 할아버지 스타일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지만, 선수들을 세심하게 관찰하고, 무슨 문제가 생기면 피하는 것보다 정면돌파를 선호하면서 적극적으로 풀어내는 모습에서 선수들의 신뢰가 상당히 높다. 8강전을 마치고 선수들 모두가 하나로 마음이 모였다. 55년 만에 우승컵을 안고 귀국하는 것이다. 그 바람을 감독도 알고 있기 때문에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할 것이다.”
이영미 스포츠전문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