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격자도 흉기도 없지만 ‘당신이 범인 맞아’
이 판례의 주인공은 이 아무개 씨(여·40). 그는 지난 2004년 5월 28일 서울 성북구 모 빌라에서 발생한 30대 주부 살해 사건의 용의자로 체포됐다. 이 씨는 살해된 주부의 남편 L 씨와 내연 관계였다. 경찰은 이 씨가 L 씨와 사이가 멀어지면서 자신을 만나주지 않자 이에 대한 앙심으로 L 씨의 부인을 무참히 살해한 것으로 결론지었다.
하지만 이 씨는 처음부터 이를 완강히 부인했다. 그녀는 미국 영주권자로 미국에 남편과 쌍둥이 자녀를 둔 유부녀였다. 이 씨는 “남편과 이혼할 생각도 없고 L 씨와 관계가 악화되었다고 해서 그의 아내를 살해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재판부는 “직접 증거는 없지만 간접 증거를 보면 이 씨가 진범이 분명하다”며 이 씨의 주장을 일축했다. 완벽한 증거도 없는 상황에서 재판부가 이 씨의 유죄를 확신한 근거는 무엇일까. 2년 전의 사건 현장으로 되돌아가 보자.
사건 발생 추정 시각은 2004년 5월 28일 오전. 피해자의 남편 L씨는 8시 20분경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과 함께 아내의 배웅을 받으며 출근했다고 한다. 오후 2시 50분경 학교 수업을 마치고 돌아온 아들은 엄마의 시체를 발견했다.
목에는 텔레비전을 연결했던 멀티 콘센트 케이블이 두 번 감겨 있었고 흉기로 4회 이상 연속적으로 벤 것으로 보이는 흔적이 있었다. 현장 수사 결과 범인은 금품을 노린 것도 아니었고 부검 결과 성폭행 흔적도 없었다. 원한이나 치정 관계에 얽힌 살인에 무게를 두고 수사를 확대한 결과 피해자의 남편인 L 씨의 내연녀, 이 씨가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됐다. 결국 L 씨 부인 살해 사건의 범인으로 기소된 이 씨는 1심에서 징역 15년을 선고 받았다. 그리고 지난 3월 17일 항소심 재판부 역시 원심과 같은 징역 15년을 선고했다.
미국인 남편과 결혼해 미 영주권을 소지한 이 씨는 지난 2003년 4월 말 일시 귀국해 노래방 도우미로 일하던 중 손님으로 온 L 씨를 만나게 됐다. 이후 내연 관계로 발전한 두 사람 사이에 아기가 생겼고 이 씨는 L 씨와 상의 끝에 아기를 낳기로 결정한 뒤 그해 12월 26일 미국으로 출국했다. 그러나 떨어져 있는 사이 두 사람의 관계는 악화됐고 이 씨는 2004년 2월 25일 L 씨를 만나려고 재입국했지만 L 씨는 이 씨를 만나주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이 씨는 자신을 피하는 L 씨의 휴대전화로 160여 차례, L 씨가 운영하는 공장으로 90여 차례, 집으로 10여 차례 전화를 걸거나 문자메시지를 전송했고 자신의 조카를 시켜 대신 연락을 하게 하는 등 강한 집착을 보였던 것으로 드러났다.
그러던 이 씨가 다시 미국으로 출국한 날은 2004년 5월 28일. 바로 L 씨의 아내가 무참하게 살해당한 날이었다.
재판부는 L 씨에 대한 이 씨의 집착과 더불어 이 씨가 L 씨의 집 주변을 탐색해 본 적이 있다는 주변인들의 진술, L 씨가 집에 없는 시간임을 알면서도 집으로 전화를 걸었으며 숨진 L 씨의 아내를 상대로도 수차례 전화통화를 시도한 점 등을 볼 때 이 씨가 L 씨에 대한 복수심으로 그의 아내를 살해했다고 보았다.
이 씨의 변호인 측은 “이 씨가 우울증에 시달린 적이 있었으나 남편과 쌍둥이 딸을 둔 유부녀로서 L 씨와 결혼할 생각은 없었으며 복수의 상대방이 L 씨라면 몰라도 L씨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부인을 살해할 이유는 없다”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재판부의 판결에 결정적 역할을 했던 것은 이 씨의 이종사촌 언니의 진술. 그녀에 따르면 미 영주권자인 이 씨는 한국에 잠시 귀국해 영어 과외와 노래방 도우미 일을 병행하고 있었다. 영어 과외를 하는 목요일과 휴일인 일요일을 제외하고는 거의 매일 오후 5시경 자신이 운영하는 식당에 들렀다고 한다. 노래방 도우미로 나가기 전 저녁을 먹고 화장을 고치기 위해서다.
그런데 사건 당일에는 평소와 달리 오전 11시 30분경에 왔기에 “네가 이 시간에 웬일이냐”고 물었고, 이에 이 씨가 “사고 쳤어, 여자랑 싸우다가 칼로 목을 그었어”라고 대답했다는 것. 깜짝 놀란 그녀는 “그럼 사람을 살려야 되지 않느냐, 119를 보내야 되지 않겠느냐”고 했고 이 씨는 “지금 그 집 애들 올 시간이 됐으니까 그냥 놔두어도 된다”고 하면서 “사람이 죽은 뉴스가 나오는지 보고 싶다”며 TV 방송 뉴스를 틀어 유심히 보았다고 한다. 그리고는 “미국에 가야겠다”며 식당 전화로 비행기 표가 있는지 확인했고 “집에 가서 짐을 꾸려 공항으로 가겠다”고 식당을 나선 것이 오후 1시 30분경이었다고 했다.
이 씨가 나간 뒤 주방으로 들어간 이 씨의 이종사촌 언니는 싱크대 안에 낯선 식칼이 놓여있는 것을 발견했다. 식칼은 손잡이와 칼날이 분리돼 있었다. 놀란 그녀는 칼을 튀김가루 봉지 등으로 여러 번 말아 양념통으로 쓰기 위해 주둥이를 잘라 보관했던 1.8ℓ짜리 생수병 속에 넣어 다른 재활용품과 함께 버렸다고 했다.
그 후에 이 씨가 인천공항이라면서 전화가 왔기에 “너 칼 여기다 버렸느냐”고 묻자 이 씨가 “미안해요”라고 답했고, 이에 욕설을 퍼부으면서 “어디 버릴 데가 없어 여기다 버려놓고 갔느냐”고 하자 이 씨가 “미안해요, 정신이 없어서 그랬어요”라고 말했다는 것.
이 같은 진술을 뒷받침하는 첫 번째 근거는 사건 당일 식당의 전화 및 이 씨의 휴대 전화 발신 기록이다. 식당 전화 발신 기록을 보면 누군가 오전 11시 40분 이후부터 오후 1시까지 여러 차례 항공사에 전화를 걸었는데 이 씨가 이중 한 항공사의 5시 30분발 비행기 편을 이용, 미국으로 나간 사실이 확인됐다. 또 이날 오후 3시 31분 인천공항 공중전화에서 식당으로 전화가 걸려 왔던 사실도 확인됐다.
이 씨의 휴대전화 통화기록도 사촌 언니의 진술을 뒷받침해 주고 있었다. 이 씨는 이날 오후 12시 38분 휴대전화로 1분 42초간 미국에 있는 남편과 통화를 했는데 그 전화의 발신기지국 소재지가 식당이 있던 장안동인 것. 그로부터 몇 분 뒤인 43분에는 식당 전화 발신 기록에 L 씨의 공장 번호가 남아 있는 것이 확인됐다.
살해 방법에 대해서도 검찰과 변호인 측의 공방은 계속됐다. 발견 당시 케이블 선에 목이 감긴 채 흉기로 살해된 사체의 부검 결과 피해자의 코뼈는 부러진 상태였으며 왼쪽 얼굴과 눈 주위에 발자국으로 추정되는 특정 형태의 멍 자국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부검의는 이 발자국의 형태는 피해자가 서 있거나 앉아 있는 상태에서는 생기기 어려운 것이라는 소견을 냈다.
검찰은 피해자의 집이 출입문 이외에 베란다 등 다른 방법으로는 침입하기 어렵다는 점, 피해자는 평소 잠이 많고 깊이 잠이 들면 소리가 나도 잘 알아듣지 못할 정도이고, 잠을 자다가 침대에서 떨어진 적도 있다는 점, 남편과 아이가 집에 들어올 때 현관문이 열려 있거나 잠겨 있지 않은 적이 있었다는 점 등을 토대로 범인의 살해 경위를 다음과 같이 재구성했다.
범인은 잠겨 있지 않은 현관문을 통해 안방까지 들어갔고, 가지고 간 칼을 들고 피해자의 얼굴을 발로 차 정신을 잃게 하는 방법으로 피해자의 반항을 억압한 뒤 침대 끝부분에 엎드리게 해 그곳에 있던 멀티콘센트 케이블로 목을 2회 감은 다음 세게 목을 조여 완전히 제압했다는 것. 검찰은 그 후 범인은 가지고 있던 칼로 피해자의 목을 베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실제 이 씨의 어머니는 사건 무렵 자신이 사용하던 식칼 한 개가 없어졌다고 진술했고, 사촌 언니는 이 씨가 다녀간 뒤 싱크대에서 식칼 한 개를 발견했다고 진술했다. 이것은 이 씨에게 불리한 증언이 됐다.
이에 대해 이 씨의 변호인은 “피해자의 사체는 반항흔이 전혀 없었는데 어떻게 이 씨가 자신보다 13kg이나 더 나가는 피해자를 완전히 제압할 수 있었겠느냐”며 “연약한 체구로 발로 차 코뼈를 부러뜨리고 실신 상태에 이르게 했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또 “피해자의 집에는 사나운 개가 있었는데 낯선 사람이 왔다면 심하게 짖었을 것이고 그 상황에서 자고 있었다는 것도 이해할 수 없다”고 밝혔다. 따라서 피해자보다 힘이 센 제3자나 면식범의 소행이라는 것.
그러나 재판부는 이 씨가 초등학교 시절 태권도를 6개월가량 배운 적이 있고, 중학교와 고등학교 시절에는 4년 동안 무용을 했던 사실, 사람이 목을 조여 의식을 잃게 되면 아무런 저항을 할 수 없게 된다는 전문가의 의견을 미루어 볼 때 이러한 범행이 불가능하다고만 볼 수 없다며 항소를 기각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피고에게 불리한 간접 사실 및 정황을 종합했을 때 피고를 유죄로 인정할 수 있는가, 제3자의 범행 가능성은 없는가에 중점을 두었다”면서 “본 사건과 같이 목격자의 진술 등 직접 증거가 전혀 없는 사건에서는 유죄의 심증이 경험법칙과 논리법칙에 위반되지 않는 한 간접 증거에 의하게 된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 씨와 변호인 측은 항소심 재판부의 판결에 불복, 무죄를 주장하며 지난 22일 대법원에 상고했다. 이 사건의 유일한 증거는 사촌 언니의 증언인데 이는 일관성이 없어 신빙성을 갖기 어렵다는 것.
이번 사건처럼 피고에게 불리한 간접 증거와 정황이 있을 뿐 직접적인 증거가 없는 사건에 대해 대법원은 어떤 판결을 내릴지 주목된다.
양하나 프리랜서 han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