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전 잡았다 풀어준 그들이 진짜 범인”
▲ 화성연쇄살인사건의 공소시효가 만료됐다. 과연 범인은 누구일까. 사진은 영화 <살인의 추억>의 한 장면. | ||
제보자는 지난 1987년 12월 24일 화서 전철역 부근 논에서 발생한 김 아무개 양(당시 19세) 살인 사건을 수사했던 조광식 씨(53). 이 사건은 수원 지역에서 발생, 10건의 화성 연쇄살인 사건에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피해자가 동일한 수법으로 살해당해 많은 사람들은 지금도 이 사건이 동일범의 소행이라고 보고 있다(<일요신문> 724호 4월 5일자).
제보자인 조 씨는 당시 이 사건의 용의자를 고문해 사망하게 했다는 혐의로 직위 해제되고 2년6월형을 선고받아 교도소 신세를 지기도 했다. 이후 그는 자신이 수사했던 용의자들을 범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당시 ‘고문 형사’로 여론의 심판대에 올라 대대적인 비난을 받았던 그가 지금까지도 이들을 범인이라고 확신하는 근거는 무엇일까. 조 씨는 지금도 화성 연쇄살인 사건에 대한 자료 수집은 물론 4권 분량의 노트에 당시 사건을 기록하고 있었다. 스스로의 불명예를 조금이라도 씻어보려 하는 것일 수도 있고 집념이 지나친 부분도 없지 않다. 그러나 인터뷰 내내 화성 연쇄살인 사건을 거쳐간 수많은 전·현직 형사들이 그러하듯 그의 눈빛에서 그 이상의 집념을 읽을 수 있었다. 조 씨의 주장을 검증해 본다.
김 아무개 양의 사체가 발견된 것은 지난 1988년 1월 4일 오전 11시 30분경이었다. 화서 전철역 부근 논에서 볏짚으로 가려져 있던 것을 논 주인 김 아무개 씨가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다. 김 양의 사체는 엎드린 상태로 양손이 스타킹으로 결박당해 있었으며 팬티로 재갈이 물려 있었다. 또 하의가 벗겨진 채였으며 폭행으로 얼굴이 부어있었다. 부검 결과 성폭행을 당한 후 목이 졸려 숨진 것으로 밝혀졌다. 1987년 5월 2일 발생한 사건까지 이미 여섯 차례 발생했던 화성 연쇄살인 사건의 범행수법과 아주 흡사한 사건이었다.
당시 수원 모 여고 3년생이었던 김 양은 1987년 12월 24일 저녁, 어머니와 다툰 후 외출한 것으로 알려졌고 사체 부검결과 이날 밤 11시에서 새벽 2시 사이에 살해당한 것으로 추정됐다.
당시 경찰은 이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M 씨와 J 씨(당시 모두 20대 초반)를 지목했다. 탐문 수사 결과 M 씨와 J 씨가 사건 당일 밤 사체가 발견된 장소 부근에서 불을 지피고 있었다는 목격자의 진술을 확보했기 때문이었다. 용의자 M 씨는 1월 6일 수원시 화서동 자신의 집에서 친구 2명과 함께 있다 연행됐으며 J 씨는 수원 집을 떠나 용인 외삼촌 집에 가 있다가 경찰에 붙잡혔다.
이들은 경찰의 추궁에 범행 일체를 자백했다. 당시 경찰은 뛸 듯이 기뻤지만 그것은 잠시였다. 용의자 M 씨가 얼마 후 뇌부종으로 인해 뇌사 상태에 빠졌고 이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후배 형사의 구타 사실이 밝혀져 조 씨는 후배 형사와 함께 구속돼 버렸기 때문이다. 더구나 구체적인 증거품도 찾아내지 못하자 결국 검찰도 그들의 자백을 증거로 인정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려 J 씨도 기소 유예로 풀려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 씨가 아직도 이들이 범인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근거는 이렇다.
“조사 과정에서 몇 차례 때린 것은 사실이지만 이들에게 허위 자백을 유도하지는 않았다. 백지를 주고 현장 약도와 사체를 숨긴 곳을 그려보라고 했을 때 이들은 정확히 그 지점을 그리기까지 했다. 또 김 양의 사체에서 나온 범인의 혈흔과 현장에서 발견된 대변의 분석 결과 B형이었다. 이는 M 씨와 J 씨의 혈액형과 일치했다.”
이밖에 화성군에 은둔 중이었던 이들의 친구 차 아무개 씨를 추궁한 결과 M 씨가 차 씨에게 “사람을 죽였다. 수원을 떠나겠다”며 자신이 즐겨 입던 빨간색 점퍼를 입으라고 했다는 진술도 확보했었다는 것이다. 조 씨는 “왜 하필 사건 발생 후인 12월 27일 친구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겠냐”며 이 사건과의 연관성에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조 씨가 이들이 단지 김 양 살해 사건뿐만 아니라 화성 연쇄살인 사건과도 연관돼 있다고 확신하게 된 것은 잔인한 범행 수법도 일치하는 데다 당시 이들에게 들었던 진술 내용 때문이다.
“지나가는 말로 화성에는 어떻게 갔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는데 J 씨가 기찻길로 갔다고 말하면서 그렇게 가면 검문에 걸릴 일이 없다고 구체적으로 진술한 적이 있다. 당시에는 수원에서 일어난 살해 사건을 빨리 수습해야겠다는 생각에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그 후 피해자 대부분이 기찻길 부근에서 살해당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그냥 넘어간 것이 큰 실수였다. 조금만 더 신경을 썼더라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 지난 1988년 화성연쇄살인사건과 비슷한 여고생 살인사건을 수사했던 조광식 씨는 당시 풀려났던 두 용의자들이 화성사건의 범인이라고 믿고 있다. | ||
화서역 부근에서 숨진 김 양뿐만 아니라 피해자들의 시계가 없어졌다는 점도 M 씨와 J 씨를 의심하게 된 부분이다. 조 씨는 “당시에는 휴대폰도 없을 때라 시계가 필요하던 시기였는데 김양은 물론 연쇄 살인 사건 피해자들의 대부분이 시계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며 “M 씨를 경찰로 연행하기 전 집 앞에서 잠복을 하다 M 씨의 집에 들어간 적이 있는데 찬장 그릇 안에 여자 시계 줄이 몇 개 담겨져 있는 것을 보았다”고 말했다. 이후 M 씨를 조사하면서 이 시계 줄을 찾으러 갔었는데 이미 치운 상태였다는 것.
결과적으로 조 씨는 결정적인 증거품을 찾지 못했고 M 씨가 뇌사 상태에 빠지면서 사건은 원점으로 돌아가 벼렸다.
조 씨는 당시 고문 문제와 관련해서도 “뇌사의 원인이 구타는 아니었다. 1월 8일 M 씨를 연행해 사체 발견 장소에서 없어진 피해자의 손목시계를 찾으러 가던 중 M 씨가 도주를 시도했고 이 과정에서 후배 형사가 수갑이 채워진 M 씨를 밀쳤는데 M 씨가 뒤로 넘어지면서 언덕에서 굴러 머리를 부딪쳤던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후 아무 이상이 없는 줄 알고 경찰서로 끌고 왔는데 다음 날부터 구토를 하기 시작해 병원으로 옮겼지만 뇌사 상태에 빠졌다는 것이다.
이후 조 씨는 11년 동안 몸담았던 경찰직을 떠나 교도소에 수감됐다. 담당의가 “뇌부종은 구르거나 넘어지면서 머리를 부딪친 것이 원인”이라는 소견을 냈지만 혐의를 완전히 벗지 못해 이례적으로 무거운 2년6개월의 형을 살았다. 조 씨는 “담당 검사가 ‘너희가 재수 없게 됐다. 잠잠해지면 나가라’고까지 했다”고 주장하며 “당시는 6·29 선언 이후였고 박종철 사건 1주기 직후였던 것이 원인으로 보인다”고 말하기도 했다.
당시 감방에서 1년 가까이 독방 생활을 하기도 했던 조 씨가 수감 이후에도 사건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던 것은 같은 교도소에 수감됐던 전과 5범 김 아무개 씨가 들려준 이야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조 씨가 어떤 사건 때문에 수감됐는지를 알고 있던 김 씨는 당시 공범으로 지목됐던 J 씨와 같이 수원교도소 미결수 방에서 생활했다며 이야기를 시작했다고 한다. J 씨와 M 씨는 살인 사건 용의자로 잡힌 뒤 조사를 받던 중 특수 절도 혐의가 밝혀져 이 사건과는 별개로 구속된 바 있다.
조 씨가 김 씨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 J 씨가 같은 방에 들어 왔기에 함께 수감돼 있던 사람들이 어떤 죄로 들어왔냐고 물었고 이에 J 씨가 김 양을 살해하게 된 경위를 자세히 설명했다고 한다. 먼저 M 씨가 김 양을 성폭행했고 자신은 김 양이 생리 중이어서 성폭행을 하지 못했다고. 이후 피가 묻은 자신의 속옷과 각목은 불에 태웠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에 이들이 “M 씨가 죽었으니 너는 경찰이 폭행을 해서 허위 진술을 했다고 하라”고 조언까지 했다는 것. 이 이야기를 들은 조 씨는 김 씨의 진술서를 받기 위해 노력했지만 교도소 안이라 성사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이후 출소한 뒤에도 조 씨는 틈틈이 J 씨의 행방을 찾았다. 조 씨는 J 씨가 기소유예로 풀려난 뒤인 88년 2월 바로 입대를 했던 것까지는 알아냈지만 이후 행적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고 말했다.
화성 연쇄살인의 7차 사건은 88년 9월 7일 화성시 팔탄읍 가재리에서 일어났다. 용의자를 본 유일한 목격자가 나타난 사건이었다. 키는 168cm 정도, 머리는 짧은 상고 머리였으며 눈이 날카롭고 코가 오뚝해 인상이 차갑다는 것이 목격자의 진술이었다. 그리고 화성 연쇄살인은 91년 4월 3일까지 계속됐다.
조 씨는 “최근까지도 J 씨의 소재를 알아보고 있다”고 말했다. 흔하지 않은 이름이라 같은 이름이 몇 명밖에 되지 않으며 화성 연쇄 살인 사건 발생지였던 태안읍이나 화서동에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이 주민으로 등록돼 있다는 것을 알게 될 때마다 가슴이 답답하다고.
조 씨는 인터뷰를 끝내며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화서역 살인 사건 이후 세월이 20년 가까이 흘렀다. 그 사이 함께 수감됐던 후배 형사 중 한 명은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고, 나 역시 그 사건 이후로 여러 직장을 전전하며 허송세월하다 현재는 경비지도자 자격증을 따 새 삶을 계획하고 있다. 확실한 물증 없이 지금까지도 M 씨와 J 씨가 유력한 용의자라고 말하는 나는 또 다른 죗값을 치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겁도 나지 않는다. 한 번이라도 다시 만나 ‘이제 공시시효도 끝났으니 터놓고 한번 진실을 밝혀보자’고 말하고 싶다.”
양하나 프리랜서 han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