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나를 버렸다…”
▲ 지난 4월 28일 봉천동에서 현장검증을 하고 있는 정남규.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그의 범행 수법은 아주 치밀했다. 정 씨는 범행 때마다 증거를 남기지 않기 위해 체육복과 운동화로 복장을 최소화했다. 심지어 속옷도 입지 않았다. 휴대품은 쇠망치나 파이프렌치를 담은 신발주머니뿐이었다.
부평 집에서 밤늦게 밖으로 나온 그는 인천에서 지하철 1호선 막차를 탄다. 그리고는 개봉동이나 가리봉동 등지서 내려 인근을 돌아다니며 대상을 물색했다. 범행도구가 담긴 신발주머니는 지하철역 인근 주택가 장독대 뒤에 몰래 숨겨 놓았다. 불심검문에 걸리지 않기 위해서다. 신길동, 봉천동, 신대방동 주변을 돌아다니다 범행할 집을 발견하면 범행도구를 가져가기 위해 수십㎞를 되돌아오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정작 자신이 살고 있는 인천 지역에서는 범행을 저지르지 않았다. ‘동선이 파악될까봐서’였다. 서울 서남부 지역을 택한 것은 인천과는 거리가 있어 수사에 혼선을 줄 수 있는데다 강남 지역과는 달리 CCTV가 별로 없어 범행이 쉽게 들통 날 가능성이 적기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정 씨는 철저하게 자신을 위장했다. 마스크와 안경으로 범행 상대가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도록 했다. 두 건의 범죄에서는 증거를 없애기 위해 사체에 불을 지르기도 했다.
범행을 하지 않을 때는 집에서 <양들의 침묵> <살인의 추억> 등 범죄 영화를 보거나 범죄 관련 신문을 보며 참고할 사항이 있으면 스크랩했다. 특정 사건이 아닌 강력 사건들을 스크랩했다. 모은 신문지를 포개면 5~6㎝나 될 정도로 꽤 많은 강력 사건 기사를 스크랩했다.
여성을 주로 범행 상대로 노렸지만 욕정은 자제했다. 검거 당시 정 씨는 콘돔을 휴대하고 있었는데 전혀 사용은 하지 않았다. 젊었을 때 성폭행 전과가 있어 유전자 정보가 남아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실제 정 씨는 “(콘돔을 갖고 다니긴 했지만) 아무리 콘돔을 사용해도 체모는 떨어지기 마련이다. 자칫 잘못했다간 DNA대조로 들통 날 게 뻔해 성폭행은 피했다”고 진술했다.
정 씨는 완전 범죄의 확률을 높이기 위해 자신에게 익숙한 구조의 건물들만 골랐다. 정 씨가 범행을 저지른 집은 일단 문이 열려 있는 지하 1층에 지상 2층 집이었다. 공교롭게도 정 씨가 살고 있는 인천 집 또한 담이 낮고 지하 1층 지상 2층으로 된 작은 단독 주택이었다.
정 씨는 지난 4월 22일 오전 4시 50분쯤 신길 6동 지하 방에 침입했다가 덜미가 잡혔다. 그는 방을 샅샅이 뒤져 1만 원짜리 상품권 한 장밖에 발견하지 못하자 홧김에 자고 있던 김 아무개 씨(24)의 뒷머리를 준비해간 파이프렌치 공구(무게 2.18㎏, 길이 40㎝)로 내리쳤다. 설맞은 김 씨가 잠에서 깨어 대항하려고 하자 왼쪽 얼굴과 왼쪽 팔뚝 등을 마구 내리쳤다. 하지만 어둠 속인지라 제대로 맞지 않았다.
김 씨는 피를 흘리면서도 벌떡 일어나 정 씨와 격투를 벌였고 옆방에서 자고 있던 김 씨의 아버지(47)도 합세하자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붙잡혀 경찰에 넘겨졌다.
그러나 정 씨는 경찰에 넘겨진 뒤에도 호락호락하게 당하지 않았다. 현장에 출동한 경찰이 오전 5시 30분경 정 씨에게 수갑을 채운 뒤 순찰차 뒷자리에 앉히고는 운전석에서 차 키를 찾으려는 순간 수갑을 찬 채 달아나 버렸다.
경찰은 급히 150여 명을 동원해 주변을 샅샅이 뒤졌지만 허사였다. 정 씨가 붙잡힌 것은 도주 2시간여 만인 오전 7시 5분쯤이었다. 수갑을 찬 정 씨가 자기 집 옥상 위에 숨어 있는 것을 본 주민의 신고로 정 씨가 붙잡힌 것이었다.
정 씨는 검거 직후 경찰관을 어깨로 툭툭 치면서 “신은 나를 버렸다. 완전범죄를 했어야 했는데…. 옆방에 그렇게 큰 사람(김 씨의 아버지를 지칭)이 있었으면 그 놈부터 처리했어야 했다”고 말하는 등 대범함을 보였다고 한다.
놀랍게도 정 씨는 체포 당시 한 쪽 수갑을 풀고 달아난 것으로 전해진다. 경찰은 정 씨를 수갑을 찬 채 도주를 했다고 공식 발표했으나 수갑을 양손에 찬 채 주택가 옥상을 넘나들었다는 자체가 상당히 석연치 않았던 부분이어서 기자들의 의문이 잇따랐다. 이에 대해 익명을 요구한 경찰 관계자는 “처음 정 씨를 검거했을 때 수갑을 느슨하게 채워 정 씨가 한쪽 수갑을 풀고 달아났다”며 경찰의 공식 발표와 사실이 다름을 시인했다.
정 씨는 현재 영등포경찰서 강력 2팀 사무실에서 조사를 받고 있다. 식사는 대부분 경찰서 구내식당에서 마련한 2,500원짜리 밥을 먹고 있다. 경찰 관계자는 정씨가 ‘게걸스럽다’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식사를 잘하고 있다고 전했다.
수면도 경찰서 내 유치장에서 하루 7시간 정도 취하고 있다. 연쇄살인범 유영철은 자해를 염려해 형사 두 명이 옆에서 잠을 잤지만, 정 씨는 그럴 가능성이 전혀 보이지 않아 혼자 잠을 재운다고 한다. 경찰은 비록 정 씨가 연쇄 살인범이지만 진술과정에서 보여주는 태도는 아주 평범하고 정상적이라 정신 감정을 의뢰할 필요성이 전혀 없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가끔씩 예상치 못한 말과 행동을 해 경찰 관계자들은 어리둥절하게 만든다고. 사건 수사를 받다가도 뜬금없이 “내가 태어나서 이렇게 말을 많이 하고, 편안하게 얘기한 적이 없었다” “범행에 후회는 없다. 내가 죄책감을 가졌으면 이렇게 했겠느냐”고 말해 일부 경찰 관계자들이 혀를 내두른 바 있다. 때로는 포토라인에 설 때마다 사진 기자를 향해 히죽 웃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영등포경찰서 정철수 서장은 “(정 씨가) 범행 당시 큰 죄책감을 느끼지 않은 것으로 보이고 범행을 저지른 뒤에는 만족감을 느꼈다는 내용의 진술을 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경찰 관계자는 “워낙 내성적이고 대인기피증이 심해 이전에는 남들에게 관심을 받아 본 적이 없는 것 같다”며 “좋은 일은 아니지만 사회적인 주목을 받다 보니 우쭐하는 기분이 드는 모양”이라고 전했다.
이진설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