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작전 물거품 되자 서로를 향해 주먹질
국내 양대 게임회사를 이끌고 있는 김택진 엔씨소프트 대표(왼쪽)와 김정주 넥슨 대표가 엔씨소프트를 놓고 경영권 분쟁을 예고하면서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서도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그래픽=장영석 기자 zzang@ilyo.co.kr
김택진 엔씨소프트 대표와 김정주 넥슨 대표는 서울대학교 컴퓨터공학과 1년 선후배 사이다. 같은 과 출신이지만 성향은 다르다. 85학번 김택진 대표가 전형적인 개발자 타입이라면, 86학번 김정주 대표는 경영에서 더 두각을 드러냈다.
지난 2003년 김택진 대표가 쓴 한 칼럼에는 “내가 작성한 프로그램이 동작하면 너무 좋아 방바닥에 대자로 누워 천장에서 파란 하늘을 그려봤다”며 프로그램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김택진 대표는 서울대 SCSC(서울대 컴퓨터 스터디 클럽)에서 이찬진 드림위즈 대표 등과 함께 공부에 매달렸다. 이후 김택진 대표는 한메타자교사에 있던 ‘베네치아’라는 타자게임을 만들며 본격 게임 개발로 뛰어들었다.
반면 김정주 대표는 서울대 컴퓨터공학과를 졸업하고 카이스트(KAIST·한국과학기술원) 대학원 전산학과에 들어갔다. 지난 1994년 카이스트 박사과정을 밟던 김정주 대표는 서울대학교 컴퓨터공학과 86학번 동기인 송재경 현 엑스엘게임즈 대표와 넥슨을 차렸다. 넥슨에서 두 사람은 세계 최초 상용화 MMORPG(대규모 다중 사용자 온라인 롤플레잉 게임)인 ‘바람의 나라’ 개발을 시작했다.
송 대표는 김택진 대표와 김정주 대표의 핵심 연결고리다. 과거 한글과 컴퓨터에서 일하며 김택진 대표와 친해진 송 대표가 넥슨에서 바람의 나라를 개발할 때도 같이 일하던 김정주 대표와 함께 셋이서 자주 만나 술을 마시곤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송 대표가 바람의 나라를 개발하는 동안 김정주 대표는 개발 예산 확보와 회사 경영에 집중했다. 하지만 바람의 나라 완성 직전 송 대표는 김정주 대표와 갈등을 빚고 넥슨을 나왔다. 바람의 나라가 ‘대박’ 치는 것을 지켜보며 송 대표는 아이네트로 옮겨 리니지 개발을 시작했다. 이때 엔씨소프트를 창업한 김택진 대표가 아이네트를 인수했다. 국내 최고 개발자인 송 대표를 영입하기 위해 김택진 대표가 넥슨을 인수하려고 했으나 송 대표가 아이네트로 옮겨가 아이네트 게임부문을 인수했다는 설이 업계에서 돌기도 했다.
넥슨에서는 송 대표가 개발을 맡고 김정주 대표가 지원을 했다면, 엔씨소프트에서는 네트워크 전문가인 김택진 대표와 게임 전문가인 송 대표가 같이 게임을 만들었다. 두 대표가 만든 리니지는 그야말로 ‘초대박’을 쳤다. 게임 시장을 싹쓸이하는 것을 넘어 PC방 확산에 큰 기여를 했고 중독으로 인한 사회문제로까지 대두됐다.
이렇게 해서 송 대표는 두 게임의 아버지가 됐고, 국내 게임계를 이끄는 ‘양김’을 반석에 올려놓게 된다. 바람의나라와 리니지는 게임 전문가인 송 대표의 취향이 많이 들어가 있다. 만화광인 송 대표 덕분에 두 게임 모두 동명의 순정만화인 김진 작가의 <바람의 나라>와 신일숙 작가의 <리니지>를 원작으로 하고 있다.
두 대표의 성향처럼 두 회사의 길도 달랐다. 엔씨소프트는 리니지 이후에도 ‘리니지2’, ‘아이온’, ‘블레이드앤소울’ 등 자사의 게임 개발에 집중했다. 넥슨은 개발보다는 좋은 안목으로 대박 날 게임을 골라 배급하거나 M&A를 했다. 지난 2008년 약 3800억 원을 지불하고 ‘던전앤파이터’를 만든 네오플을 인수한 게 대표적 사례다. 지난해 4월 발표한 2013년 네오플의 매출은 4528억에 영업이익이 3974억 원으로 영업이익률 91%라는 놀라운 기록을 남겼다.
치열하게 경쟁하던 넥슨과 엔씨는 지난 2012년 공통의 목표로 뭉치게 됐다. 미국 게임회사인 EA 인수를 위해서였다. 게임산업 시장 조사업체인 뉴쥬닷컴(Newzoo.com)이 발표한 ‘전 세계 게임업체 2014년 상반기 매출 톱 25’ 자료를 보면 EA의 매출은 약 23억 달러로 전체 2위를 기록했다. 넥슨은 8억 2000만 달러로 10위를, 엔씨소프트는 3억 8000만 달러로 21위를 차지했다. 넥슨 관계자는 “당시 EA의 사업이 잠깐 휘청하면서 주식이 급락, 매수 가능성이 있던 순간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보스 몬스터’인 EA가 잠시 약해진 틈을 타 두 영웅이 힘을 합친 셈이다.
EA를 잡기 위해서는 각각이 아니라 두 회사가 총력을 합쳐야했다. 김정주 대표는 EA 인수를 추진하는 데 당장 부족한 현금을 채워주기 위해 김택진 대표의 주식 321만 주, 지분 14.8%를 주당 25만 원에 매수해 약 8000억 원의 실탄을 만들어줬다. 김정주 대표는 이미 일본 증권시장에 IPO(기업공개)를 성공적으로 마쳐 현금 보유량이 충분했던 덕이다. 하지만 EA 인수전은 불발에 그쳤다.
인수가 불발되면서 두 회사의 불편한 동거가 시작됐다. 엔씨소프트의 14.8%를 보유한 넥슨은 분명 엔씨소프트의 대주주이지만 경영에 참여할 수 없었던 까닭에서다. 또한 넥슨과 엔씨소프트의 공동 게임개발팀을 발족시켜 만들던 ‘마비노기2 아레나’도 개발 중단을 결정하며 서로간의 입장차만 확인했다.
지난해 10월 넥슨은 0.38%의 엔씨소프트 주식을 추가 매수해 지분비율이 15.08%가 됐다. 지분율이 15%가 넘으면 기업결합 요건에 해당돼 실질적으로 회사를 지배할 수 있다. 넥슨은 이때에도 단순 투자목적이라고 발표했지만 엔씨소프트는 크게 반발한 바 있다. 엔씨소프트는 넥슨이 M&A 야심을 드러낸 것으로 봤기 때문이다. 결국 지난 1월 27일 넥슨이 지분보유 목적을 단순투자에서 경영참여로 변경 공시하며 ‘혈전’이 벌어지게 됐다.
넥슨 관계자는 “서로 소통이 안 되고 있기 때문에 (경영참여 공시는) 대화할 수 있는 창구 마련의 목적도 있다”고 밝혔다. 이에 엔씨소프트 관계자는 “두 회사는 넥슨은 배급, 엔씨소프트는 개발로 서로 다르게 특화돼 있다”며 “마비노기2 아레나에서 확인했듯 함께 작업하는 것이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다시 넥슨 관계자는 “두 회사는 충분히 시너지가 나올 수 있는 회사라고 생각한다”며 “긴밀한 협업을 통해 회사 가치를 늘릴 수 있다고 본다”고 반박했다.
김택진 대표 부인 윤송이 사장
엔씨소프트 윤진원 커뮤니케이션실장은 “넥슨이 지난 22일 오후에 변경공시를 하겠다고 최종 통보해왔고, 임원 승진은 그 다음날에 최종 확정됐다. 승진 발표 때문에 공시 변경이 이뤄졌다는 이야기는 억측이자 물타기”라며 “매년 이 기간에 정기적으로 진행하는 인사 발표이고 내부 직급 승진”이라고 말했다. 다른 엔씨소프트 관계자도 “부사장으로 일한 지 7년 만에 승진했다”고 강조했다.
윤 사장이 논란의 중심이 된 이유에는 게임업계에서 윤 사장의 능력을 크게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 탓도 있다. ‘천재소녀’로 유명한 윤 사장이 SK텔레콤에 영입돼 만든 ‘1㎜’도 시장에서 큰 호응을 얻지 못했던 경험이 있다. 현재 윤 사장이 맡고 있는 북미 법인에서 큰 수익을 낸 ‘길드워2’도 윤 사장의 능력보다는 엔씨소프트의 자회사인 게임 스튜디오 아레나넷이 워낙 잘 만들었기 때문으로 보는 시선이 많다.
하지만 엔씨소프트 관계자는 “엔씨소프트의 성과가 김택진 대표의 성과인 것처럼 아레나넷의 성과는 북미지역을 총괄하는 윤 사장의 성과로 봐야한다”며 “더군다나 게임은 아무리 잘 만들어도 유통·지원·마케팅 등이 받쳐주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다”고 말했다. 게임업계 전문가는 “윤송이 사장은 MIT에서 전공도 UX(사용자 경험) 분야라 게임회사에 잘 맞는다”며 “1㎜ 자체가 수익용 사업도 아니고 파일럿이었으며 당시로선 잘 만들었다”고 두둔했다.
엔씨의 상징인 김택진 대표가 경영권을 잃는다면 핵심인력 유출로 기업가치가 떨어질 것이라는 우려도 있다. 그러나 게임업계 관계자는 “엔씨소프트 문화에 익숙한 사람들이 넥슨에 인수되는 걸 못마땅해 하겠지만, 엔씨소프트나 넥슨 모두 워낙 덩치도 크고 몸값도 비싸 갈 만한 데가 마땅치 않다”며 “텐센트(세계 게임업계 1위인 중국 회사)나 제3의 대형 전주가 등장해서 스튜디오 단위로 쓸어 가면 모를까 핵심인력 유출은 해당 사항이 없을 것 같다”고 주장했다.
싸움의 배경이 지분에 있기 때문에 결말의 실마리도 지분이 갖고 있다. 넥슨 관계자는 “앞으로 엔씨소프트의 대응을 지켜보며 주식을 매입하든 매각하든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고 말했다. 엔씨소프트 관계자는 “넥슨이 만약 지분을 판다고 한다면 가격 적정성 검사를 통해 적절하면 매수할 수도 있다”고 알렸다. 한 M&A 전문가는 “넥슨이 8000억 원을 투자했지만 현재 주가와 단순 비교했을 때 1000억 원 이상 손해”라며 “경영참여 공시로 주가를 올리고 엑시트(투자금 회수)하려는 계획일 수도 있다”며 투자에 주의를 당부했다.
김태현 기자 toy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