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팀엔 ‘황태자’도 ‘아이들’도 없다”
슈틸리케호가 5전 전승을 내달리며 호주 아시안컵에서 결승에 진출했을 때 대표팀 감독을 역임한 A 씨는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이런 얘기를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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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틸리케 감독은 사심과 외압에서 벗어나 철저하게 실력을 바탕으로 선수들을 선발했다. 작은 사진은 대표팀 훈련 모습. 사진제공=대한축구협회
히딩크나 슈틸리케 감독처럼 외국인 감독이 대표팀에서 좋은 성적을 내는 데에는 축구협회의 지원도 있겠지만, 인맥이나 관계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팀을 맡았을 때는 대표팀 명단 선정에도 고위층의 입김이 심하게 작용했다. 누구는 꼭 넣어야 하고, 누구는 뺐으면 좋겠다는 얘기도 들었다. 명단 선정에서부터 태클이 들어오면 내가 구상하는 대표팀 색깔이 흐려지면서 결국엔 이도저도 아닌 결과 내기에만 급급한 축구를 하게 된다. 많은 연봉을 지급하면서 모셔온 외국인 감독한테는 이런 방법이 통하지 않는다. 그렇다보니 외국인 감독은 대표팀을 운영하는 데 있어서 한국 지도자들보다 훨씬 자유롭고 주관적으로 자기 색깔을 입혀나간다. 선수 선발부터.”
전 축구대표팀 감독 A 씨는 한국 지도자들이 선수를 뽑으면 ‘의리’로, 외국인 지도자의 선수 선발은 ‘실리’로 보는 차별된 시각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홍명보 감독으로 인해 ‘의리 축구’라는 말이 나왔지만, 대표팀 감독까지 맡은 사람이 무조건 의리로만 선수를 발탁하지 않는다. 협회 고위 관계자의 간섭 외엔 자기가 뽑고 싶은 선수를 뽑는다. 그런데 여론은 어떻게 해서든 인맥으로 엮으려 한다. 그런 점들 때문에 부담을 느끼게 되고, 선수 선발하는데 폭이 좁아질 수밖에 없다.”
‘의리 축구’로 대변되는 이는 홍명보 전 대표팀 감독이었다. 독일에서 맹활약하고 있는 손흥민보다는 축구장 밖에서 다양한 화제를 양산했던 박주영에게 더 많은 관심과 손길을 보냈기 때문이다. 급기야 월드컵 최종 엔트리 발표에선 ‘소속팀에서 주전 선수로 뛰고 있는 선수’라는 선수 선발의 원칙을 깨트리면서까지 박주영을 발탁했고, 그로 인해 축구팬들은 홍 전 감독을 향해 ‘의리 축구’라고 비아냥거리며 비난을 가했다. K리그에서 뛰고 있는 선수보다는 해외파 중에서도 유럽에서 활약하는 선수들을 중용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슈틸리케 감독은 그의 황태자로 불리는 이정협 카드로 아시안컵의 이슈를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현재 상무 소속인 이정협은 자칫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무명 선수로 머물 수 있었지만 슈틸리케 감독의 안목으로 대표팀에 발탁, 아시안컵에서 맹활약을 펼쳤다. 이동국, 김신욱의 빈자리가 느껴지지 않을 만큼 자신을 향한 의문부호를 느낌표로 바꿔놓은 것.
슈틸리케 감독은 이전의 한국 지도자들과는 달리 ‘사심’과 ‘압력’에서 벗어나 자신의 안목을 믿고 선수를 발탁했다. 해외파 선수들을 보러 외국으로 나가기보다는 K리그 현장을 돌며 유망주 발굴에 노력과 애정을 쏟았다. 유럽파보다는 일본, 중동에서 활약 중인 선수들을 불러 들였다. 브라질월드컵에서 뛰었던 미드필드의 김보경, 박종우, 지동원, 하대성을 빼고 그 자리에 남태희(레퀴야), 김민우(사간 도스), 한교원(전북), 이명주(알아인)로 채웠고, 수비진에서는 윤석영(퀸스파크 레인저스), 이용(울산), 홍정호(아우크스부르크), 황석호(산프레체 히로시마) 대신 김주영, 차두리(이상 서울), 김진수(호펜하임), 장현수(광저우 푸리)가 메웠다. 골키퍼에도 이범영(부산)이 고배를 들면서 그 자리를 김진현(세레소 오사카)이 차지했다.
브라질 월드컵 당시 대표 선수 23명의 리그별 분포는 유럽파가 10명, K리그가 6명, 중국과 일본 쪽이 6명에 중동파가 1명이었다. 아시안컵에서는 유럽파가 6명으로 줄었고 K리그는 6명으로 현상 유지를 했다. 중국과 일본이 5명, 중동파가 6명으로 약진한 것이 눈에 띈다.
#‘이름값’ VS ‘실력’
브라질월드컵에 이름은 올렸지만 예선 3경기에서 단 1초도 뛰어보지 못하고 돌아왔던 곽태휘는 당시 기자에게 “대표팀은 두 부류로 나뉘었다. 런던올림픽에 출전한 선수들과 그렇지 못한 선수들로”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곽태휘는 “런던올림픽에 참가하지 않고 월드컵 대표팀에 뽑힌 선수들은 조금 다른 느낌을 가졌을 것이다. 아무래도 기존의 선수들과 섞이기가 어려웠을 것이고, 그 분위기 자체가 낯설었을 것이다. 월드컵이란 중요한 대회를 앞두고 개인적인 감정 노출을 최대한 자제하고 조심했지만, 그들의 마음이 어떠했으리라는 건 조금 짐작되는 부분이다”며 안타까움을 드러냈었다.
슈틸리케 감독은 철저히 실력과 기록을 바탕으로 선수들을 선발했다. 선발 후에도 대표팀 내에서의 무한 경쟁을 통해 베스트 11을 정했다. 선수들의 몸 상태에도 철칙이 있다. 컨디션이 100%인 선수만 출전할 수 있으며 90%도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다. 벤치행이 컨디션 난조를 겪는 선수에 대한 배려라기보다는 자기 관리가 완벽하지 않은 선수들에 대한 징벌 차원이었다.
의리, 친소관계에 따라 선수들을 기용하는 것을 끔찍하게 경계하는 것도 슈틸리케 감독의 원칙 가운데 하나다. 그는 최근 기자회견에서 수비진이 자주 바뀌는 원인을 묻는 한 한국 기자에게 “취재를 하고 기사를 쓰라”며 갑자기 화를 낸 적이 있다. 나중에 그가 민감하게 반응했던 이유에 대해 물어보니 “(기자가) 친분이 있는 선수의 출전을 원할지 모르지만 나는 그런 것을 절대 용납할 수 없다”고 강조한 적이 있었다.
#홍명보의 아이들 VS 슈틸리케의 아이들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홍명보의 아이들’은 슈틸리케호에서 몇 명의 선수를 제외하고는 존재감을 찾아볼 수 없다. ‘퐈이야’라는 SNS 글로 인해 비난의 중심에 섰던 정성룡(30·수원)은 이미 주전 경쟁에서 밀려났고, 오랜 기간 대표팀에서 경쟁을 벌였던 김승규(25·울산)마저 김진현의 맹활약으로 인해 불안한 입지에 놓여 있다. 월드컵대표팀에서 주장 완장을 찼던 구자철도 공격형 미드필더 자리의 ‘신성’ 남태희(23·레퀴야)라는 만만치 않은 경쟁자를 만났다(더욱이 구자철은 부상으로 아시안컵 대회 도중 귀국했다).
아시안컵에 참가하고 있는 한 대표팀 선수는 비록 주전으로 뛰지는 못하지만, 벤치에 머물렀다고 해서 감독에 대해 서운하거나 아쉬운 감정이 전혀 없다고 강조했다. 그 선수가 자신의 에이전트에게 보낸 문자에는 슈틸리케 감독에 대한 신뢰가 그대로 담겨 있었다. 에이전트가 기자에게 보여준 문자를 지면으로 옮겨 본다.
“선수들은 감독님이 뽑는 베스트 11이 최고의 카드라고 생각한다. 가장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고 있고, 가장 좋은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 선수들이기 때문이다. 벤치에 있다고 해서 마음을 놓지 못한다. 언제라도 들어가서 뛸 수 있도록 경기에 집중하며 코치의 지시로 워밍업을 한다. 감독님이 베스트 11을 뽑는 기준에 대해 모두 정확히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선발로 뽑히지 못하는 12명의 선수들은 그에 대해 불만을 털어 놓을 수 없다. 그리고 ‘슈틸리케 아이들’로 꼽히는 선수들이 있는데, 그것은 언론이 만들어 낸 언어일 뿐, 우리들 사이에선 ‘황태자’도 ‘아이들’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주로 후반에 교체 투입돼 들어간 선수였다. 언론에서는 이정협, 남태희, 김진현 등이 ‘슈틸리케의 아이들’이라고 부르지만, 정작 대표팀 내에서는 그런 시각 차 없이 공정한 경쟁을 펼치고 있다는 게 그의 설명이었다.
슈틸리케 감독은 지난해 9월 취임 기자회견에서 ‘이상적인 축구 스타일’에 대한 질문을 받고 ‘이기는 축구’를 첫 손에 꼽았다. “어떤 날에는 티키타카(스페인식 짧은 패스 축구)가 승리하고 어떤 날에는 공중볼 축구가 이긴다. 결국 중요한 건 팀의 지능”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당시 했던 말을 아시안컵에서 그대로 증명해 보였다.
“한국 사령탑은 내 인생 마지막 감독직”이라고 자주 언급했던 슈틸리케 감독. 그에 대해 전 축구대표팀 감독 A 씨가 이런 말을 덧붙였다.
“슈틸리케 감독은 분명 운이 있는 감독인 것 같다. 운도 실력의 일부분이고, 그는 어떻게 해서든 이기는 축구를 해보였다. 아시안컵 이후에는 경기 내용에서 지적받은 많은 문제점들을 안고 해결책을 강구해야 한다. ‘늪축구’ ‘실리축구’도 좋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한국 축구의 미래다. 그에 대해선 누구보다 슈틸리케 감독의 고민이 깊을 것이다. 아시안컵의 성적에 도취하지 말고, 좀 더 냉정하게 한국 축구의 현실을 돌아봐야 할 필요성이 있다. 하지만, 슈틸리케 감독이 아시안컵을 통해 보인 지도력은 A플러스였다.”
이영미 스포츠전문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