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미쳐! 경찰 사택을 털다니…
▲ 어리버리한 도둑들이 등장하는 영화 <레이디 킬러>의 한 장면. | ||
하지만 경찰과 범죄자의 쫓고 쫓기는 싸움에는 언젠가 끝이 있게 마련. 셀 수 없이 터지는 갖가지 사건·사고들을 살펴보면 범인 검거에 반드시 경찰의 피나는 노력이 수반되는 것만은 아닌 듯하다. 어이없는 실수나 무모한 행동으로 경찰의 실적을 쑥쑥 올려주는 ‘친절한’ 범인들도 있으니까 말이다. 스스로 무덤을 판 범인들의 황당한 사연 속으로 한번 들어가보자.
헛똑똑이… 시효 착각형
사건을 저지르고 도피 중인 대부분의 범죄자들이 마치 사병이 전역 일자 꼽아보듯 기다리는 것은 다름 아닌 공소시효의 완성. 현행법상 범죄마다 소를 제기할 수 있는 시한이 정해져 있어 이 기간이 지나면 형벌권이 소멸된다는 점을 악용해 법적 처벌을 면하려는 것이다.
범죄자를 뒤쫓는 경찰 입장에선 ‘공소시효’ 문제가 뛰어넘어야 할 또 하나의 걸림돌이지만 가슴 졸이며 도피생활을 이어가는 범죄자에겐 한 가닥 희망의 동아줄이기도 하다. 즉 범죄자에게 공소시효가 끝나는 날은 그야말로 ‘자유의 날’인 셈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경찰의 추적을 피하려는 범죄자들의 도피행각을 들여다보면 때로 눈물겹기까지 하다. 사기 혐의로 도망다니다 공소시효 만료를 불과 두 달 앞두고 올초 경찰에 꼬리를 잡힌 한 40대 남성의 경우도 그렇다. 당시 첩보를 입수한 형사들이 자신의 은신처로 들이닥쳤을 때 이 사내는 의외로 순순히 두 손을 내밀었다고 한다. “‘하루가 천년 같다’는 말이 성경에 있는데 7년간의 내 도피생활이 그랬다”는 그의 ‘고백’은 그간 그가 받았을 심리적 부담감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미뤄 짐작케 한다.
완전범죄를 꿈꾸던 범죄자들이 한 순간의 실수로 쇠고랑을 차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가장 아이로니컬한 것은 바로 범죄자들이 유일한 ‘희망’인 공소시효를 착각해 스스로 경찰서로 찾아가는 사례다.
지난 8월 16일 사건 발생 7년 10개월 만에 살인혐의로 서울 종로경찰서에 체포된 정 아무개 씨(38)가 바로 그런 케이스. 정 씨는 지난 98년 10월 종로의 한 포장마차에서 함께 술을 마시던 후배가 ‘빌린 돈 30만 원을 갚으라’며 욕설을 퍼붓자 홧김에 흉기로 살해한 혐의(상해치사)로 경찰의 수배를 받고 있던 처지. 범행을 저지른 후 두 달간 국내에서 숨어지내던 그는 점점 옥죄어오는 경찰의 추적을 피해 그해 12월 친동생의 여권을 이용해 해외로 출국했다.
정 씨는 중국과 브라질 등에서 공소시효가 끝나기만을 기다리며 7년 6개월 동안 도피생활을 해오다가 지난 4월 입국했다. 이미 지난해 10월에 공소시효(상해치사의 경우 7년)가 지난 것으로 여긴 정 씨는 마침내 지난 8월 종로경찰서에 찾아가 ‘당당히’ 자수를 하게 된다. 그러나 ‘살인의 추억’을 털고 새 출발을 하려 했던 그에게 돌아온 것은 차가운 쇠고랑뿐이었다. 해외도피 중에는 공소시효가 정지된다는 것을 모르고 있던 정 씨의 ‘착각’ 때문이었다.
9년 전 <한국재계인사록>에 등재된 재벌가만 골라 강도행각을 벌였던 정 아무개 씨(51) 역시 공소시효를 착각해 9년 만에 검거된 ‘비운의 사나이’다.
정 씨는 97년 7월 9일 친형(63)과 함께 서울 성북동 모 기업 회장의 집에 침입, 가정부를 결박하고 망치로 금고를 부순 뒤 1300만 원 상당의 금품을 빼앗는 등 모두 다섯 차례에 걸쳐 신출귀몰하게 부잣집을 털었다. 그러나 마지막 범행 5일 만에 친형이 체포되면서 이들의 강도행각에도 브레이크가 걸리고 만다. 정 씨는 훔친 보석 중 값이 나가는 것들만 따로 추려 컵라면 용기에 넣어둔 뒤 경찰에 보석을 숨긴 장소를 알려주고 형의 선처를 호소했다.
경찰은 자수를 권유했지만 이날 저녁 정 씨는 홍콩행 비행기에 몸을 싣고 해외 도피생활을 시작했다. 그뒤 홍콩에서 호주로 은거지를 옮긴 정 씨는 현지에서 세차장을 운영하며 정착했다. 하지만 여권 유효기간이라는 뜻하지 않은 난관에 봉착, 지난 7월 초 입국하게 된다.
뵈는 게 없다? 무모형
현직 경찰관들이 거주하는 사택아파트에 침입해 절도행각을 벌이다 검거된 ‘간 큰’ 범인도 있었다. 지난 7월 17일 절도 혐의로 경북 구미경찰서에 붙잡혀온 김 아무개 씨(37)가 바로 그런 경우. 김 씨는 구미 경찰서 형사과 소속 이 아무개 순경(29)의 집에서 현금과 신용카드를 훔쳤다가 불과 범행 서너 시간 만에 체포됐다.
경찰관 집을 턴 것만 해도 무모한 짓이었지만 김 씨는 무지하기까지 했다. 범행 뒤 그는 인근 여관으로 찾아가 훔친 신용카드로 숙박비를 결제했고 결국 카드 결제내역을 조회하고 달려온 피해자 이 순경에게 곧바로 검거됐다. 김 씨가 멋모르고 침입한 아파트는 구미경찰서 소속 경찰관들이 모여 사는 곳으로 이를 몰랐던 김 씨는 ‘호랑이굴’에 제 발로 걸어들어갔던 셈이다. 김 씨는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망연자실했다는 후문.
범행 중 SOS… 체력고갈형
자신의 체력을 고려하지도 않고 고난이도(?)의 범행을 시도하던 한 50대 절도범이 현장에서 119구조대에 의해 구조됐다가 경찰에 체포되는 황당한 사건도 있었다.
지난 4월 25일 오전 7시경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의 한 아파트. 어디선가 들려오는 다급한 구조 요청에 위를 올려다본 경비원 A 씨는 밧줄에 의지해 아파트 22층 외벽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는 한 중년남성을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119구조대에 의해 이 남성은 20여 분 만에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다.
이른 아침부터 요상한 괴성을 내며 “살려달라”고 애원하던 이 남자, 알고보니 아파트 난간을 타고 가정집에 침입하려던 전과 6범의 절도범 윤 아무개 씨(59)였다. 경비원을 피해 옥상까지 올라가는 데는 성공했으나 평범한 방법으로는 집에 침입하기가 어렵다고 판단한 윤 씨는 나름대로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 고심 끝에 생각해낸 것이 바로 밧줄을 이용한 ‘고공침투’. 윤 씨는 밧줄 한 쪽을 옥상 파이프에 고정시키고 다른 한 쪽을 자신의 허벅지에 동여맨 뒤 밧줄을 잡고 아래로 내려가는 ‘곡예’를 감행했다. 그러나 공중에 매달린 채 드라이버로 창문을 열려 했지만 생각대로 잘 되지 않았던 것이 문제. 연거푸 계속되는 실패에 체력이 바닥난 윤 씨는 결국 밧줄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 구조를 요청하게 됐던 것이다.
환갑이 다 돼가는 나이에 과감한 줄타기를 시도했던 윤 씨는 이번 사건까지 절도미수만 네 번째였던 것으로 드러났다. 나쁜 손버릇을 고치지 못한 윤 씨는 결국 망신만 당한 채 또다시 철창 신세를 지게 됐다.
건망증?… 분실·주의산만형
‘증거를 남기지 마라’는 말은 모든 범죄자들의 수칙이다. 완전범죄를 꿈꾸는 범인들은 범행 현장에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갖은 수단을 동원하곤 한다. 그러나 희미한 지문조차 남기지 않는 지능범들과는 대조적으로 현장에 자신의 소지품을 흘리고 다니는 ‘칠칠치 못한 범인’들도 적지 않다.
지난 7월 7일 밤 서울 마포구의 한 가정집에 침입해 A 양(15)과 A 양의 동생(13)을 성폭행하려 한 혐의로 마포경찰서에 입건된 강 아무개 씨(35). A 양의 동생을 스타킹으로 묶어놓고 A 양을 강간하려던 강 씨는 침착하게 스타킹을 푼 A 양의 동생이 ‘이젤’을 집어던지며 소리를 지르자 혼비백산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났다.
그러나 강 씨는 너무 놀란 나머지 자신이 들고 들어왔던 가방을 현장에 떨어뜨리고 가는 치명적 실수를 저질렀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은 강 씨가 남기고 간 가방에서 명함을 발견해 ‘가뿐하게’ 그를 검거하는 데 성공했다.
너무나 긴 꼬리… 집착형
지난 2월 22일 절도 혐의로 대구 수성경찰서에 체포된 한 30대 남성은 가히 ‘집념의 사나이’로 불릴 만했다. 무슨 억하심정인지 같은 집만 연속해서 세 번이나 털다가 결국 집주인에게 붙잡혀 ‘질질’ 끌려왔기 때문이다.
사건의 장본인은 최 아무개 씨(30). 최 씨는 지난 2월 11일부터 이 아무개 씨(59)가 살고 있는 대구 수성구의 다세대 주택에 무려 세 차례나 침입, 모두 480만 원 상당의 금품을 훔친 혐의로 구속, 기소됐다.
처음에 집주인 이 씨가 외출한 뒤 방충망을 뜯고 집 안에 침입해 금품을 턴 최 씨는 이 돈으로 PC방을 전전하며 지냈다. 하지만 이내 돈이 떨어지자 다시 같은 수법으로 이 씨의 집을 털게 됐고 이 같은 연쇄 범행이 결국 화를 부르게 된다.
며칠 간격으로 두 번이나 집안을 털리자 화가 치민 이 씨는 반드시 자기 손으로 이 괘씸한 도둑을 잡아 본때를 보이겠다고 벼른다. 이 씨는 환갑이 다 된 나이었지만 우람한 체격을 자랑하는 10년 경력의 헬스 마니아. 저녁 운동을 하러 외출한 시간에 꼭 도둑이 드는 것을 이상히 여긴 이 씨는 이 사건이 동일범의 소행이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조만간 도둑이 다시 자신의 집을 찾을 것으로 예상하고 만반의 준비를 다했다.
아니나 다를까. 며칠 후 이 씨의 예상대로 돈이 떨어진 최 씨가 또다시 이 씨 집을 ‘방문’했다. 저간의 사정을 알 리 없는 최 씨는 이날도 금품을 훔쳐 유유히 빠져나오다가 이 씨와 마주치게 된다. 왜소한 체격의 최 씨는 결국 힘 한번 써보지도 못하고 단숨에 이 씨에게 제압되고 말았다.
‘꼬리가 길면 밟힌다’는 것은 절도범인 최 씨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을 법한 그들 세계의 ‘금언’. 그런데 대체 왜 최 씨는 세 차례씩이나 같은 집을 털러 가 화를 자초했던 것일까. 그가 이 씨 집에 ‘집착’했던 이유를 경찰도 궁금해할 수밖에 없었다.
감히 날 속여?… 해코지형
지난 4월에는 세 사람이 함께 모의해 사기극을 벌였으나 한 공범이 자신의 몫을 나눠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다른 공범들을 경찰에 신고하는 웃지 못할 일도 벌어졌다.
마땅한 직업도 없이 떠돌아다니던 A 씨(37)는 지난 봄 평소 알고 지내던 B 씨(58), C 씨(36)와 함께 일명 ‘탕치기’ 사기극을 공모했다. 구인난을 겪고 있는 선주에게 접근해 ‘선원으로 일하겠다’고 한 뒤 선급금을 챙겨 도주하자는 것이었다.
각각 선원소개업자와 선원으로 역할까지 분담한 이들은 4월 24일 전북 부안의 식도라는 작은 섬으로 향했다. 선급금을 받은 뒤 소개업자로 위장한 A, B 씨가 먼저 여수로 떠나면 배에 승선하기로 한 C 씨가 도망나오는 것이 이들의 계획이었다.
사전 각본대로 선급금 200만 원을 받아 30만 원만을 자신의 교통비로 남겨두고 나머지를 A 씨와 B 씨에게 전달한 C 씨는 ‘약속대로’ 다음날 여수로 도망나왔다. 그러나 A 씨와 B 씨는 돈을 가지고 이미 잠적한 뒤였다. 이에 분노한 C 씨는 같은 달 27일 여수해경에 직접 찾아와 두 사람을 사기혐의로 신고했다. 당시 술에 취한 상태였던 C 씨는 “3명이서 170만 원을 사기쳤으니 그중 내 몫은 60만~70만 원은 된다”며 공범들을 비난했다. 하지만 해경은 그 자리에서 C 씨부터 체포했고, 그의 진술에 따라 나머지 공범들도 검거할 수 있었다.
이수향 기자 lsh@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