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토리’ 뺏고나선 ‘늑대짓’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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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남 산다람쥐’의 표적이 된 청계산 자락의 고급 주택가 풍경. | ||
조 씨는 등산객으로 위장, 등산로를 따라 이동하며 신속하게 범행을 저질러온 탓에 일명 ‘강남 산다람쥐’로 불렸던 장본인. 경찰 조사결과 그는 특수강도죄로 복역하다 풀려난 지 불과 넉 달 만에 또다시 범행을 저지르기 시작한 것으로 밝혀졌다. 조 씨는 자신의 범행을 뒤늦게 후회했지만 사회의 약자인 여성들만을 상대로 강도강간을 저지른 데 대한 차가운 법의 심판을 피할 수 없게 됐다.
조 씨는 특수강도 혐의로 청송감호소에서 복역하다 지난 1월에 만기출소했다. 전과 7범인 그가 지금까지 옥중에서 보낸 세월만도 모두 18년. 청년기의 대부분을 교도소에서 보낸 조 씨는 제대로 된 사회생활을 해본 적이 없었다. 가정이 온전할 리도 만무했다. 젊은 시절부터 교도소를 제 집처럼 들락거렸던 탓에 결혼생활 역시 평탄치 못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의 반복되는 구속과 출소를 견디지 못한 아내와 결국 수년 전 이혼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올초 다시 자유의 몸이 된 조 씨는 한동안 새 삶을 꿈꿨다. 그러나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한 데다 특별한 기술도 없던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또한 어느 곳에서도 전과 7범인 그를 쉽사리 받아주지 않았다. 결국 이천에 있는 형 집에 기거하면서 일용직 공사판을 떠돌아다니던 조 씨. 막연히 하루 하루를 보내던 어느 날 그는 우연히 윷놀이 도박판에 발을 들이게 된다.
하지만 변변한 직업조차 없던 그에게 달리 재산이 있을 리 만무했다. 그나마 조금 있던 생활비마저 도박판에서 순식간에 날린 그는 빈털터리가 된 상황에서도 도박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경찰 조사에서 조 씨는 “도박은 암울하고 막막한 현실을 뒤집어버리고 ‘인생역전’을 할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이었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여기저기서 돈을 빌려 도박판에 쏟아부었지만 늘어나는 것은 빚뿐이었다. 보통 사람이 도박으로 돈을 벌 수 없다는 것은 ‘타짜’들도 인정한 도박판의 불문율. 하지만 좀처럼 미련을 버리지 못한 조 씨는 본격적으로 판돈 마련에 나서게 된다.
조 씨는 평소 운동차 자주 다니던 대모산과 청계산 일대를 오르내리며 돈을 모을 방법을 궁리했다. 그러던 중 산자락 등지에 대규모로 들어선 고급 전원주택 단지에 자연스레 눈길을 돌리게 됐다. 주택들은 하나같이 넓은 평수에 화려한 경관을 자랑하고 있었다. 고급 외제차들이 주택가를 들락거리는 모습도, 골프채 세트를 짊어지고 집을 나서는 사람들도 자주 눈에 띄었다.
수개월에 걸쳐 이 일대를 지켜본 결과 조 씨는 산자락 부근 주택가에 유명인사와 신흥 부유층들이 밀집해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특히 조 씨가 주요 범행대상으로 삼은 대모산 일대의 자곡동, 율현동 단지는 8·31 부동산정책과 관련해 강남 대체 신도시의 유력한 후보로 거론됐던 곳으로 역세권과 가깝고 주변 환경도 좋아 고급주거지로 부상한 지역이었다.
조 씨는 그동안 쌓아온 자신의 ‘풍부한’ 경험을 토대로 위험한 범행계획을 세우게 된다. 매일같이 산자락을 오르며 주민들의 생활스타일과 출퇴근 시간을 비롯해 낮시간에 집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집이 비어 있는 시간이 언제인지 등을 체크했다. 또한 외출시 어느 주민들이 보안장치를 작동시키는지, 창문 등을 잠궈두고 나가는지도 면밀히 파악했다.
조 씨는 새벽부터 등산복을 챙겨입고 수십 번씩 동네를 돌며 인근 지리를 철저히 익히고 도피할 동선을 미리 파악해두는 치밀함도 잊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행색은 누가 보나 평범한 등산객이어서 누구도 눈여겨보는 사람은 없었다.
조 씨가 이들 동네를 관찰하며 파악한 중요한 사실은 대부분의 경우 식구들이 보통 이른 아침에 출근 혹은 등교길에 올라 오후 늦게 들어오며 오전과 낮시간대에는 여성과 노인들만이 집을 지키고 있다는 점이었다. 또 해외출장이나 골프를 치러가기 위해 장기간 집을 비우는 경우도 많았다. 고급주택가임에도 시내의 고급 주거단지와 달리 경비가 철저하지 않다는 점도 조 씨가 범행을 계획하게 된 이유 중 하나였다.
범행대상을 물색하던 조 씨는 서초구 내곡동의 한 저택을 첫 범행 대상으로 지목했다. 그리고 식구들이 집을 비우기만을 기다렸다. 마침내 지난 5월 중순 어느 날 복면을 한 조 씨는 미리 준비한 길이 30㎝가량의 드라이버로 이 집의 다용도실 창문을 뜯고 침입, 혼자 방에 있던 A 씨(여·20)를 위협해 순식간에 돈 될 만한 금품을 배낭에 쓸어넣었다.
모든 범행은 ‘산다람쥐’라는 별칭답게 신속하고 재빠르게 이뤄졌다. 게다가 조 씨는 범행 후 공포에 떨고 있던 A 씨의 양손을 운동복으로 묶은 뒤 성폭행하고 유유히 자리를 떴다. 이것을 시작으로 조 씨의 범행은 마치 산다람쥐가 도토리 까 먹듯 수시로 이어졌다.
조 씨가 지난 6개월 동안 저지른 범행 건수는 지금까지 밝혀진 것만 무려 50여 차례로 피해액만 1억 2000여만 원에 달했다. 조 씨가 훔친 물품들은 값비싼 귀금속과 패물, 세계 각국의 지폐뭉치는 물론 중소기업 부회장 집에서 나온 ‘금 골프공’과 수백만 원을 호가하는 산악용 자전거도 있었다. 또 조 씨는 피해자의 신고를 막기 위해 범행 후에 10여 차례에 걸쳐 여성을 성폭행하거나 성희롱하는 파렴치한 모습을 보였다.
경찰이 ‘산다람쥐’에 대한 제보를 접하게 된 것은 지난 5월 말께. 대모산 자락 아래 위치한 고급주택가에서 ‘도둑이 자꾸 든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면서부터였다. 하지만 ‘복면을 한 단단한 체격의 남성이 침입, 돈을 빼앗고 성폭행을 일삼는다’는 소문 외에는 아무런 단서가 없었다. 더구나 강간 범행의 성격상 피해자 중 상당수가 구체적인 피해사실에 대해서는 함구해 수사가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경찰은 ‘산다람쥐’가 자주 출몰하는 지역을 중심으로 오랜 기간 잠복수사를 편 끝에 결국 조 씨의 덜미를 잡을 수 있었다. 이번 사건의 피해자들 중에는 기업체 CEO와 원로 국악인, 대학교수 등 사회지도층 인사가 상당수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부유층의 특성상 신고되지 않은 사건이 더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조 씨를 상대로 여죄를 추궁하고 있다. 한 수사관계자는 “범인이 등산객으로 위장해 돌아다니다가 범행 직전에 복면을 썼기 때문에 인상착의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또 금품을 훔치고 신고를 못 하도록 강간을 일삼았기 때문에 피해자들의 적극적인 제보가 부족했다”며 ‘산다람쥐’를 더 일찍 검거하지 못한 아쉬움을 토로했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